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뿌우우우.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님. 오늘도 나가시지 않으려고요?”
“마지막 날만 참가해도 문제없어.”
“그래도요…”
안나는 말을 길게 늘어트렸다.
이내 다프네는 안나가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 알았기에,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난 괜찮으니까 다녀오렴.”
“네?”
“아까 밖에서 만난 사람, 친구잖아.”
안나가 황궁의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고향 친구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으나 다프네의 수발을 들 하녀는 자신이 유일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다프네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하지만….”
“어차피 난 계속 여기 있을 건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니.”
계속되는 설득에 안나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저, 그럼 금방 돌아올게요.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만….”
“저녁이 되기 전에만 들어오렴. 검은 숲에는 들어가지 말고.”
검은 숲.
천족과 마족, 인간이 마지막 대전쟁을 벌인 장소로 기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초대 황제는 이 숲을 다스릴 힘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황제의 힘이 약해지고 검은 숲의 기운만 거세지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안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환하게 웃으며 밖으로 향했다.
다프네는 펄럭거리는 치맛자락을 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집중이 되지 않는 건 여전했다.
다프네는 책갈피를 걸어 놓은 페이지를 펼쳤다. 세르기가 보낸 쪽지가 접힌 채 꽂혀 있었다.
다프네가 아는 세르기라면, 다프네가 밟을 덫을 깔아 놓고 스스로 찾아오게 할 것이다. 다프네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천막 안에만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첫날은 아무런 소란도 없이 지나갔으니 필시 오늘이나 내일이다. 하필이면 데미안과 에드먼이 차례대로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날.
“하….”
노린 것이 분명하다.
분명 일부러 노린 것이다.
다프네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긴장감으로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다.
차가운 손을 꾹꾹 누르던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다프네는 굳은 얼굴로 입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고른 데다 찾아올 사람도 없다.
다프네가 마른침을 삼긴 그때, 입구가 휙 열렸다.
“아, 부인. 계셨군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다프네는 눈을 깜빡였다.
“…소벨 후작 부인?”
스쳐 가듯 본 게 전부인 소벨 후작 부인의 등장이었다.
소벨 후작 부인은 성큼성큼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 혼자 계셨나요?”
“…그렇네만.”
“마침 저희 모임에 부인 한 분이 빠지게 돼서요. 딱 마님이 생각났답니다. 음….”
소벨 후작 부인은 한 걸음 물러나 다프네를 위아래로 훑었다.
“일단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안 되니 어쩔 수 없군요. 자, 어서 가요.”
“잠시, 후작 부인.”
소벨 후작 부인은 곧바로 다프네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프네는 끙끙거렸으나 저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소벨 후작 부인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한참을 끌려가던 다프네는 소벨 후작 부인이 멈춘 후에야 손목의 자유를 되찾았다.
“아, 데려왔네요. 수고 많았어요. 후작 부인.”
“수고는요. 황녀님의 부탁이신데요.”
그리고 그 앞에는 엘리자벳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다프네의 앞에 있었다.
마치 먹이를 물어뜯기 위해 눈을 번뜩이는 하이에나처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어쩌긴요. 다행히 그것이 난동을 부리기 전, 황녀님과 제가 딱 도착했죠.”
다프네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그저 빤히 내려다보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수도의 유행은 모두 이 여인들에게서 시작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교계를 꽉 휘어잡고 있는 이들은 화려하게 치장한 채 담소를 나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프네를 투명 인간보다 못한 취급을 하면서.
다프네는 유난히도 더디게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석에 앉은 엘리자벳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옆에 앉은 영애를 향해 눈짓했다. 눈치 빠른 영애는 다프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공작 부인, 부인이 생각하기엔 어떠세요?”
건조한 눈동자가 들어 올려졌다.
이들이 한창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엘리자벳을 위해 제작된 드레스를 어느 한미한 가문의 영애가 탐을 냈다. 떠오르는 신흥 산업으로 한순간 벼락부자가 된 가문의 영애는 기고만장해진 상태였고, 감히 황녀의 드레스를 탐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다.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는 엘리자벳과 함께 그 현장에 있던 그레이스 영애다.
마셀 남작가의 막내딸인 그레이스는 엘리자벳의 측근 시녀 역할을 자처하며 그녀가 잠시 나눠 주는 권력을 휘두르는, 황녀의 꼭두각시였다.
그레이스는 다시금 물었다.
“황녀님께서 그 어린 영애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셨을까요?”
“…글쎄요.”
“손이 잘렸답니다.”
엘리자벳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 것에 손을 댔거든요, 감히.”
엘리자벳의 시선의 다프네의 손으로 향했다.
제 것.
다프네는 엘리자벳이 말하는 자신의 것이 결단코 드레스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다.
“당연한 거죠. 주제도 모르고 황녀님의 것을 탐했으니 그 정도 형벌이면 약해요.”
“맞아요. 저라면 그 눈도 파냈을 거예요.”
“그럼요. 정말이지 주제도 모르고 덤볐다가 큰코다친 거죠.”
그레이스는 엘리자벳이 너무 착하다며 덧붙였다.
그 말에 엘리자벳은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그레이스. 그때를 생각하면 확실히 불쾌하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본보기가 됐을 테니까요. 이를테면 평소 제 것을 탐할 생각이었거나….”
다프네와 엘리자벳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탐하고 있는 자에게.”
다프네는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다프네에게서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다프네를 빤히 쳐다보는 엘리자벳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그레이스는 다프네의 곁에 있는 영애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머!”
다프네가 들고 있던 찻잔이 쏟아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다프네는 화끈거리는 고통에 팔뚝을 부여잡았다. 하필이면 다 낫지 않은 상처 바로 아래였다.
다프네의 어깨를 일부러 친 영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 부인, 조심하셔야죠. 안 다치셨죠?”
“…네.”
다프네는 팔뚝에서 손을 뗐다. 찻물이 아주 뜨겁지는 않았지만 식지도 않은 상태인지라 경미한 화상을 입은 것 같다.
부디 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번에 아슬랑 부인께서 임신하셨대요.”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셨죠?”
“네. 금슬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 저도 요즘 아이 걱정이 많아요.”
이 모임에서 결혼을 일찍 한 편에 속한 귀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혼 2년 차가 되어 가는데 아이가 없으니….”
“부인.”
옆에 있던 영애가 말리는 척 말을 가로막자 화들짝 놀라며 다프네를 향해 몸을 돌린 채 입을 틀어막았다.
다프네가 그들의 괴롭힘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화제를 돌렸다. 이따금 사교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윈터 공작 부부의 들리지 않는 아이 소식에 대해.
“어머, 부인.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결혼하신 지 5년이 넘어가는 부인 앞에서 그만….”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부인께서는 이해해 주실 거에요. 부부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잖아요?”
줄곧 아래로 향해 있던 다프네의 시선은 변함이 없었다.
다프네는 찻물에 홀딱 젖은 앞섶과 팔뚝을 보았다. 팔뚝은 여전히 화끈거렸으며 불어오는 바람 탓에 열이 식으면서 몸이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죠, 부인?”
엘리자벳은 커다란 눈방울을 깜빡이며 다프네를 살폈다.
속이 울렁거린다. 다프네는 침을 삼킨 후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
엘리자벳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부인은 참 친절하세요. 약혼자조차 없는 황녀님께 흔쾌히 공작님을 파트너로 넘겨주시고.”
그레이스의 화제 전환은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은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어 댔다.
다프네 역시 며칠 전의 화려한 연회를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황녀와 아름다운 제국의 영웅.
그 누구도 이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것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다프네 또한.
“황녀님과 공작님이 처음 들어오실 때 정말 눈이 부셨답니다. 마치… 원래의 짝이 서로를 찾아간 것처럼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프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때였다.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가 당황했다. 그건 다프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미안.”
이제 막 사냥 대회를 끝내고 돌아온 것인지 옷조차 갈아입지 않은 데미안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들은 듯한 데미안의 시선은 줄곧 그레이스로 향해 있었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입가가 사늘해진 데미안은 에드먼을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싸늘해진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엘리자벳이 나섰다.
“소공작, 이건 여인들의 문제랍니다.”
데미안의 매서운 시선이 엘리자벳으로 옮겨 갔다.
‘저 건방진 놈.’
엘리자벳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속으로 데미안을 헐뜯었다.
어차피 공작과 결혼 후 아들을 낳게 될 텐데 저것이 문제다. 추후 내 아이의 앞을 가로막을 돌멩이가 너무나도 거슬렸다.
“…어머니의 몸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데미안은 곧바로 다프네의 팔을 그러쥐고 걸음을 옮겼다.
붙잡은 힘의 악력과 빠른 걸음에 못 이긴 다프네는 어쩔 수 없이 데미안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러나 데미안에게 잡힌 부분이 하필이면 찻물에 데인 팔뚝이었다.
다프네가 무어라 더 말하기 직전, 데미안이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왜 듣고만 계셨습니까.”
“…….”
“아니면 정말로 아버지가 어느 여자를 만나든 신경 쓰지 않는 겁니까?”
“…그래.”
하, 터져 나오는 한숨과 함께 데미안은 붙잡고 있던 다프네의 손을 떨궜다.
데미안은 문득 에드먼의 집무실에서 발견했던 종이를 떠올렸다. 계약서의 일부분 같던 종이가 나타내는 것은 명백했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물어볼 참이었다. 정말 아버지와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에 불과한 것이냐고.
“소공작?”
그러나 누군가가 나타난 탓에 달싹거리던 데미안의 입술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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