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소공작님.”
“알렉.”
알렉의 등장에 데미안은 낮고 빠르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황제와 거래를 하셨습니다. 황녀를 파트너로 맞는 대신 신관을 북부로 파견시켜 준다는 내용입니다. 소공작님, 그런데 마님은….”
“공작님! 소공작이 여기 있네요.”
간드러진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곧이어 갈라진 인파 사이로 아름답게 치장한 황녀와 팔짱을 낀 에드먼이 나타났다.
“제국의 작은 빛을 뵙습니다.”
“반갑군요. 고개를 드세요, 소공자.”
데미안이 인사를 마치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황녀에게 몰려들었다.
조금이라도 말을 붙여 보고자 하는 지방의 귀족들이 수두룩했다. 그 덕분에 에드먼과 데미안은 황녀의 곁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
한눈에 봐도 가라앉은 표정의 에드먼은 무표정으로 데미안의 뒤를 훑었다.
“데미안, 다프네는 어디….”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둘의 말이 동시에 시작함과 동시에 동시에 멈췄다.
서로의 주위를 흘끔거리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상황을 파악한 에드먼과 데미안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가고 몸이 움찔거리던 순간이었다.
“세상에,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요?”
“허, 윈터 공작 부인께서 홀로 들어오신 걸 본 거라면 저도 제대로 보고 있습니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다프네가 있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시선을 모조리 받고도 홀로 서 있는 다프네가.
다프네는 따갑게 달라붙는 시선에도 전혀 굴하지 않은 채 에드먼과 데미안에게로 걸어왔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 지금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사냥 대회 때….”
“공작.”
다프네의 말을 끊고 등장한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팔에 손을 휘감았다.
훅, 끼치는 독한 향수 냄새에 다프네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곧 춤을 출 시간이에요. 어서 가요.”
엘리자벳은 뒤늦게 다프네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부인. 파트너가 없으신가요?”
그저 뒤에서 수군거리던 말을 대놓고 내뱉은 황녀의 얼굴은 순진무구했다.
“마침 제 오라버니께서도 파트너가 없다고 들었는데 제가 부탁이라도….”
“황녀님.”
에드먼은 엘리자벳의 손을 잡아끌었다.
때마침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시죠.”
중앙을 향해 말하자 엘리자벳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공작님.”
다프네는 그 둘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차갑고 냉철하지만 아름다운 공작과 꿀 같은 금발과 금안을 가진 사랑스러운 황녀.
혹자의 말대로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다프네는 몸을 돌렸다.
“…….”
그 모습에 손을 들어 올렸던 데미안은 입술을 달싹였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꼭꼭 박혔다.
다프네는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
다프네는 눈을 떴다.
어둡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다프네는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푸르스름한 빛으로 뒤덮인 밤하늘이 다프네의 위로 내려앉았다. 다프네의 시선은 이제 막 들어온 마차로 향해 있었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그 안에서 데미안과 에드먼이 내렸다.
문득 에드먼이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다프네는 커튼을 쳤다. 심장이 미약하게 쿵쿵, 뛰었다.
혹시 들켰나 싶어 다시 커튼을 걷어 봤으나 에드먼은 물론 다른 이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습관적으로 창문을 연 다프네는 차가운 바람이 아닌 시원한 바람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손을 조심스레 뻗은 다프네는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작.”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다정하게 끼던 팔짱. 코끝에서 아른거리는 야릇한 향수 냄새마저 생생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손을 거두고 창문을 닫고 나서야 울렁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끝났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볼품없던 것은 이미 끝났다. 이미 산산조각이 나 버려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이리도 아픈 것인지 다프네는 통 알 수 없었다.
다프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황제의 명이든 뭐든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끝까지 버텨서라도 북부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읏….”
다프네는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았다. 붕대 너머로 희미하게 피가 스며든 것이 보였다.
다프네는 붕대를 풀었다. 상처는 매우 옅어졌지만 붉은 획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만약 그때 창문을 깨 팔을 긋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선대 공작의 무덤을 팠을 때처럼, 그 일을 되풀이할 순 없었다.
‘안 돼…. 그런 일은 절대 안 돼.’
다프네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오싹해진 몸을 쓸었다.
톡, 톡.
한껏 예민해져 있던 다프네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출처는 창밖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창문에 가까이 다가간 다프네가 발견한 것은 편지를 내려놓고 부리로 창문을 두들기는 까마귀였다.
까마귀의 붉은 눈과 마주친 다프네는 급하게 창문을 열어 편지를 뜯었다.
“하….”
끝내 다프네의 입술 사이에서 얄팍한 숨이 터져 나왔다. 다프네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쪽지를 쥔 다프네의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다프네는 곧바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마님, 무슨 일이세요?”
소리를 들은 안나가 들어왔다.
“안나, 내일 사냥 대회에 참가할 준비 해.”
“역시, 참여하실 거죠?!”
안나의 표정이 한순간 밝아졌다.
안나는 갑자기 혼자 저택으로 돌아온 후 내일 사냥 대회 준비를 하지 말라는 다프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뜻대로 준비를 멈췄으나 이런 변심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준비 마저 끝내 놓을게요!”
안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멀어지는 안나의 뒷모습을 보던 다프네는 이내 몸을 돌렸다. 다프네의 손안에는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쪽지가 쥐여 있었다.
사냥 대회 때 보자, 내 사랑스러운 누이.
“…세르기.”
세르기 블레드.
발신자는 다름 아닌 다프네의 오라비였다.
***
“오늘도?”
“예.”
에드먼의 미간이 얼핏 일그러졌다.
본격적인 사냥 대회가 시작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다프네는 첫날, 천막에 들어간 후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다프네의 천막 입구를 응시하는 에드먼의 시선을 발견한 알렉이 물었다.
“제가 마님께 가 볼까요.”
“됐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렉을 막은 에드먼이 몸을 돌렸다.
사냥 대회는 총 3일에 걸쳐 이루어지지만 오늘, 2일 째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첫날은 가문의 기사단 중 선발된 기사가 참여하고, 둘째 날은 가문의 후계자나 공자가, 그리고 마지막은 가주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첫날 참여한 알렉은 황가의 제1 기사단장 역시 참가하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무난한 순위를 차지했다.
“공작.”
“제국을 밝힐 빛을 뵙습니다.”
황태자, 칼리토였다.
“자네가 우리 누이의 파트너라는 걸 들었네.”
칼리토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명백하거늘. 내 그렇게 받아들여도 괜찮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흐음.”
칼리토는 눈을 좁히는 것도 잠시 싱긋 웃으며 에드먼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인지, 칼리토가 건드린 어깨는 오른쪽이었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울컥 새어 나오는 느낌이 들었으나 에드먼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웃는 표정으로 에드먼을 살피던 칼리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오늘은 소공작이 참여하는 날이지?”
“그렇습니다.”
“내가 전해 주지. 행운을 빈다고.”
사라지는 칼리토와 그의 일행을 지그시 바라보던 에드먼의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부상 탓에 외출을 자제하며 천막에서만 지내던 요한이었다. 요한은 창백한 얼굴로 속삭였다.
“닉이 왔습니다.”
에드먼은 데미안에게 가려던 걸음을 그대로 돌려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각하.”
조금 수척해진 얼굴의 닉이 있었다.
닉은 주위를 초조하게 살피며 닫힌 천막을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이제부터 제가 드릴 말은 회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방도를 무조건 마련해야 합니다.”
닉은 보름 전 수도로 먼저 올라갔었다. 본래의 목적은 다른 것이었으나 일이 겹치는 것과 동시에 뜻밖에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내일, 황제는 세르기 블레드를 블레드의 가주로 임명할 겁니다.”
닉은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렸다.
“그리고 황제는 현재 각하를 노리고 있습니다. 세르기 블레드를 통해 얻은 것으로 각하를 폭주하게 만들 셈입니다.”
도청당하고 있습니다.
에드먼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닉의 행동이 이상한 것은 둘째 치고 그의 표정은 마치 누군가 인조적으로 만든 듯 어색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에드먼은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정말인가?”
“예.”
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에드먼이 수도에 도착하기 며칠 전이었다. 황제의 계획에 대해 알게 된 그날, 닉은 자신이 흑마법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미처 간과하지 못한 것은 닉이 이미 흑마법의 한 종류인 ‘검은 돌’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새로이 걸린 흑마법과 기존에 있던 것이 반대의 성향 탓에 충돌을 일으켰고, 그 결과 새로이 걸린 흑마법이 약해졌다.
이 때문에 닉은 자신이 말하고, 듣는 것이 모두 상대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기에 에드먼이 수도로 올라온 지 며칠이 지난 지금,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뭔가.”
“마님께서 황녀님을 독살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에드먼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동시에 닉의 눈에 깜빡, 붉은 불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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