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제국을 밝힐 빛을 뵙습니다.”
“자넬 여기서 만나다니.”
허리를 숙였던 다프네와 데미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아, 공작 부인. 정말 오랜만이군.”
“…예.”
싱글벙글 웃는 칼리토는 경계심 가득한 다프네의 표정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때, 칼리토가 아무런 예고 없이 다프네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그늘이 졌고, 다프네의 몸이 얼어붙은 사이 칼리토가 고개를 숙였다.
다프네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 그때, 그 사이를 데미안이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진정하게.”
칼리토는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공작 부인의 어깨에 나뭇잎이 떨어져서 말이야.”
그것을 증명하듯 칼리토는 나뭇잎을 흔들다가 툭, 떨어트렸다.
“…아버지가 부르셔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게.”
데미안은 다프네의 손목을 그러쥐고 몸을 휙 돌렸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칼리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무런 나무도 없는 주변 탓에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
“마님, 찬물 가져왔어요.”
안나는 찬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침구 정리도 아까 끝냈기에 오늘 안나가 할 일은 여기서 끝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나가는 대신 머뭇거렸다.
“저, 마님.”
안나는 책을 읽고 있는 다프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솔직히 수도에 올라와도 고향은 좀 먼 편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이게 첫 번째 감사 인사가 아니었다.
안나는 고향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돌아온 후부터 틈만 나면 감사 인사를 했다.
“혹시 제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건 아니죠?”
“…그럼. 계속 이곳에만 있었는걸.”
다프네는 한 박자 늦은 자신의 대답을 안나가 알아차리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제 그만 가 봐. 오늘따라 졸리네.”
“아, 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마님.”
안나가 사라지고 나자 다프네는 움직였다.
“읏….”
숄을 걷자 화상을 입은 곳과 스치면서 저도 모르게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프네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안나가 가져온 찬물을 붉은 팔뚝 위에 끼얹었다. 후끈거리던 열기가 가시자 다프네는 곧바로 헝겊을 이용해 팔뚝을 싸맸다.
칼리토에게서 벗어나 데미안과 돌아오던 도중, 벤트를 만난 데미안이 급하게 돌아가고 다프네는 천막으로 향했다.
다행히 안나가 돌아오기 전인 데다가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 안나는 다프네가 혼자 옷을 갈아입는다고 할 때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고통을 참느라 입술은 새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로 향하려던 때 인기척이 들렸다.
다프네의 어깨가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의 입구가 열리고 누군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에드먼?”
갑작스러운 에드먼의 등장에 다프네가 눈을 깜빡였다.
“내일은 사냥 대회에 나오지 마세요.”
앞뒤를 모두 잘라먹은 그의 말에 다프네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도 잠시, 다프네는 그가 나오지 말라는 이유를 눈치챘다.
사냥 대회 마지막 날에는 자신이 그동안 잡은 동물을 단 한 명의 레이디에게 전달한다. 에드먼은 그것을 다프네가 아니라, 황녀에게 줄 생각인 것이다.
그래도 내가 부인이라고 미리 말을 해 주는 것일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다프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안 돼요.”
“…….”
에드먼의 초조한 얼굴이 굳어졌다.
“황태자 저하께서 절 초대하셨어요.”
낮에 만난 칼리토가 귓가에 속삭인 말이 맴돌았다.
“내일 사냥 대회는 참여하도록 해. 부인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황태자 저하가 말입니까?”
“네, 그 장소에 데미안도 있었으니 내 말이 믿기 힘들다면 물어보세요.”
다프네는 최대한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다프네는 에드먼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진 몰라도 난 내일 참여해야 해요.”
다프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에드먼을 보며 말했다.
“나가 줘요.”
에드먼이 돌아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프네는 그저 침대에 몸을 뉘고 제 등 너머에 있을 에드먼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가 가물가물해지던 찰나, 천막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프네가 침대에 누운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
ㅎㅂㄹㄱ.공금
“날씨가 안 좋네요.”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안나는 비에 젖은 옷을 툭툭, 털어 냈다.
“사냥 대회가 취소될 정도니?”
다프네는 안나의 팔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왠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모습에 안나는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고개를 내저었다.
“어,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곧 그칠 비 같아요.”
“그래, 그렇구나….”
다프네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안나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안나는 짐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 가방 말씀하시는 거 맞죠?”
짐 정리를 하던 도중 짐이 섞이는 바람에 다프네의 옷이 든 가방을 마차에 두고 내렸다.
다프네는 안나가 마차에서 찾아온 가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팔뚝이 가려지는 옷을 찾아 줄래?”
잠깐 쏟아지는 비에 날씨가 쌀쌀해졌다고 해도 수도의 날씨는 늘 봄처럼 화창하고 따스하다.
이 때문에 추위를 많이 타지 않는 이상 팔뚝까지 가려진 옷을 입지 않지만, 다프네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 드러난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수도의 날씨를 고려해 대부분의 드레스는 소매가 짧았기에 긴 소매를 택하자 선택지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걸로 하자.”
다프네가 고른 흰색에 가까운 베이지색 드레스는 주름진 것을 빼면 아무런 프릴도, 보석도 없었기에 단출했다.
너무 격식에 맞지 않는 드레스라고 하기에는 주름이 많이 져 있는 게 포인트가 되어 괜찮은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드레스였다.
“마님. 그래도 이 드레스가 더 낫지 않을까요?”
안나가 내민 것은 그 옆에 있는 드레스였다.
똑같이 프릴도, 보석도 없으나 녹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마님의 눈동자하고도 흡사하여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됐어. 이걸로 할게.”
다프네의 뜻을 꺾지 못한 안나는 결국 베이지색 드레스만 남긴 채 짐을 정리했다.
그사이 다프네는 몸을 돌려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안나는 다프네의 팔뚝에 새로 생긴 붕대 대신 짐 가방에서 굴러떨어진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몇 바퀴 구른 탓인지 허름한 나무 상자의 뚜껑은 열려 있었기에 안나는 뜻하지 않게 내용물을 확인하고 말았다.
“이건….”
아름답다.
안나는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보석에 온 신경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마치 말로만 듣던 바다가 떠올랐다.
푸른빛의 바다는 따사로운 햇볕 아래 오색의 색깔로 빛이 난다고 들었다.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만약 바다를 그대로 옮겨 담아 보석을 만든다면 이것일 것이다.
“안나?”
안나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자 다프네가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안나는 그 장신구를 빼내어 다프네에게 가져갔다.
“마님! 이 머리 장식을 하시는 건 어때요?”
안나가 내민 것을 본 다프네의 표정이 삽시간 굳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지금 마님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너무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딱 적당했다.
“이거 어디서 발견했니?”
“네? 짐 가방에 있었어요.”
다프네가 굳어 있는 사이, 안나는 장신구를 다프네의 머리에 꽂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탁!
“마, 마님?”
안나는 화끈한 제 손을 부여잡고는 당황한 채 다프네를 보았다.
그러나 마치 봐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다프네의 얼굴을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님.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그때, 천막 밖에서 알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다프네의 파트너를 맞게 된 이는 다름 아닌 알렉이었다.
“…나가요.”
다프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땅에 떨어진 장신구를 들고 천막을 나섰다.
안나는 사라지는 다프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씩 내리던 비는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그리고 사냥 대회가 시작하기 전 구름 사이로 해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이네요.”
벤트는 쨍쨍한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대로 사냥 대회가 취소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말입니다.”
데미안은 크라바트를 알맞게 조이며 벤트에게 물었다.
“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어제 벤트가 가져온 소식은 데미안을 다시금 초조하게 만들었다.
바로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적힌 쪽지였기 때문이다.
위치는 전과 똑같이 검은 숲의 입구. 시간은 사냥 대회가 시작하고 한 시진 후.
이제 정말 마주하게 될 진실이 코앞에 있다는 게 실감 났다.
“각하, 소벨 영애가 몸이 좋지 않아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합니다.”
약속한 시각이 되어도 파트너가 나타나지 않자 보낸 수하가 한 말에 데미안이 미간을 좁혔다.
자연스레 파트너가 없는 다프네가 떠올랐다.
“아, 마님의 파트너는 알렉 경이 맡으셨답니다. 하기야, 두 번 연속 파트너가 없는 건 좀 그렇죠.”
“…….”
“소공작님?”
벤트는 몸을 사냥 대회가 열리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튼 상태로 멈춘 데미안을 불렀다.
“…입 좀 다물어.”
“예?”
벤트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데미안을 모습을 보며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둘은 아무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춘 채 옥신각신하면서 사냥 대회가 열리는 곳에 도착하였다. 마지막 날인지라 사람들은 모두 준비된 장소에 나와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었다.
데미안의 시선은 황족의 자리 바로 옆에 위치한 세 개의 자리로 향했다.
다프네는 그곳에 있었다.
뒤에는 알렉이 서 있었고 다프네는 그저 가만히 앉은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숨을 고른 데미안은 다프네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프네는 그런 데미안을 흘끔, 보았다.
“…왔구나.”
“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데미안은 오직 정면을 보았고, 다프네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내 정해진 자리에 앉았고, 황제와 황태자가 나타났다.
오늘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황제는 연미복 대신 사냥복 차림이었고, 그 탓에 마른 골격이 도드라졌다.
모두가 일어나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빛을 뵙습니다.”
“모두들 앉게.”
줄줄이 이어지는 황제의 연설을 끝으로 사냥 대회 전, 가벼운 만찬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러움이 갑자기 뚝 멎었다.
“어머.”
“세상에나.”
“맞추신 모양이에요.”
나타난 이들은 다름 아닌 에드먼과 엘리자벳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짙은 푸른색의 연미복을 입은 에드먼과 그에 맞춰진 옷처럼 같은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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