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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44화 (44/145)

44화

“어?”

“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기셔서 나중에 오신다 했습니다.”

“…그렇구나.”

훅 지나간 물음에 다프네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간 물음이었다.

짧은 대화 후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창밖을 응시하던 데미안의 시선이 창가에 비친 다프네에게로 조금씩 움직였다.

다프네는 그저 정면을 고정한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두 입술 역시 다물어져 있었다.

그렇게 마차는 고요함만 흘렀다.

오랫동안.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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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알렉은 황제와의 알현을 끝낸 에드먼의 뒤를 다급히 따라붙었다.

에드먼의 표정은 알현실을 들어갔을 때보다 더 살벌해져 있었다. 그가 내뿜는 기운이 평소보다 더 힘겨웠기에 알렉은 낮게 신음을 토했다.

알렉의 신음에 에드먼은 자신의 기운을 뒤늦게 자각하며 갈무리했다.

한층 숨쉬기 편해진 알렉은 다시금 에드먼의 뒤에 붙었다.

“황녀 궁으로 찾아가라더군. 직접.”

“…지금 이 인파 앞에서 황녀, 아니. 황녀님의 침소 앞까지 가서 에스코트를 하라 했단 말입니까?”

알렉은 에드먼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이며 주위를 살폈다.

제국의 큰 축제 중 하나인 탓에 본래도 사람이 많던 황궁은 절정에 다다랐다. 게다가 본격적인 사냥 대회 전날인 만큼 해외 고위급 인사들도 널려 있는 황궁이다.

그런데 이 황궁에서 황녀의 궁 앞까지 찾아가 직접 에스코트하라는 말이었다, 황제는.

새벽같이 불러 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이것뿐이라니. 알렉은 터져 나오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마차가 딱 도착할 시간입니다.”

에드먼은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뒤를 휙 돌았다. 그리고 알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황실에서 열리는 행사다 보니 알렉은 꽤 차려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무패 전설을 지닌 검은 기사단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기사단장이다.

이건 황실 기사단장에 준하는 직위와 명성이다.

한마디로, 황녀의 임시 파트너로 시간 벌기 괜찮다.

“알렉, 네가 황녀 궁으로 가 봐라.”

“예? 잠, 잠깐. 각하!”

알렉은 다급히 에드먼을 불러 봤으나 그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알렉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에드먼은 걸음을 빨리 옮겼다. 주먹을 꽉 쥔 손이 후끈거렸다.

다프네에게 말할 기회는 있었다.

어젯밤.

북부에서와는 달리 주인 방과 안주인의 방이 옆에 붙어 있다는 것을 잊고 테라스에서 우연히 만난 그때.

손이 궐련 꽁다리에 닿아 화상을 입고 있다는 것도 모르던 그때.

“…….”

“…….”

그저 서로를 멍하니 보던 그때.

먼저 정신을 차린 에드먼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님. 숄 가져왔습니다.”

“…그래.”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에드먼이 잡을 새도 없었다.

그리고 아침에 같이 마차를 타고 가면서 말하려고 했으나 이것 또한 황제의 부름에 놓치고 말았다.

“…다프네.”

에드먼은 인파 사이에서 이상하리만큼 눈에 띈, 홀로 있는 다프네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췄다.

“에드먼?”

다프네는 갑작스러운 에드먼의 등장에 당황한 눈치였다.

“오늘 연회 파트너….”

“공작!”

높은 어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드먼과 다프네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이 에드먼의 품에 뛰어들었다.

당황하지 않은 이는 오직 에드먼의 품 안으로 뛰어든 여인 하나였다.

“…황녀님.”

에드먼은 엘리자벳의 어깨를 잡고 밀었다.

그에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엘리자벳은 힘에 더 밀리기 전에 빠르게 그의 재킷을 그러쥐었다.

엘리자벳의 새빨갛게 칠한 아름다운 손톱이 유독 눈에 들어왔기에, 그렇기에 다프네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제국의 작은 빛을 뵙습니다.”

황녀임을 자각한 다프네는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엘리자벳은 흘끔거릴 뿐 다시 에드먼에게 바짝 붙었다.

“공작, 왜 내 궁 앞까지 오지 않았어요?”

반짝이는 화장 탓에 엘리자벳의 커다란 눈방울에 물기가 차오르자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에드먼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시선이 엘리자벳의 뒤, 알렉에게로 향했다.

알렉은 입을 뻐끔거리며 상황을 전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충 상황을 짐작한 에드먼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에드먼은 자신을 붙잡은 엘리자벳의 손 위를 덮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엘리자벳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한 박자 빨랐다.

“공작 부인, 이만 고갤 드세요.”

다프네가 허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엘리자벳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있는 듯한 에드먼의 손으로 시선이 박혔다.

지금 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뒤늦게 깨달은 에드먼이 손을 휙 떨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엘리자벳은 마치 목표에 달성한 듯 미련 없이 밀려났다.

“공작, 우리 빨리 가요. 연회가 시작하겠어요.”

“…먼저 가십쇼.”

엘리자벳은 에드먼과 다프네를 번갈아 보다가 싱긋 웃었다.

“좋아요. 파트너를 혼자 만들 셈이 아니라면 금방 와야 해요?”

수십 명의 하녀를 대동한 엘리자벳이 사라지고,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고요했다.

다프네는 엘리자벳이 남기고 간 말을 더듬었다.

“파트너라고 하면….”

“그렇게 됐습니다.”

에드먼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다프네의 얼굴 위를 훑었다.

“사냥 대회 동안 파트너는 데미안이 될 겁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고, 설명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에드먼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알렉, 그 잠깐의 시간도 못 잡아 둔 건가?”

그리고 곧바로 제 뒤에 붙은 알렉을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아시잖습니까.”

알렉은 억울했다.

황녀가 자신이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차라리 상급 마물을 막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게 그나마 잡은 겁니다. 절 발견하자마자 어찌나 빨리 달려가시는지.”

알렉을 본 엘리자벳은 무언가 알아챈 듯 곧바로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아무리 황녀를 불러 봐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황녀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알렉도 할 말이 많았다.

“차라리 다음부터는 마물을 막으라 하십시오.”

“입 닫아.”

에드먼은 조용히 읊조린 후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기에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프네의 곁에는 데미안도,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을.

***

“…뭐?”

데미안은 눈을 깜빡였다.

“다시, 다시 말해 봐.”

벌써 세 번째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벤트는 귀찮은 기색 없이, 여전히 초조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킨 후 속사포로 말했다.

“소공작님의 어머니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데미안은 참았던 얄팍한 숨을 터트렸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게 확실한 것인지는….”

“상관없어.”

확실한가에 대한 사실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무려 3년 만에 처음으로 얻은 정보다.

드디어 한 발짝 내디뎠다는 것에 데미안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귀족인 것 같습니다.”

“귀족?”

“네. 자세한 건 만난 후에야 알겠지만, 사냥 대회의 마지막 날 ‘숲’의 입구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꺼리는 것을 보니 귀족으로 추측하고 있고요.”

벤트가 이 정보를 주운 건 정말 우연이었다.

수도에 올라왔으니 중간에 요원을 만났다. 그리고 요원은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접근했고, 벤트가 말한 것과 흡사한 여인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사냥 대회의 마지막 날이라고….”

내일부터 사냥 대회가 시작되니 며칠 남지 않았다.

데미안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아… 글쎄요?”

워낙 벤트가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자 데미안은 다프네를 홀로 두고 왔다.

“저 사람들을 따라가면 연회장일 것 같은데요.”

데미안이 다프네가 있는 곳이 아닌 연회장으로 향하자 벤트가 뒤를 따르며 물었다.

“마님은요?”

“파트너는 아버지니까.”

데미안은 홀로 서 있던 다프네의 모습을 지웠다.

“저기 있네요.”

벤트가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소벨 후작 영애, 레이첼이었다.

일전의 일 때문인지 데미안을 발견한 레이첼은 어깨를 흠칫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더라도 일찍이 사교계의 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영애답게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급한 일정임에도 와 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제국에서 연회 때 주최자를 제외한 이에게 파트너가 없는 것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가족이든 호위 기사든 귀족인 보좌관과 파트너를 맺어서라도 등장해야 한다.

홀로 등장할 경우, 미혼일 때는 결혼 시장에서조차 가치가 아예 없다는 뜻이다. 기혼이라면 가족에게조차 외면받는 존재라는 뜻이니 모두가 목숨 걸고 꼭 파트너와 등장한다.

데미안은 급한 대로 레이첼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그녀는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레이첼과 입장한 데미안은 에드먼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면을 튼 이들과 하나둘 인사를 나눴다.

시간이 흐르고 한창 연회의 분위기가 물오른, 황족들의 등장 시간이 가까워지던 때였다.

갑자기 입구가 시끄러워졌다. 에드먼의 등장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얘기를 나누던 귀족과 헤어진 데미안은 곧바로 인파를 뚫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소공작인 데미안을 신경 쓰지도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어느 한곳으로 신경이 팔린 상태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새로 등장한 파트너들을 향한 말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찰나.

“공작님은 정말 여전하세요. 어쩜 저리도 아름다우실까요.”

“황녀님도 그에 뒤처지지 않으시니 정말 완벽한 짝이지요.”

데미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솔직히 말하자면… 윈터 공작 부인과 공작님은 어울리지 않으시잖아요. 음, 이런 걸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죠?”

그 말에 여러 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로 몸을 돌리려던 때, 누군가 데미안의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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