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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40화 (40/145)

40화

분명 다프네의 목소리다. 다프네가 한 말이란 소리다.

“말도 안 되는….”

에드먼은 문득 자신의 무의식 속에 다프네가 등장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둡고 깊은 심연 속에서 다프네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큰 존재였다.

에드먼은 처음으로 기억이 난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이 무의식 상태에서 다프네를 불러냈다는 것에 온 신경을 쏟고 말았다.

무의식 속의 에드먼은 그저 다프네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다가 다프네가 먼저 다가와 지독히도 달콤하여 쓰기까지 한 말을 속삭였다.

안아 달라고.

“…미친 거지.”

미친 게 틀림없다.

집무실 안을 서성거리던 에드먼은 결국 대련장으로 향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도무지 다프네를 향한 생각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드먼은 그날 동이 틀 때까지 대련장에 머물렀다.

***

“…뭐?”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다프네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곧바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가 깨어났어?”

“예. 어젯밤 깨어나셨습니다.”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에드먼이 깨어났다.

다프네는 에드먼이 그 시기마다 어떤 일을 겪는지 알았다. 물론 이번처럼 그녀를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믿을 수 없었으나 이 말을 전한 이가 벤자민이었기에 다프네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벤자민을 따라 도착한 곳은 에드먼의 집무실이었다. 이곳에 그리 좋지 못한 기억만 있기에 다프네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뉴벨 남작 내외와 요한이 있었다.

“마님.”

뉴벨 남작 내외와 가벼운 눈인사를 한 다프네와 벤자민이 자리에 앉자 곧이어 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데미안이다.

다프네는 데미안을 바라보았고 데미안은 다프네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다 모였군.”

이제 막 씻고 나온 것인지 에드먼은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등장했다.

“본론부터 하지. 이번 사냥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다프네와 데미안의 시선이 에드먼에게 모였다.

“황명이다.”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이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갑작스러운 건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데미안, 넌 수도로 올라가 있는 기간 동안 후계자의 입지를 단단히 할 수 있는 기회야.”

후계자의 입지.

데미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알겠습니다.”

“출발은 내일이고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일 예정이다. 첫 번째 선발대는 벤자민이고 두 번째 선발대는 요한과….”

에드먼의 설명이 이어졌다.

조율할 것을 확인하고 세부 사항을 이것저것 정하고 보니 시간은 어느덧 훌쩍 지나 있었다.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남은 것은 다프네와 에드먼 단둘이었다.

“…수도는 가지 않을 거예요.”

다프네는 고개를 숙인 채 오로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꽉 쥔 주먹만 보았다.

“갈 수 없어요.”

“왜? 그게 내가 없는 일주일 사이 데미안에게 약혼녀를 붙이려 했던 것과 관련 있습니까?”

다프네는 에드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다프네는 에드먼의 시선을 피했다.

“몸이 안 좋아요.”

“뉴벨 남작 부인이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프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먼의 시선은 하얗게 질린 입술에 닿았다. 작지도, 크지도, 두툼하지도, 얇지도 않은 평범한 입술이지만 그 차가운 온도만이 기억에 남았다.

하얗게 질린 입술에 붉은 혈색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에드먼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모든 윈터 공작가의 일원이 참석해라.’ 황제의 편지에 적힌 말입니다.”

에드먼은 편지를 세워 툭, 테이블에 두들겼다.

“…몸이 아프면 갈 수 없을지도 모르죠.”

“그렇게까지 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가기 싫어요, 싫다고요.”

다프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당신도 실은 내가 가지 않길 바라고 있잖아요.”

“내가 없는 사이 당신이 또 떠날지 어떻게 압니까. 그 몸으로.”

에드먼의 시선이 다프네의 납작한 배로 향했다. 다프네는 어깨를 흠칫 떨며 배를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약속했잖아요. 아이를 낳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고.”

“이미 한 번 약속을 깬 당신을 또 믿을 순 없습니다.”

“이번에는 정말이에요.”

“나는 당신이 단순히 가기 싫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령….”

길에 늘어지는 말에 다프네는 에드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르기 공자와 관련이 있다든지.”

다프네의 입술이 벌어졌다.

멍한 다프네의 모습에 에드먼은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몰랐습니까?”

“……”

“경계 마을에서 그대를 습격했던 살수, 그대의 오라비가 보낸 이들이라는 걸요.”

***

ㅎㅂㄹㄱ.공금

“사냥 대회에 참가하신다지?”

“응. 이번이 처음 아니야? 여기서 일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사냥 대회에 참가하시는 거 처음 봐.”

“올해 벌써 두 번이나 수도로 가시는 거잖아. 하, 부럽다. 우리는 언제쯤 수도에 발 한 번 디뎌 보려나.”

“지금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죽기 전엔 가 보겠지. 빨리 일이나 하러 가자.”

다프네는 하녀들의 대화 소리가 멀어지자 그제야 방문을 열었다.

텅 빈 복도를 지나는 와중에 창문 밖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을 발견했다.

“세르기 공자와 관련이 있다든지.”

예상은 했지만, 살수를 보낸 이는 세르기가 맞았다. 다프네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최대한 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

데미안과 마주치고 말았다.

데미안도, 다프네도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다프네의 시선이 데미안의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향했다. 본래 데미안이 쓰던 투박한 검이 그대로 매여 있었다.

다프네의 시선을 느낀 데미안은 자신의 허리춤을 보고는 황당함을 지울 수 없었다. 다프네가 준 것임을 알고도 자신이 쓸 줄 알았나.

아마 그 검은 물론 다프네가 지금껏 보낸 선물들은 어느 누가 주워 쓰고 있거나 눈 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다프네의 몸이 움찔거리는 찰나, 데미안이 몸을 돌리는 것이 더 빨랐다.

다프네는 순식간에 사라진 데미안의 뒷모습을 보다가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아, 소공작님. 소공작님과 마님은 이 마차를….”

“됐어.”

다프네가 겨우 따라잡아 발견한 모습은, 준비된 마차 대신 짐 마차에 오르는 데미안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다프네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괜찮다, 익숙하다.

다프네는 눈을 깜빡이다가 마차에 올랐다. 창문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자 주변의 소리에 집중되면서 더 크게 들렸다.

짐을 옮기는 소리, 말소리, 소란스러운 소리. 그리고 에드먼이 말을 타고 나온 소리.

“출발하지.”

에드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마차는 출발했다.

“각하.”

벤자민의 부름에 에드먼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을 시간이지만 하늘엔 벌써 어둠이 드리웠다. 다름 아닌 먹구름 때문이다.

“아무래도 폭설이 내릴 것 같습니다.”

“선발대에서 온 연락은 없나?”

어제 밤 먼저 떠난 벤지만의 뒤로 출발하기 두 시간 전, 뉴벨 남작과 요한을 포함한 검은 기사단 몇몇이 선발대로 출발하였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전령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선발대 쪽은 이미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에드먼은 밀려오는 검은 먹구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다. 적어도 반나절 이상 폭설이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마을은 오래전에 지나쳤기에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다른 길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길밖에 없는 건가.”

벤자민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갈 수 있는 길은 단 두 개다. 지금 이 길과 선대 공작 내외들이 묻힌 무덤이 있는 뒷길.

뒷길은 외부인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길이기도 하지만 몇 년 전 다프네가 일으킨 사건 후로 출입이 통제됐기에 이곳을 거친다면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겨지는 것이었다.

“알릴까요?”

“…다프네를 제외하고.”

벤자민은 잠시 쉰다는 핑계로 멈춰 있던 일행에게 길을 바꾼다는 걸 알렸다.

다행히 다프네는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소식을 전하지 않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뒷길?”

다만 소식을 들은 데미안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데미안 또한 몇 년 전 사건을 떠올렸다는 것을 눈치챈 벤자민이 빠르게 덧붙였다.

“마님께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좋은 선택이군.”

마차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를 바로 도는 것은 너무 티 났기에 크게 돌며 검은 먹구름을 뒤로하고 뒷길로 향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고 검은 먹구름은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았다.

시신 몇십 구가 안치된 뒷길에 점점 가까워지자 공기는 한층 차가워지고 말들의 걸음이 느려졌다.

“각하.”

벤자민은 선두에 있는 에드먼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소란이지?”

소란스러움은 어렴풋이 들렸다.

벤자민은 식은땀을 흘렸다.

“마님께서 아시게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선대 공작의 무덤을 파헤치기 위해 난동을 피우는가?”

“그것은 아닙니다만…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십니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선대 공작의 무덤을 향해 돌진하는 일보다 곤란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금방 지날 거다. 난동만 피우지 않게 해.”

“예, 알겠습니다.”

벤자민이 돌아가고 속도는 좀 더 빨라졌다.

뒷길에 들어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마님!”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붕대가 필요해요!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출혈.

에드먼은 곧바로 말에서 내려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프네가 창백한 얼굴로 반쯤 쓰러져 있었고, 뉴벨 남작 부인이 급하게 찢은 옷으로 다프네의 팔을 꽉 싸맨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마님께서 갑자기 창문을 깨셔서….”

상처의 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깊이가 꽤 깊었기에 소동은 한참 후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다프네가 많은 양의 피를 흘려 혼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깨면 그 이상의 일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마차를 같이 타지.”

그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먼은 다프네가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어서 출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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