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윈터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실종됐다.
본래도 제국의 큰 화젯거리였던 사냥 대회의 마지막 날 엄청난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첫 번째는 세르기 블레드가 블레드 후작위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재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황녀가 독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를 스쳐 가는 이야기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윈터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검은 숲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종되었다는 것.
둘의 마지막을 본 자는 윈터 공작이었고, 그는 이제껏 보인 적 없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사람들의 앞에 나타나 황제에게 이 일을 고했기에 실종 사건은 삽시간에 퍼졌다.
황녀가 독을 먹고 피를 토한 사건이 묻힐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윈터 공작은 황제에게 검은 숲을 수색하겠다는 통보와도 같은 부탁을 한 후 자신의 기사단을 꾸려 수색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날 처음으로 검은 기사단의 모습을 보았다.
눈 밑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공작을 보며, 혹자는 수군거렸다.
윈터 공작께서 설마 공작 부인을….
그러자 다른 이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박했다.
소공작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공작 부인만 실종되셨다면 대충 수색한 후 철수하셨겠지요.
그러자 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지.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을 이렇게까지 찾을 이유가 없잖아?
녹슨 문이 열리면서 소름 끼치는 소음을 길게 내뱉었다.
며칠 내내 비가 내린 탓인지 지하실은 유난히도 습했다. 고인 빗물에 뒤섞인 피 웅덩이 위를 지나가자 끈적한 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오셨습니까.”
소매를 걷은 채 땀을 닦던 요한은 에드먼의 등장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에드먼은 요한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탁, 치이익.
저 멀리서 들리는 비명을 제외하면 조용한 지하실에서 궐련에 불이 붙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요한은 에드먼의 움직임에 따라 진하게 풍기는 궐련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혔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궐련을 깊게 빨았다가, 천천히 연기를 내뱉는 에드먼이 보였다.
부상 탓에 며칠 만에 얼굴을 마주한 에드먼은 마치 한 달 전쯤, 다프네가 사라졌을 때를 상기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 아래 짙게 내려앉은 피곤, 퍼석하게 마른 입술. 풀리지 않는 피로가 쌓여 한층 수척해져 날카로워진 얼굴.
요한의 예상이 맞다면 에드먼은 분명 잠을 자지 못한 지 며칠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다프네와 데미안이 사라진 직후부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자세한 원인은 바로….
“얻은 것은?”
요한은 번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뿌연 연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에드먼의 얼굴에 요한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계속 이어 가는 중입니다만… 어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에드먼이 요한에게 맡긴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혀와 이가 모두 빠진 상태였다.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펜을 내밀어도 글자조차 알지 못하니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에 아직 다 부상을 회복하지 못한 요한에게 맡긴 것이지만 진전은 없었다.
에드먼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인지 요한의 말에도 달라진 것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요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마님께서 폭주하시는 소공작님을 붙잡았다고 들었습니다.”
허공을 응시하던 에드먼의 시선이 요한에게 옮겨졌다.
“소공작님의 오러가 각하과 같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마님이 살아계실 확률은 낮습니다.”
요한은 하고자 하는 말을 묻는 에드먼에게 곧바로 본론을 이어갔다.
“설령 두 분 모두 절벽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마님은...”
“요한.”
에드먼은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들끓는 감정을 억제하듯 꽉 막힌 목소리였다.
“입 다물어.”
“....”
요한은 평소보다 더 불안정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닉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알렉과 전투를 벌이던 닉은 다프네와 데미안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대로 쓰러져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요한은 벽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에드먼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쿨럭!”
축 처져 있던 이가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응급 처치를 시작했으나 피의 양은 상당했고, 몸이 간헐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차갑게 식었다.
“…과다 출혈입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허망하게 떠나보냈다.
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에드먼이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였다.
“으… 으윽….”
낯선 신음에 고개를 돌리자 열린 벽 너머로 의자에 묶여 축 처진 닉이 있었다.
며칠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눈이 떠졌다.
“…각하?”
흐리멍덩한 닉의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가 주위를 살폈다.
“이게 어떻게 된….”
말을 멈춘 닉의 가슴팍에서 탁한 빛이 일렁거렸다.
이내 닉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에드먼은 동시에 주머니 안쪽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닉의 검은 돌의 저주에 연결된 반지가 웅웅, 거리며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에드먼은 곧 이것이 검은 돌의 저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가다간 닉의 심장은 점점 뜨거워지다가 터지게 될 것이다.
“…멈춰.”
에드먼은 반지를 손가락에 낀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닉의 가슴팍에서 맴돌던 검은 빛이 사라졌다. 닉은 거친 숨을 헐떡였다. 그의 몸은 아직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에드먼은 바닥에 쓰러진 닉과 과다 출혈로 죽은 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존재에 대해 끄집어냈다.
“…‘주술사’군.”
“주술사….”
요한은 에드먼의 말을 탄식에 가깝게 되짚었다.
주술사.
흑마법을 이용해 저주를 거는 이들이다.
주술사가 건 저주는 그 해당 주술사가 죽으면 없어진다. 저 주술사가 죽자 닉의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그동안 한 일이 모조리 수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술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에드먼이 몇 년 전 전쟁터에서 수십의 좀비 군대를 만들었던 주술사를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정도로 그들은 드문 존재다.
에드먼은 곧바로 죽은 주술사의 눈꺼풀을 뒤집어 깠다. 완전하진 않지만 붉은 눈이다.
주술사 역시 다른 주술사에 의해 흑마법의 저주에 걸린 상태라는 것이다.
에드먼이 아는 한 주술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이다. 이 사건의 시발점.
“세르기 블레드….”
그의 속셈은 도대체 무엇인가.
***
“흠.”
세르기는 팟, 하며 꺼진 수정 구슬을 보며 턱을 괴었다.
“세르기 블레드.”
죽은 주술사와 눈을 마주 보고 있던 탓인지 마치 에드먼의 얼굴을 직접 마주한 기분이었다.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르기가 몸을 뒤로 뉘었다.
생각보다 이른 시기이지만, 들킨 것 같다.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세르기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독히도 차갑다는 것이었다.
늘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부드럽게만 보이던 그의 인상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다프네….’
신성력은 오러를 가라앉힐 수 있다. 그러나 신성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이들에게 오러는 오히려 독이다.
속이 울렁이는 불쾌함을 다프네는 무려 5년이나 참았다. 비록 다프네는 블레드의 피를 이었음에도 정말 티끌만 한 신성력을 가진 실패작이었으나 오러 울렁증을 앓고 있었다.
‘모르는 눈치던데.’
그 어린 짐승 새끼는 불안정한 자신을 다프네가 바닥만 보이는 신성력을 끌어모아 지켜 주고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세르기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세르기 님. 노아입니다.”
“들어와요.”
자세를 고쳐 앉는 동시에 익숙한 미소를 걸치자 문이 열렸다.
노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르기 님.”
“오랜만이죠?”
세르기는 제 앞에 자리한 이를 보며 짙게 웃었다.
“마린다. 아, 지금은 린다라고 부를까요?”
세르기도 처음에는 이 엄청난 우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주 전, 갑자기 나타나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차지한 금발의 애첩이 몇 년 전 자신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일 줄은 몰랐으니까.
만약 마린다가 다프네를 따라 북부로 내려갔던 시녀가 아니었다면 세르기가 그녀를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르기가 마린다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기억과는 다른 머리색 때문이다. 밝은 갈색에 불과하던 머리는 생각보다 금발에 더 가까웠다.
“고작 그런 과거로 제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는다면 쪽지 하나에 이렇게 헐레벌떡 오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세르기 님께서 말씀하셔도 페하는 제 말을 들어주실 거니까요.”
“윈터 공작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나요.”
세르기의 물음에 마린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으나 세르기가 그것을 놓쳤을 리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핑계로 절 부르신 건가요? 지금 그렇게 여유로우실 때가 아닐 텐데요. 폐하께서 매일 저를 찾으시니 장자 다음 대의 황제가 될 아이를 잉태하는 것도 시간문제예요.”
황태자가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마린다의 말은 거침없었다. 마린다는 마치 아이를 잉태한 듯 자신의 배를 쓸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세르기는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코지 같은 건 할 생각 없답니다.”
세르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확인할 게 있을 뿐이니까요.”
밝은 갈색 눈에 붉은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본 그는 마린다가 피할 틈도 없이 손을 뻗어 머리를 붙잡았다.
세르기와 마린다의 눈이 동시에 붉게 물들었다.
잠시 후 둘의 눈을 밝혔던 붉은 빛이 꺼지고, 세르기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마린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면 5년간의 기억은 멀쩡했다. 주술까지 잘 먹혀 에드먼에게 광적인 사랑을 느끼는 것까지.
그러나 단 하나.
무언가를 발견한 세르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안 통해?”
에드먼에게 주술이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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