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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48화 (48/145)

48화

“황녀님과 공작님이 처음 들어오실 때 정말 눈이 부셨답니다. 마치… 원래의 짝이 서로를 찾아간 것처럼요.”

‘이게 무슨…’

문득 어제 들었던 말이 떠오른 동시에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다프네를 보았다.

다프네는 그 모습을 그저 눈에 담고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손에 힘을 주고 있지도,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깨물고 있지도 않은 채로 그들이 황제의 앞으로 올 때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황제의 목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데미안은 번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먹먹함이 사라지고 나서야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이만.”

에드먼은 엘리자벳과 다정하게 끼고 있던 팔을 뒤로 뺐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손을 뻗어 그 팔을 잡았다.

“공작, 약조대로 해 주시는 거지요?”

“황녀, 공작과 무슨 약조를 하였는가?”

“아버지도 참.”

황제의 물음에 엘리자벳은 부끄러운 듯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볼에 사랑스러운 홍조가 올라오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공작이 오늘 잡은 모든 동물을 내게 주겠다 약조하였습니다.”

주변에서 놀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공작, 그것이 정말인가?”

황제의 물음이 에드먼에게로 향하자 사람들의 시선 역시 그에게로 향했다.

에드먼은 엘리자벳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프네와 데미안에게는 그저 에드먼의 너른 등만 보일 뿐이었다.

“…맞습니다.”

허리를 숙여 엘리자벳에게 무어라 속삭인 에드먼이 자리에 돌아와 앉는 순간까지, 데미안은 눈을 떼지 않았다.

데미안은 당장이라도 에드먼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가운데 다프네가 앉아 있는 탓에 몸을 들썩거릴 뿐이었다. 결국, 만찬이 끝나고 열린 연회 때 에드먼에게 가까이 가고 난 후에야 데미안은 물을 수 있었다.

“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속삭이듯 읊조렸다.

“나중에 다 설명하마.”

“지금 해 주십시오. 왜….”

데미안은 자신의 언성이 높아지려는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입을 꾹 다물었다.

“왜 황녀님과 같은 옷을 입으신 것이며, 약조는 또 무엇입니까.”

에드먼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얄팍한 숨을 하, 터트렸다.

황녀가 에드먼의 옷에 맞춰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칼리토.”

약조에 대해 부정하려던 찰나, 어깨 너머에 있을 다프네를 바라보며 황태자의 이름을 들먹일 줄은 더욱더 생각지 못했고.

“아버지.”

정말로 에드먼이 다프네와 이혼하고 엘리자벳과 재혼할 것인가 의문이 들은 데미안은 조급하게 그를 불렀다.

“정말로….”

황제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사냥 대회가 시작하기 전,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5년 전 블레드 가문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일을 기억하겠지.”

5년 전, 역모에 가담한 죄가 밝혀지면서 사교계가 한바탕 시끄러워졌던 그 사건이었다.

“그 주범인 블레드 후작은 아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며칠 전 평온 속에 신의 곁으로 갔다.”

삽시간 주위가 술렁거렸다. 블레드 후작이 죽었다.

구석에 있던 다프네는 황제의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그리고 어젯밤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그 결과 무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고한 몸으로 감옥에 갇혀 아비의 죄를 대신 씻던 세르기 블레드를.”

쿵쿵.

불안감에 심장이 뛴다.

다프네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도 잊은 채 홀린 듯 소란스러워지는 입구 쪽을 보았다.

푸른빛의 머리카락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다프네는 저를 스쳐 가며 그가 남긴 흐릿한 미소의 자취를 더듬으며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세르기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재상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블레드 후작의 직위를 내리는 바이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축하하오, 블레드 후작!”

베벨록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함성과 박수, 축하하는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간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 티가 나듯 부드럽던 세르기의 인상은 살이 좀 빠지면서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다정하고 유약해 보이는 미소는 변함없었다.

“축하해 주어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건네는 말에 모조리 답하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다프네는 잔뜩 굳은 채 그저 다가오는 세르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 발짝. 한 발짝.

“다프네.”

마침내 세르기는 다프네의 앞에 다다랐다.

그는 다프네의 어깨가 움찔거리자 손을 뻗어 꽉,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 누이.”

“보고 싶을 거야, 누이.”

헤어지기 전 그가 속삭인 말과 똑같다.

다프네는 지금 당장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창백한 얼굴로 간신히 숨만 헐떡였다.

“그사이 결혼했다 들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는 마치 정말 5년 만에 본 것처럼 다프네를 대했다.

불과 몇 달 전, 수도로 올라왔을 때 다프네를 납치해 사흘 동안 지하에 가뒀던 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다프네의 어깨를 붙잡은 세르기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녀는 이미 상처가 다 나았을 텐데도 욱신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라버니.”

다프네는 겨우 말을 내뱉었다.

세르기의 눈꼬리가 접혔다.

“그래. 곧 사냥 대회가 시작할 것 같구나.”

다프네는 세르기가 사냥복 차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음,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당연히 많다.

다프네를 납치했으면서 왜 데미안의 성년을 축하하는 연회 날 그녀를 풀어 준 것인지.

어떻게 다시 나타난 것이지. 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뿌우우우!

사냥 대회를 알리는 커다란 나팔 소리와 동시에 세르기가 입술을 달싹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깜빡였고, 그 짧은 사이 세르기의 눈에 붉은 기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다프네는 그대로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세르기가 한 말을 다시금 더듬을 뿐이었다.

‘…한 시진 후.’

덫이다.

다프네 또한 머리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정확히 한 시진 후 숲으로 향했다.

마치 훈련을 잘 받은 개처럼.

***

“예?”

벤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혼자 가시겠다고요?”

“그게 조건이라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냥 대회가 시작되고 한 시진이 지났을 무렵, 데미안은 대뜸 혼자 가겠다 말했다.

충동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는 애당초 혼자 오라고 적힌 쪽지를 보고, 벤트가 알아서 잘 숨어 있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혼자 갈 생각이었다.

“알렉 경이라도 같이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이 정보가 확실한지도 모르는데 소공작님을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웬만한 살수들이 와도 나한텐 소용없어. 게다가 그곳은 사냥 대회가 열리는 곳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큰 소란을 만들지 않겠지.”

“잘 알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냥 대회가 열리는 곳의 딱 경계선입니다. 아슬아슬하다고요.”

벤트의 잔소리는 이어졌다.

“게다가 사람들이 검은 숲의 근처에는 일부러라도 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호위 하나 없이는 안 됩니다. 위험해요.”

종자가 데미안의 말을 이끌고 나타났다.

데미안은 말 위에 오르며 벤트를 향해 말했다.

“신호탄을 챙겼다. 됐지?”

“…한 시진 안에 돌아오셔야 합니다.”

데미안은 벤트의 말을 못 들은 척 말의 고삐를 휙 틀었다.

벤트는 사라지는 데미안과 종자의 모습을 보며 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데미안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하려는 데미안이 충분히 이해 간다.

무려 몇 년 만에 겨우 찾게 된 흔적인데.

그나마 신호탄을 가져가서 다행이다.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이 맑은 하늘에서 신호탄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벤트가 돌아선 그때.

툭.

마른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알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각하?”

“…왜?”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먼은 다시금 되물었다.

얼마나 깊은 상념이었던 것인지 바로 옆에서 알렉이 한 말조차 듣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비가 올 듯싶습니다.”

알렉의 말에 에드먼은 그제야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사냥 대회가 시작한 지 한 시진 정도가 흘렀다.

“적당히 하다 돌아가지.”

‘적당히….’

알렉은 말의 안장과 줄줄이 이어진 동물들의 사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에드먼은 시작하자마자 학살과도 같은 사냥을 시작했다. 그마저도 수가 너무 많아 목만 몇 개 잘라 온 것이 저렇게 쌓였다.

동물의 인기척을 들은 에드먼은 말에서 내렸다. 알렉이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사이 에드먼은 곰의 커다란 머리를 베어 나왔다.

그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진 것을 본 알렉이 곰의 머리를 받았다.

“각하. 무리하시지 마십쇼. 충분히 잡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닉이 마력석을 구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신성력이 담긴 마력석 유통이 뚝 끊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전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마력석 공급을 미루고 있었다.

그 탓에 본래도 구하기 힘들었던 마력석은 구경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희소가치가 높아졌다.

문제는 에드먼의 부상이었다.

“어느 정도 잠식되셨습니까?”

“손바닥 정도.”

알렉은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늦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늦는다면 마기가 신경까지 잠식해 팔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에드먼은 그런 상황에서 멀쩡한 것을 연기하기 위해 직접 사냥을 하는 중인 것이다.

사람이 없을 땐 자신이 해도 되겠지만 에드먼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 말할 뿐이었다.

“그런데 네가 오면 다프네의 파트너는 누가 맡게 된 거지?”

알렉에게 다프네의 파트너 역을 지시한 이는 다름 아닌 에드먼이었다.

“그야….”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가던 알렉의 말이 뚝 끊겼다.

명대로 마님의 파트너로 만찬에 참가하였고, 작게 열린 연회 때 누군가 불러 마님과 떨어졌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 사냥 대회가 시작하는 바람에 그대로 에드먼과 숲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말의 걸음도 멈추면서 둘은 완전히 우뚝 섰다.

“…다프네에게 크리스를 감시로 붙였으니 신경 안 써도 된다.”

“죄송합니다.”

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마님이 황녀를 독살하려는 게 사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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