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크윽.”
데미안은 짧게 신음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곧바로 마물의 손이 그 위를 휙, 지나쳤다.
데미안은 허리를 펼 새도 없이 몸을 굴려 검을 들어 다른 마물의 공격을 흘려 보냈다.
처음에는 공격을 정면으로 막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공격을 피해 체력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고 있다.
뒤로 물러나 시간을 번 데미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 숲의 입구에 있던 데미안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셋과 마물 세 마리가 나타난 것은 한순간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아무리 체력을 낭비하지 않았더라도 장기전으로 이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기에 데미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물 세 마리면 결단코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평소라면, 끝이 보였을 테다.
끼에엑!
데미안의 검에 긴 상흔을 입은 마물이 고통에 젖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꼬았다.
‘뭔가… 이상해.’
뭔가 이상하다.
마물들을 베어도 베어도 끝나지 않는다. 마치 재생하는 것처럼.
‘그럴 리가.’
몸이 지치자 마음도 약해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황당한 생각이 들 일이 없었다. 데미안은 검을 고쳐 쥐며 문득 제 신세가 참으로 우습다고 느꼈다.
친모라는 단어에 눈이 멀어 한 걸음 뒤에서 보면 뻔한 함정에 불과한 것에 스스로 발을 들이민 꼴이다.
“쿨럭!”
그때, 손을 뻗은 채 서 있던 의문의 사람 중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마물 하나가 갑자기 픽, 쓰러졌다.
데미안과 가장 멀리 떨어진 마물이었다.
남은 둘은 동료가 쓰러졌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이 쓰러진 이에게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마물 하나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쓰러진 이에게 다가간 이가 손을 바쁘게 움직이자 곧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힘을 흡수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마물이 달려들었다.
“큭.”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데미안은 거친 숨을 헐떡였다.
“데미안!”
익숙한 목소리였다.
알렉과 에드먼 그리고 다프네.
로브를 쓴 이들은 에드먼을 발견하자 크게 동요하더니 서로 급하게 말을 나눴다.
그리고 몇 초 뒤, 두 마리의 마물 모두 에드먼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알렉에게 다프네를 맡긴 에드먼은 말에서 내리면서 검을 뽑았다.
쉴 틈 없이 쏟아지던 마물의 공격에서 겨우 벗어난 데미안은 돌부리에 찢긴 팔을 움켜잡은 채 에드먼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저 로브를 쓴 이들을 공격하십시오!”
에드먼은 풀 사이에 숨어 있는 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가 싶었을 때 에드먼은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손을 허둥지둥 움직였고, 괴로운 듯 한 명은 코피를 흘려 댔다. 그러자 마물이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에드먼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물을 만나 본 데미안도 처음 보는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끼에에엑!
그러나 옅은 오러를 두른 에드먼의 검에 팔 하나씩 잘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각하! 그들을 살려 두셔야 합니다!”
알렉은 에드먼이 검을 치켜들자 서둘러 덧붙였다.
멈칫하던 에드먼은 마치 마물에게 그랬던 것처럼 로브를 쓴 이들의 팔을 하나씩 잘랐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
“-!-!”
그들은 한순간에 사라진 자신들의 팔을 움켜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혀와 이가 없습니다.”
위험 요소가 사라지자 다프네와 함께 뒤에 있던 알렉이 다가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을 확인했다.
하관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푹 눌러쓴 로브를 벗기자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가 보였다. 아이처럼 왜소하고 깡마른 몸을 보니 살수는 아니다.
혀와 이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특이한 점은 하나 더 발견되었다.
“손가락이 잘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에는 피가 스며 있었다.
“자른 지 얼마 안 되었고 생포되었을 시 비밀을 누설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 같습니다.”
“심문한다면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겠지.”
알렉은 발버둥 치는 이들을 포박했다.
그사이 데미안이 다가왔다.
“아버지.”
“다친 곳은?”
“없습니다.”
이리저리 구른 탓에 까지고 베인 곳은 많지만 큰 상처를 입은 곳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북부도 아니고 수도 한복판, 그것도 황실의 숲에서 마물이 나타났다. 무려 세 마리나.
“…근데 어머니는 왜 오신 겁니까?”
“아, 나는….”
다프네는 입술을 달싹였다.
“각하.”
“닉?”
닉이 나타났다.
닉을 본 다프네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마력석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대신 더는 마기가 퍼지지 않도록 막는 약을 구해 왔습니다.”
닉이 내민 것은 붉은 물약이었다. 세르기가 주었던 것이다.
“안 돼요!”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오라버니와 저자가 함께 있었어요. 저 물약이 바로 폭주하게 하는 물약이에요.”
“닉, 다프네의 말이 맞는가?”
“아닙니다, 각하.”
닉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어찌 각하께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마님께서는 황녀를 독살하시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프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황녀를 독살하려 했다고?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에드먼을 돌아보았다. 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었다.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일은 사냥 대회에 나오지 마세요.”
그가 저 말을 들었기에 내게 사냥 대회에 나오지 말라고 했을까?
다프네는 알량한 기대를 했으나 빠르게 접었다.
정말 그랬다면, 에드먼은 엘리자벳에게 잡은 사냥감을 다 준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님. 발뺌하려 하지 마십시오. 마님의 짐 가방에서 이 독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무슨…. 아니에요, 에드먼. 난 그런 적 없어요.”
혼란스럽다.
다프네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병을 꺼내 든 닉을 보며 혼란에 젖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혼란스러움보다도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프네는 해명을 하기 위해 데미안에게 멀어져 에드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 나 정말 아니에요.”
다프네는 손을 뻗었다.
에드먼의 소매에 닿으려는 순간.
알렉이 포박하고 있던 이 중 한 명이 움직이는 동시에 닉이 물약의 마개를 열어 데미안에게 뿌렸다.
“흣!”
방심하고 있던 터라 바로 피하지 못한 데미안은 그대로 물약을 뒤집어썼다.
“이게 무슨….”
데미안은 말을 멈췄다.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데미안의 고개가 푹 꺾이고 몸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알렉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 느낌을 잘 알았다.
“…폭주?”
멍한 알렉의 음성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에드먼이었다.
그러나 닉이 데미안의 어깨를 밀어 검은 숲으로 밀어 넣는 것이 더 빨랐다. 저 뒤는 바로 절벽이다. 징검다리 하나만 달랑 있는 곳이다.
“데미안!”
에드먼은 자신을 빠르게 스쳐 가는 인영에 눈을 깜빡였다. 다프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데미안을 잡았다.
그러나 다프네가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순식간에 다프네 역시 절벽 아래로 이끌려 내려가던 때, 에드먼이 다프네의 팔뚝을 붙잡았다.
에드먼이 땅에 반쯤 엎드린 채 절벽 아래로 떨어진 다프네와, 그녀가 붙잡고 있는 데미안의 무게까지 버티고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펼쳐졌다.
“읏….”
다프네의 옅은 신음에 에드먼이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에게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금방이라도 다프네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
데미안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절벽 주위의 돌을 보며 깨달았다.
데미안 역시 같은 오러를 타고났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오러에 취약한 다프네가 데미안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데미안의 옷을 잡고 있던 다프네의 팔의 떨림이 고스란히 움직였다.
에드먼은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눈을 일그러트렸다. 하필이면 오른쪽 어깨다.
이미 신경 직전까지 파고든 마기 때문에 팔은 이미 움직이지 않은 지 오래였음에도 억지로 힘을 주자 고통이 밀려왔다.
“알렉!”
에드먼은 다급히 알렉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살수 여럿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습니까.”
“오, 오래 버티지 못해요.”
다프네의 턱이 파르르 떨려 온다.
데미안에게서 검은 아지랑이와 함께 열기가 점점 솟아오르고 있다.
다프네는 고개를 돌려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그때 에드먼의 품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 흰색으로 빛나는 마력석이 보였다. 신성력이다.
죽을 때까지 폭주가 멈추지 않는다.
다프네는 멍하니 마력석을 바라보며 세르기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축 처진 데미안을 보았다.
내리는 비에 다프네의 몸이 점점 미끄러졌다.
그것을 깨달은 다프네는 에드먼을 올려다보았다.
“…에드먼.”
에드먼은 숨을 헐떡였다.
“비가 그치지 않아요.”
회색 먹구름이 낀 하늘은 좀처럼 변함이 없었다. 더 세찬 비가 쏟아졌다.
“놔줘요.”
“안 됩니다.”
“셋 다 죽을 셈이에요?”
에드먼의 몸은 낭떠러지 끝에 겨우 걸쳐져 있었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자각했다.
다프네는 귀를 때리는 빗소리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쇳소리에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 순간, 에드먼은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반쯤 틀어 검집으로 검을 막았다.
주룩, 다프네가 한 번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손아귀에 힘을 더 실은 에드먼이 살수가 주춤하는 사이, 곧바로 검을 움직였다. 그러나 자세 때문인지 정확히 급소를 노렸음에도 한 번에 죽지 않고 또다시 달려들었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살수로 인해 에드먼의 체력은 더 빠르게 고갈됐다.
그리고 살수를 다 처리하기도 전에 수십의 살수들이 더 나타났다. 상황을 직감한 다프네가 에드먼을 불렀다.
“에드먼.”
“…물소리가 들립니다. 비가 내린 지 꽤 되었고 양이 많으니 분명 아래는 물이 흐르고 있을 겁니다.”
다프네가 에드먼의 품 안에서 떨어지려는 마력석을 움켜쥐는 동시에 수십 명의 살수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다프네는 에드먼이 쥐고 있는 팔을 아주 조금 비틀었다. 빗물에 이미 미끄러워져 있던 탓에 다프네는 손쉽게 에드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서로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 작은 접촉에 둘의 몸으로 짜릿함이 퍼져 나갔다.
“살아, 반드시 찾을 테니.”
다프네와 데미안은 그렇게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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