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식당에 도착하고 다프네가 자리에 앉자 갓 만든 따듯한 음식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손질해 드리겠습니다.”
올가는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다프네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다른 음식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이 음식이 왜….”
“그게 무엇인가.”
“임산부에게 좋지 않다고 제가 일러둔 음식 중 하나인데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기로 향하던 다프네의 손이 멈추었다. 다프네는 몇 번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잠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헐레벌떡 음식을 옆으로 치운 올가는 굳은 다프네의 표정을 발견했다.
“마님. 혹시….”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는가.”
혹시 그것과 관련된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올가는 눈치를 살폈다.
“예. 제가 미리 알아야 할 것 같다면서 집사님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아이, 아이…
다프네의 시선이 저절로 납작한 배에 닿았다.
“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작 블레드 가문이 공작 부인의 자리를 차지하다니요.”
마법과도 같은 단어다. 이 한마디로 난 그대로인데 모든 게 바뀌고 있다. 둘러싼 상황도, 사람도.
다프네는 제 앞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던 음식이 마치 제 것이 아닌 듯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토기가 치미는 것은 순간이었다.
“웁!”
“마님!
입을 틀어막자 올가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음식을 잘못 드신 겁니까. 제가 당장 주치의를… 아, 각하.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에드먼의 등장에 올가가 주춤거리며 허리를 일으켰다.
다프네는 식당 입구에 선 에드먼을 돌아보았다.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후회할 텐데.”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저 눈빛.
기꺼이 몸을 내주고 속박될 수밖에 없는 저 눈빛이 다프네를 숨 막히게 해서 싫었다.
“…됐네.”
다프네는 입가에 올렸던 손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드먼을 스쳐 지나갔다.
“나 때문입니까?”
정확히 그의 옆을 스치는 순간에 붙잡는 말에 발이 그대로 묶였다.
“아니요.”
다프네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떨지 마, 긴장하지 마.
무의미한 말로 자신을 다독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당당한 걸음으로. 그리고 다프네는 여유롭게 뒤돌았다.
‘붉은 눈?’
창가로 들이치는 햇살 아래에서 올가의 갈색 눈은 아주 짧은 사이지만 붉게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선은 올가에게 향해 있지만 온 신경은 바로 옆에 있는 에드먼에게로 향했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네는 시선이 저절로 향하는 것을 꾹 참아 내며 올가에게로 고정했다.
“먼저 저택으로 도착한 사용인들 중에 안나라는 아이가 있을 거란다. 내게 보내. 유일하게 믿는 아이거든.”
“예, 마님.”
“그리고 올가. 아이 얘기.”
“……”
“내 앞에서 꺼내지 마.”
다프네는 고개를 돌려 에드먼을 보았다.
“난 결코 원한 적 없는 아이니까.”
“…….”
그리고 다프네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왔다.
***
“황녀의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예?”
술의 마개를 따던 벤자민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에드먼이 한 말 중 당혹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까?”
“부탁을 위장한 명이었지.”
별 같잖은 이유를 붙여 대면서 황녀를 파트너로 들이밀던 에드워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마님은….”
“데미안과 하게 되겠지.”
벤자민은 치료도 잊은 채 손을 내렸다.
부인이 멀쩡하게 잘 있는 기혼의 남자가 미혼의, 그것도 자신에게 열렬한 구애를 했던 여자의 파트너가 된다. 그 그림이 뜻하는 바가 너무나 명확했다.
“아예 대놓고 황녀님과 각하를 밀어주겠다는 거군요.”
“훨씬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물론 황제가 예전에도 이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연회장에서 대놓고 춤을 추게 하는 둥 많은 짓을 해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해.”
“왜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전에 황제가 한 것은 자잘한 수에 불과했다. 이렇게 노골적이라면 충분히 거절할 만한 이유가 정당화된다.
그런데도 에드먼은 거절하지 않았다.
“신관 몇몇을 북부로 파견시켜 준다길래 했다.”
“예…?”
벤자민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에드먼은 저 조건을 듣고 받아들인 것이다. 황녀의 파트너를 하겠다는.
벤자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뻐끔거리고 눈을 깜빡이다가 술의 마개를 마저 땄다.
허리를 숙여 오른쪽 어깨에 난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하필이면 며칠 전에 겨우 다 나은 상처가 있던 그 자리 그대로였다. 꺼림칙한 우연이다.
상처는 애당초 에드먼이 그동안 입은 부상 중에서 긁힌 것에 속할 정도로 별것 아니다.
상처 위에는 검은 마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마기가 허리를 가뜩 채웠겠지만 에드먼은 아직 한 뺨도 되지 않는다.
마물에게는 마기가 있다.
몸에 닿으면 검게 변해 끝내 몸 전체를 검게 물들이고, 피를 메마르게 하는 마기. 이 마기를 물리칠 수 있는 건 오직 성력이었다.
이 때문에 성력이 담긴 마력석은 항상 필요했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급하게 출발한 나머지 성력이 담긴 마력석을 챙기지 못했으나 닉에게 연락을 취했으니 에드먼을 더 잠식하기 전에 마력석을 사용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대대로 북부를 지키는 윈터 공작가와 신전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신전은 마땅한 대가 없이는 결단코 마물의 주 서식지인 북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 어찌 생각해 보면 합당한 조건이다.
고작 한 번 파트너 했다고 실제로 각하께서 마님과 이혼하고 황녀님과 결혼할 것도 아니고.
파트너 한 번에 신관 파견이면 충분하다.
벤자민은 제 생각보다 더 놀란 자신을 진정시켰다. 에드먼이 변심한 것이 아니라 다 생각이 있으신 거라고. 벤자민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믿고 싶었다.
“윈터 공작가와 황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아주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 이번 사냥 대회 때 엘리자벳 황녀를 공작이, 그리고 칼리토 황태자를 공작 부인의 파트너로….”
‘칼리토 뒤가뜨.’
한편.
에드먼은 제국의 황태자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칼리토는 지금은 사망한 서 대륙의 공주이자 전 황후의 소생 중 유일한 아들이다.
그는 하나부터 열, 아니 열하나까지 뭐 하나 황태자에 걸맞지 않지만, 혈통 하나로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더군다나 제 아비와 판박이일 정도로 똑같다. 행동이든 생김새든.
한마디로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망나니였다.
그리고 그런 칼리토가 다프네의 파트너가 된다고 하자 저도 모르게 그만….
“파트너는 저만 바꾸는 거로 하겠습니다. 부인에게는 데미안으로 충분합니다.”
“하아…”
“궐련을 가져다 드릴까요?”
에드먼이 한숨을 내쉬자 고통을 참는 것이라 오해한 벤자민이 물었다.
“됐, 아니. 그래.”
에드먼은 벤자민이 나가면서 건넨 궐련을 받아 입에 가져다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드르륵, 말리고 에드먼은 테라스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궐련이 있었다.
테라스의 문을 열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선선한 바람이 그를 맞았다. 에드먼은 뼈가 시린 바람이 더 익숙했다.
고개를 든 에드먼은 별이 빼곡하게 박힌 밤하늘을 보았다. 후우, 내뱉은 궐련 연기가 바람을 타고 뿌옇게 이동했다.
다프네과 관련된 일이면 자신은 여과 없이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다.
터무니없는 결혼을 받아들인 것도, 닉을 탈옥시킨 것도, 다프네가 동상에 걸리는 것을 막은 것도, 전부.
에드먼은 그런 자신이 낯설고 싫었다.
에드먼은 익숙한 것이 좋았다.
“난 결코 원한 적 없는 아이니까.”
“콜록, 콜록!”
그때,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에드먼은 고개를 휙 돌렸다.
치이이이.
짧아진 궐련이 그의 손을 뜨겁게 달구는데도 에드먼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옆 테라스에 있는 다프네에게로.
사냥 대회를 앞둔 전날 밤이었다.
***
아침이 밝았다.
저택은 주인들이 사냥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냥 대회는 이미 일주일 전에 시작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격적인 사냥 대회를 즐기기 위해 일주일 동안 연회를 열고, 그 후 사흘 동안 사냥 대회를 즐기고, 또다시 일주일 동안 사냥 대회의 막을 내리는 연회를 연다.
오늘은 사냥 대회의 바로 전날로 연회가 열리는 일주일 중 마지막 날이다.
“마님! 이 장신구는 어떠세요?”
“아니, 차라리 이걸 달까요? 마님에게는 이게 더 잘 어울리실 것 같기도 해요.”
“헉, 이런 장신구도 있었군요! 이걸로 해요!”
처음 다프네의 치장을 돕게 된 안나는 흥분한 상태였다.
다프네는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안나를 부드럽게 불렀다.
“안나.”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안나는 다프네의 부름에 우뚝 멈췄다가 제 행동을 자각하고는 민망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헤헤, 죄송해요. 이렇게 장신구를 많이 써 보는 건 처음이라….”
잔뜩 신난 안나를 보며 다프네는 옅은 미소를 지었으나 난감한 상태였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얼굴은 거의 손대지 않고 장신구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안나의 의욕 넘치는 모습에 처음부터 말리는 것을 놓쳤다.
“음? 처음 보는 보석 상자네요.”
손에 집히는 대로 다 가져온 안나는 투박한 나무 상자를 발견하고는 손을 뻗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다프네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네가 가져온 것 중에 나도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이거 하나만 하자.”
“너무 수수하지 않을까요?”
“충분해.”
다프네가 단호히 말하자 사교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안나는 순순히 순응하며 다프네가 집은 장신구를 머리에 꽂았다.
‘이게 왜….’
다프네는 안나가 한눈을 판 사이 나무 상자를 아무 짐에 깊게 집어넣었다.
“다 됐어요.”
장신구를 마지막으로 치장을 끝낸 다프네는 밖으로 향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했기에 급하게 마차에 오르자 정자세로 앉아 있는 데미안과 눈이 그대로 마주쳤다.
어정쩡한 상태로 그러길 얼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미처 앉지 못한 다프네가 비틀거렸다.
“조심….”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프네가 벽을 짚고 자리에 앉는 것이 빨랐다. 데미안은 그 모습에 다프네가 보기 전, 뻗었던 손을 황급히 내렸다.
데미안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겨우 자리에 앉은 다프네는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데미안을 흘끔 보았다.
데미안은 이미 그녀에게서 고개를 반대로 돌린 상태였다.
“아버지가 아니라 실망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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