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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42화 (42/145)

42화

깊은 새벽이 내려앉은 저택.

이 저택은 초대 황제가 자신의 동료이자 친우인 초대 윈터 공작에게 하사한 저택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그러나 먼 나라의 왕까지 찾아와 볼 정도로 아름다운 저택의 명성은 과거에 불과하다.

이 저택은 현 윈터 공작, 에드먼이 공작위를 물려받은 후로는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름다웠던 저택은 예전의 모습을 잃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혔다.

늙은 시녀장과 자신의 청춘을 바친 사용인 몇몇이 그저 저택을 고요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저택은 달랐다.

“벤자민, 촛불을 더 준비해야 할까요? 아, 그러고 보니 기름도 부족할 텐데 지금이라도 사서….”

“올가.”

벤자민은 늙은 시녀장, 올가를 부드럽게 불렀다.

“그럼 마님의 방이라도….”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충분하다니요. 마님의 눈에 이 저택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 걱정됩니다.”

발을 동동 굴리던 올가는 겨우 진정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곳이 지금은 이래도 몇 년 전까진 아름다웠는데….”

“지금도 아름답습니다.”

“지금의 이곳이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마님을 처음 뵙는 거잖습니까.”

나이가 많이 든 탓에 올가가 북부를 횡단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에드먼은 이를 반대했기에 올가는 결혼식에 참가할 수 없었고, 데미안의 성년식 때는 몸이 좋지 않아 윈터 공작 부인을 찾아뵐 수 없었다.

이대로 영영 공작 부인을 영영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몇 시간 전 북부로 내려갔던 벤자민이 왔다. 공작 내외와 소공작이 사냥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는 엄청난 소식을 가지고.

그리고 벤자민이 가져온 기쁜 소식은 하나가 더 있었다.

올가는 마른침을 삼킨 후 또 물었다.

“정말, 정말 마님께서 임신하신 게 맞죠?”

“예, 맞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말씀하셨어요.”

올가가 이리도 들뜬 건 후자의 소식 때문이다. 아이라니. 윈터 공작가에서 한 대의 두 번째 아이라니!

오랫동안 내려오던 윈터 공작가의 저주를 풀어 줄 수만 있다면 마님의 출신이 블레드 가문이라는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이만 잠듭시다. 내일 이른 아침에서야 도착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올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벤자민과 복도를 걸었다.

그러나 올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올가, 어디를….”

올가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벤자민은 그녀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불빛을 발견했다.

에드먼이었다.

벤자민과 올가는 곧바로 1층으로 내려가 정문 앞에 섰다.

이미 일행이 도착하여 짐을 내리고 있었다.

“각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벤자민은 거친 숨을 내쉬며 혼란스러워했다. 적어도 몇 시간 후에 도착해야 할 에드먼이 왜 지금 도착한 것인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불안감이 커졌다.

“올가, 오랜만이군. 요한이 부상을 입었다.”

“그런…!”

평온한 인사말 뒤에 덧붙인 말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벤자민은 서둘러 요한을 주치의에게 가도록 안내했다.

“다프네는 마차에 있다. 다프네도 다쳤으니 살펴봐.”

요한에 뒤이어 마님의 부상까지.

벤자민은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각하, 도대체 무슨 일이….”

“벤자민. 술을 가져와.”

지나치며 하는 말에 벤자민이 다급히 에드먼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에드먼의 말을 되짚었다.

술을 가져와라.

‘!’

에드먼 역시 다쳤다.

그것도 심각하게.

***

“흠, 이번 사냥 대회가 정말 기대됩니다.”

“나도 그렇네. 윈터 공작이 사냥 대회에 처음 참가하는 것이지?”

“예.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작자죠.”

베벨록 공작은 윈터 공작, 에드먼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폐하가 편지까지 보내고 나서야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인 것인지.”

사냥 대회의 참여는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아니. 윈터 공작을 제외한 모든 귀족이 제국의 큰 축제 중 하나에 참여해 인맥을 넓히거나 명성을 쌓고 싶어 했다.

베벨록 공작은 그런 규칙 따위가 있는 것처럼 에드먼을 헐뜯었다.

‘참 웃긴 관계지.’

황제는 그런 베벨록 공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베벨록 공작과 윈터 공작.

이 두 가문은 아주 예전부터 서로를 경쟁자로 여겼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베벨록 쪽이 윈터 공작을 경쟁자로 생각했다.

대대로 이어져 오던 일방적인 경쟁은 지금도 여전했다.

베벨록 공작이 에드먼을 헐뜯기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황제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 일은 잘되어 가고 있는가.”

“당연하지요.”

베벨록 공작은 목소리를 깔며 낮게 물었다.

“잊지 않으셨겠지요. 이 일이 끝나면….”

“베벨록 공녀를 내 황후로 올리는 그 조건 말인가.”

기다리던 말이 나오자 베벨록 공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운명의 장난인지 대대로 베벨록과 윈터는 많이 차이 나 봤자 다섯 살일 정도로 늘 나이대가 비슷했다.

언제나 윈터 공작가에게 뒤처지는 베벨록의 사람들은 열등감에 시달렸다. 이 탓인지 베벨록 가문은 반드시 윈터 가문을 꺾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 왔다.

그리고 이번 대의 베벨록 공작은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다. 모두가 이번에는 베벨록이 윈터를 이길 거라고 얘기했다. 에드먼이 태어나기 전까진.

열여덟 살의 베벨록 공작은 처음으로 패배감을 맛보았다. 고작 사교계에 모습을 갓 드러낸 다섯 살인 에드먼에게.

검술이면 검술, 지식이면 지식, 경제면 경제. 베벨록 공작은 그 무엇으로도 에드먼을 이길 수 없었다.

에드먼이 자라 전쟁 영웅이 되고 추앙받을 동안 베벨록 공작은 황제에게 접근했다.

에드워드는 베벨록 공작을 이용했고, 베벨록 공작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에드먼의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둘은 다르지만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더 속내를 숨기고 가면을 쓴 미소를 머금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폐하, 윈터 공작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해.”

베벨록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폐하.”

“음.”

베벨록 공작은 복도를 지나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다 열렸을 때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공작, 오랜….”

에드먼의 시선은 베벨록 공작에게 닿지도 않았다. 베벨록 공작은 자신을 지나치는 에드먼의 모습에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베벨록 공작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보초를 서고 있는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뺏어 던졌다.

탁.

“뭐 하는 거지?”

“허.”

멀쩡한 에드먼의 모습에 베벨록 공작은 헛웃음 내뱉고 말았다.

들은 정보와 다르게 에드먼은 부상은커녕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듯, 보이지도 않았을 검을 막았다.

“그냥, 안부 인사 정도.”

에드먼은 베벨록 공작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몸을 돌려 알현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베벨록은 이를 갈았다.

“그대가 이번 사냥 대회에 참가해 주다니, 영광이오.”

“아닙니다, 폐하. 제가 할 말이지요.”

“흠, 오는 데 별문제는 없었고?”

무언가 다른 의미가 담긴 황제의 말에 줄곧 바닥을 향해 있던 에드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언제 마주해도 소름 끼치는 눈이다. 에드워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어깨를 들썩였다.

바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도저히 황제라 하기에는 믿기 어려웠다. 에드먼이 다시 시선을 내린 후에야, 황제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크흠,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부탁할 것이 있어서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이 떠나고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뻣뻣해진 목을 매만졌다.

‘하여튼 건방진 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더라도 에드먼은 결단코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주군으로 여기지 않는다. 황제는 에드먼의 눈에서 그런 기류를 다 느낄 수 있었다.

“세르기 공자, 이제 나오지.”

그리고 뒤편의 휘장을 걷고 세르기가 나왔다.

“분명 다쳤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멀쩡하기만 하던데.”

세르기는 미간을 좁혔다.

그도 이게 어찌 된 것인지 영문을 모르던 차였다.

분명 마물에게 당해 마기에 오염당했을 터인데, 에드먼은 멀쩡했다. 걸음걸이나 숨 쉬는 것 하나까지 다 훑어보았으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혹시 모를 계획 중 하나였을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러한가?”

“예, 폐하.”

황제는 일말의 망설임 없는 세르기의 대답에 크게 안도했다.

세르기는 방긋 웃으며 황제를 보았다.

“폐하. 저 또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다프네는 느리게 눈을 떴다.

북부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따스한 햇볕이 다프네의 얼굴 위를 간지럽혔다.

다프네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잠시 멍하니 방을 살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고전적인 느낌을 풍기는 방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대꾸할 새도 없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마님!”

문을 연 것은 노년의 여자였다.

시녀장의 옷을 입은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다프네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벌써 일어나셨군요. 팔은 좀 어떠십니까? 아프신 곳이 있으면 바로 말해 주세요.”

쏟아지는 질문에 다프네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저는 올가입니다. 이 저택의 시녀장이죠. 편하게 올가라고 불러 주세요.”

“올가… 반갑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올가는 들고 있던 헝겊을 내려놓았다.

“자, 손 주세요. 갈아야 할 시간이어서요.”

손을 내밀자 올가는 팔뚝을 감싼 붕대를 풀었다. 상처는 하룻밤 사이에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흉이 지겠어요.”

올가는 그것이 퍽 안타까운 듯 속상한 얼굴로 상처 근처를 손으로 약하게 문질렀다.

다프네는 그 다정한 손길에 저도 모르게 흠칫, 하며 손을 뒤로 뺐다.

다행히도 올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동시였다.

“시장하시죠?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옷부터 갈아입으실까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끌림에 다프네는 속수무책으로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아무리 작은 옷을 찾아 입어도 다프네의 마른 몸에 딱 맞는 옷이 없었다.

결국 가벼운 드레스 차림으로 바꿔 입은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 짧은 사이에도 올가는 열심히 조잘거렸다.

“정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마님을 드디어 만난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들뜨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이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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