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톡, 톡.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다프네는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은 뺨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었고, 그다음은 습한 공기였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다프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손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 동굴 안이었다.
다프네는 미간을 찡그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살아, 반드시 찾을 테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프네는 정신을 잃은 데미안을 감싼 채 떨어졌다.
에드먼의 말대로 아래는 비로 인해 물이 불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다프네가 자신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데미안을 잡고 수영할 수 없을 정도로 물살이 셌다는 점이다.
“데미안,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
거센 물살에 그대로 휩쓸려 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데미안을 흔들어 보았으나 굳게 닫힌 눈꺼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를 깨우려고 해도 물만 먹는다는 것을 깨달은 다프네는 이내 데미안을 붙잡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내려가던 다프네는 이대로 가다간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 있음을 직감했다.
순전히 운에 맡긴 것이다.
무작정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고 비가 조금 멎은 틈을 타 물가 근처로 움직였다. 먼저 위로 올라간 뒤, 나무에 몸을 뉜 채 떠내려가는 데미안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끌어 올렸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으나 다프네는 쉴 틈도 없이 절대 놓지 않았던 마력석을 꺼냈다.
“제발, 제발….”
엎어져 있는 데미안의 몸을 돌리자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 흘리는 얼굴이 드러났다.
다프네는 부디 늦지 않았길 바라며 떨리는 손으로 마력석을 데미안의 손에 올려놓았다.
정신을 잃은 상태임에도 데미안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마력석을 꽉 쥐었고, 흰색의 빛이 데미안의 몸에 흡수됐다.
그러자 데미안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마침내 모두 사라지자 다프네는 긴장의 끈을 그대로 놓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데미안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다프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데미안을 살렸다.
“하아.”
다프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던 다프네는 데미안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데미안?”
다프네의 잠긴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문득, 불안감이 솟아났다.
다프네는 비틀거리며 동굴의 벽을 짚었다.
“데미안!”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동굴 밖으로 나오자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금방 흠뻑 젖었다.
동굴 밖은 온통 숲이었다.
망설이던 다프네가 한 발짝 걸음을 옮기던 그때.
“어머니?”
풀숲 사이로 과일을 든 데미안이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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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부서져 내렸다.
그 소음을 만들어 낸 장본인, 엘리자벳은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내쉬느라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황, 황녀님.”
시녀의 겁먹은 음성에 엘리자벳이 휙,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다 칭송받는 엘리자벳의 눈은 포악스러움에 젖어 섬뜩함을 자아냈다. 사랑스러운 얼굴과는 사뭇 거리가 먼 모습에 시녀의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다시 말해 봐.”
“그것이… 윈터 공작님께서 일이 바쁘시다면서 돌아가라고….”
시녀는 무언가 날아올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잠자코 화를 식힐 뿐이었기에 시녀가 안도한 순간.
“그레이스! 당장 이거 내 눈앞에서 치워.”
엘리자벳의 시녀로 꽤 오래 일한 시녀의 얼굴은 이내 공포로 물들었다.
그녀의 명을 받은 그레이스가 눈짓하자 기사 두 명이 시녀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화, 황녀님! 부디 살려 주세요! 황녀님!”
시녀의 애절한 부름은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그레이스는 긴장한 상태로 침대 옆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자작극인 걸 들킨 거야. 그레이스. 그래서 공작이 날 보러 오시지 않는 거라고!”
엘리자벳의 중얼거림에 그레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황녀님, 지금 공작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뭐?”
“윈터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검은 숲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종됐어요.”
순간 그레이스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소공작이 유일한 후계자니,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중간에 멈췄다.
고개를 든 엘리자벳의 얼굴은 환했다. 밝은 미소를 머금고는 눈꼬리가 접힐 만큼, 환하게 웃었다.
“당장 블레드 후작에게 연락을 넣어. 그 전에 화장도 좀 지우고.”
그레이스는 윈터 공작이 왔을 때 더 병약하게 보이기 위해 했던 화장을 지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 있던 블레드 후작, 세르기가 엘리자벳을 찾아왔다.
눈치를 살핀 그레이스가 나가자, 엘리자벳이 곧장 물었다.
“윈터 공작 부인이랑 소공작이 검은 숲의 낭떠러지로 떨어진 거. 후작이 한 일이죠?”
“…그렇습니다.”
“후작이 말한 선물이 이거였군요!”
엘리자벳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르기가 엘리자벳에게 접근한 것은 사냥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사냥 대회 동안 에드먼이 제 파트너가 되도록 해 준다는 말에 넘어서 손을 잡았다.
범죄자와 손을 잡았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정말 에드먼이 자신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그를 도와 황제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세르기를 재상으로 올리라고.
만약 자신이 블레드 후작이 되고 재상이 된다면 한 가지 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설마 이런 선물일 줄이야!
한 번에 두 가지 장애물을 치우게 된 엘리자벳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행복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렇습니까.”
세르기의 반응은 건조했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잔뜩 신난 엘리자벳이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릴 즈음, 세르기는 평소처럼 미소를 머금었다.
“그나저나 황녀님. 제가 황녀님께 드린 브로치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세르기는 엘리자벳에게 브로치를 하나 선물했다.
사랑받는 황녀님으로서 온갖 진귀하고 화려한 물건은 다 가지고 있었기에 그 브로치는 그다지 값비싼 물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브로치에 박힌 오묘한 색을 내는 보석은 참으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것을 받은 후부터 거의 매일 착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 모르지만 분명 엄청난 물건인 게 분명해.’
다프네도 그 브로치를 보자마자 사색이 된 채 어디서 얻은 것이냐며 물었을 정도다.
“이혼할 수 없어요.”
건방진 다프네를 떠올린 엘리자벳은 불쾌해하던 것도 잠시, 곧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저절로 콧노래 소리가 나왔다.
“윈터 공작을 만났을 때도 그 브로치를 사용하셨습니까?”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전혀요.”
“…그렇군요.”
엘리자벳은 세르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물었다.
“후작. 정말 윈터 공작 부인이 죽은 게 확실하죠? 소공작도 죽은 거죠?”
“살았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소드 마스터로 각성조차 못 한 상태에서 폭주한 이와 함께 떨어졌다. 운 좋게 살았다 한들 데미안의 오러에 다프네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데미안 역시 폭주를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몸이 터져 죽음을 맞이했을 테고.
물론 이 계획에 다프네가 휘말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건 데미안을 없애기 위한 계획이었으니까.
‘오히려 잘된 일이야.’
어차피 처리해야 할 것을 좀 일찍 처리한 셈이다.
들뜬 엘리자벳을 뒤로한 세르기는 황녀 궁을 나왔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향하던 도중, 누군가와 마주친 세르기는 미소를 지었다.
“윈터 공작님.”
에드먼이었다.
에드먼은 고작 며칠 사이에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폐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입니까?”
그대로 세르기를 지나치던 에드먼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렇네만.”
“다프네를 찾는 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다시금 발을 옮기려던 에드먼이 멈칫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겨우 입꼬리만 끌어 올린 척 억지로 미소 짓고 있는 세르기를 보았다. 그 누가 보아도 여동생의 실종에 가슴 아파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힘쓰는 오라비의 모습이었다.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아무 소식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세르기는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정말… 찾고 있는 게 맞습니까?”
“후작님!”
뒤에 있던 요한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왔으나 에드먼이 손을 들었다. 세르기의 말은 마치 찾을 수 있음에도 모종의 이유 탓에 찾지 않고 있지 않으냐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 소란스러움에 복도를 거닐던 사람들은 아닌 척 그들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어차피 배후를 찾아서.”
“…예?”
“몰랐는가. 다프네와 데미안이 그 아래 떨어진 이유는 살수들 때문이라고.”
세르기는 눈을 깜빡였다.
에드먼에게 보낸 살수들은 몇 번의 세탁을 거쳐 과거가 이미 깨끗해진 자들이다. 배후 같은 걸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폐하께 말씀드리고 오는 길이다. 재상인 그대도 곧 누군지 알게 되겠군.”
세르기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되지도 않는 허술한 함정 따위에 넘어갈 리 없었다.
“…그렇습니까. 배후도 배후지만 다프네의 흔적 하나 발견되지 않으니 저는 그것이 제일 걱정스….”
“각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복도 저 끝에서 급하게 달려오던 알렉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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