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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55화 (55/145)

55화

세르기가 다프네를 지하실로 데려간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온갖 비명이 난무하는 지하실에서 세르기는 환하게 웃었다.

“네 몸이 실험을 버틸 수 있을 이 순간을 기다려 왔어, 누이.”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 끌려온 다프네는 끔찍한 광경에 넋을 놓았다.

말 그대로 실험이었다.

분명 사람인데 실험용 쥐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실험당하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를 얼마나 오랫동안 설득했는지 몰라. 방계 친척들에게 손을 대 봤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널 여기로 데려오지도 못했을걸?”

그렇게 말하는 세르기의 시선이 향한 곳은 몇 달 전 마차 사고를 당해 사망한 사촌 하나가 있었다. 낙마 사고를 당해 사망한 사촌도, 노예 상인들에게 납치당해 실종된 사촌도, 그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사촌까지.

세르기는 다프네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 오라버니. 저 돌아갈래요.”

세르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프네.”

그가 화났을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아는 다프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뒤를 돈 세르기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다프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다프네는 안심했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너 대신 네 하녀의 아이를 데려올까?”

“그건….”

그 아이는 이제 막 여섯 살에 불과했다.

다프네는 망설였고, 세르기는 옅은 한숨과 함께 손을 까닥였다.

“아, 아가씨.”

있는 줄도 몰랐던 세르기의 시종이 데려온 것은 다프네의 하녀와 그 아이였다.

그의 시종은 아이의 몸에 이상한 장치를 연결했다.

“아가씨, 이게 도대체 무슨….”

다프네는 눈을 깜빡였다.

장치에서 빛이 나오고 여섯 살 어린아이의 몸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안 돼!”

하녀는 울부짖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시종을 떨쳐 내고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간 하녀는 절망했다.

“이런. 누이의 잘못된 선택으로 불쌍한 생명만 낭비됐네.”

아이를 잃은 하녀의 원망 어린 눈빛을 다프네는 잊을 수 없었다.

결국 비밀을 알게 된 하녀 역시 죽었다.

세르기는 다프네를 순순히 풀어 주었고, 방으로 돌아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으며 다프네를 끌어안던 작은 아이가 죽었다.

“우욱.”

다프네는 치솟는 토기에 숨을 헐떡였다.

다프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유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모는 다프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마님께 말씀드릴게요.”

“어, 어머님께?”

다프네의 친모는 그녀를 낳고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온종일 침실에 누워만 있었다.

“저희, 아무도 몰래 마님을 찾아가요. 그리고 다 말씀드려요.”

한 달에 한 번, 블레드 후작의 기분이 좋을 때만 아주 잠깐 만날 수 있는 어머니를 다프네는 유모의 손을 꼭 잡고 만나러 갔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블레드 후작 부인의 마른 손이 덜덜 떨렸다.

“결국, 결국 다프네 너까지 건드렸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마님, 마님! 진정하세요!”

블레드 후작 부인은 발작하며 피를 토해 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블레드 후작 부인은 사망했다.

평소 몸이 약하긴 했어도 너무나 갑작스럽고 석연치 않은 사망이었다.

부인의 장례가 다 치러진 후에야 블레드 후작이 돌아왔다. 평소와 같이 술 냄새를 풍기면서.

그날 유모는 다프네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가씨, 제가 후작님께 다 말씀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방을 나선 유모는 다음 날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아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마치 하녀의 아이처럼.

나 때문에. 내가 말해서. 내가 잘못해서. 어머니도, 유모도, 하녀도, 그 하녀의 아이도.

“그러게 왜 다른 이에게 말했어. 내 손으로 어머니까지 죽이고 말았잖아.”

세르기는 혀를 찼다.

“더 이상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면.”

세르기는 다프네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다프네가 스스로 그 장치를 자신의 몸에 연결할 때까지.

“쿨럭!”

다프네는 피가 쏟아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세르기는 다프네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실패작이라니….”

경멸 섞인 어조로 중얼거린 세르기는 몇 번이나 더 다프네에게 장치를 연결했다.

울컥, 쏟아지는 피가 시야를 가득 채울 때쯤 다프네는 생각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세르기의 말대로 다프네는 실패작이었으나 그는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실험을 강행했다.

기존에 있던 사촌들의 반 이상이 피를 쏟고 죽었다.

그리고 어느 날.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 몇 명이 그들의 외양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지하실로 내려왔다.

다프네가 딱 한 번 보았던, 신관들이었다.

“저분은 블레드 영애 아닙니까?”

“맞습니다. 방계보다는 직계가 더 효과적일까 싶어서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흥미롭군요. 이번에는 이 다섯이 전부입니까?”

고귀하고 깨끗하다 알려진 신관들은 다프네의 사촌들을 마치 물건 보듯이 훑어보았다.

“대신관님께서 더 많은 인원을 원하십니다.”

다프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들이 이렇게 끔찍한 실험을 당하는 이유는 신전에 넘기기 위함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세르기가 계획한 반역이 블레드 후작이 저지른 죄가 되어 정신없던 그때.

다프네는 이 지옥을 벗어나기로 했다.

“아버지, 저 윈터 공작을 사랑해요. 결혼하게 해 주세요.”

약에 취해 멍하니 있던 블레드 후작은 그 와중에도 그건 어려운 일이라 하자하였으나 다프네가 덧붙였다.

“…제가 그의 약점을 알고 있어요.”

***

다프네는 깊은 수면 밖으로 튕겨 나온 듯 숨을 들이켰다.

거칠게 헐떡이던 다프네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익숙한 동굴이다.

시야가 흐릿했기에 다프네는 제자리에서 눈을 급하게 깜빡였다.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오자 다프네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데미안의 재킷이 툭, 떨어졌다.

“읏.”

몸 구석구석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다프네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상한 곳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눈 떠 보니 동굴인 걸 보면 분명 데미안은….

“…데미안.”

다프네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구석에 있는 데미안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데미안은 다프네의 부름에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다프네는 아픈 몸을 간신히 움직여 데미안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응?”

데미안이 보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목걸이였다. 목걸이를 발견한 다프네의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다프네는 데미안의 몸이 뜨겁다는 것을 눈치챘다.

“데미안, 몸에서 열이….”

“어머니.”

데미안은 그저 우두커니 선 채 다프네를 불렀다.

그러곤 고개를 들었다.

“재가 그때 왜 검은 숲의 입구에 있었는지 아십니까?”

“…….”

다프네는 눈을 깜빡였다.

데미안이 이런 질문을 해 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아세요?”

“…….”

“제 친어머니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데미안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된 말은 생각보다 아팠다.

“…그렇구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무슨… 말?”

“정녕 없으십니까.”

줄곧 일자를 유지하던 데미안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없다… 없으시다고요….”

데미안의 얼굴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다프네는 그런 데미안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도 잠시, 몸에서 나는 열을 가라앉힐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 몸에서 나는 열부터….”

데미안은 주먹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주먹을 뒤집어 펼쳤다. 손안에 있던 것을 본 다프네는 움직임을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머리 장신구였다.

오묘하게 빛나는 보석은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밝고 아름답게 빛났다.

“이걸 왜, 네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다프네는 정신을 잃기 전, 이것에서 엄청난 열기를 느끼며 품에서 꺼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데미안은 머리 장신구를 꽉 쥐었다. 그리고 너무 뜨거워서 지독히도 차가워 보이는 눈으로 다프네를 보았다.

“제 어머니의 유품을… 왜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까.”

말을 하는 데미안은 화를 꽉 억누르기라도 하듯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데미안이 소피아에게 처음 물건을 받았을 땐 목걸이와 머리 장신구, 반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어렸고 감정 조절에 미숙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친모의 남은 물건 따윈 보고 싶지도 않았다.

반쯤 방치하고 있던 그때, 뒤늦게 그것이 유품이었다는 것을 알고 찾았으나 목걸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데미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둔 일이다.

자신의 아둔함에 때문에 유품을 잃어버렸기에 데미안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목걸이를 볼 때면 매번 깊은 늪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물건 중 하나를 다프네가 가지고 있었다.

“반지도 당신이 가져간 겁니까?”

“아니, 아니야.”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다프네는 급히 부정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더는 다프네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럼 이건 어떻게 가져가신 겁니까?”

“…….”

다프네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됐습니다. 말을 꺼내서 무엇하게요. 늘 그랬던 것처럼 부정하고 회피만 할 뿐 제대로 답해 주지도 않으실 거잖습니까.”

“…데미안. 내 말 좀 들어 주렴.”

“전 항상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다프네는 데미안의 주먹 쥔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다프네의 손을 내려다본 데미안은 이제는 그것을 떨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다프네를 더 불안케 만들었다.

“…그 보석에는 너와 상반되는 기운이 담겨 있어.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제발 믿어 줘. 이것을 가까이할수록 네 몸이 흐르는 기가 막히고 마력 각성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몰라. 정말이야.”

다프네의 말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하아. 데미안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설령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

“당신을 증오합니다.”

차라리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어.

털썩.

데미안은 마지막 말과 함께 무너졌다.

“…데미안?”

다프네는 어깨를 붙잡아 뒤집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에 손을 올리는 순간 예상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휘감았다.

‘열이… 열이 너무 높아.’

이대로 몸이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프네는 데미안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프네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다프네의 시선이 동굴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다프네는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데미안에게 덮은 후, 무언가에 홀리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자신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열을 내리는 게 우선이라는 걸 알지만 다프네는 멈출 수 없었다. 다프네는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제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순간, 다프네는 무언가에 부딪혀 크게 휘청거렸다.

“아!”

이미 중심을 잃은 후였기에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프네?”

“…에드먼.”

눈물이 흘러내렸다.

쉴 새 없이 불안정하게 쿵쾅대던 심장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다프네는 에드먼의 옷을 꽉 붙잡았다.

“왜… 왜 이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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