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런데 왜 부인께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소공작님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영애.”
“아, 혹시 이 자리에 소공작님도 오시나요?”
다프네는 붉게 물든 레이첼의 뺨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데미안은 오지 못할 거에요.”
“아쉽네요.”
레이첼은 다프네의 손을 꼭 붙잡았다.
“부인. 전 제게 맞는 위치가 바로 이 저택의 안주인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다프네와 레이첼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소공작님!”
레이첼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프네는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데미안이 수업 중인 시간을 골라 레이첼과 만난 것이라 그가 등장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데미안, 네가 왜….”
“내 약혼녀가 나도 모르게 생길 거라기에 와 봤습니다.”
다프네가 무어라 얘기를 하기도 전에 데미안은 몸을 틀어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영애.”
“네, 소공작님. 듣고 있답니다.”
레이첼은 눈을 반짝이며 데미안과 마주했다.
“내가 영애와 약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
레이첼의 미소에 금이 갔다.
“이 가문의 안주인이 되겠다는 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약혼은 안 한다면서 윈터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니?
레이첼은 혼란스러웠다.
“한 1년 후쯤 만나 볼 수 있겠군요.”
다프네는 데미안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챘다.
“데미안.”
다급히 데미안을 불러 봤지만, 그가 말을 꺼내는 것이 더 빨랐다.
“영애보다 열세 살 어린 약혼자도 괜찮다면요.”
“데미안!”
다프네는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 그러고 보니 성별도 모르는군요. 어머니, 의원께서 제 동생의 성별이 무엇이라 합니까?”
“…아.”
레이첼은 주춤거렸다.
“부, 부인. 소공작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이첼은 도망치듯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응접실 안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어머니, 전 약혼하지 않을 겁니다.”
“…에드먼도 동의한 일이야.”
“제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데미안.”
“제가 누구 좋으라고 약혼합니까?”
“소벨 영애와 약혼하면 네 후계자 자리가 더 탄탄해져. 다 널 위해서….”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다프네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그렇게 빨리 이혼하고 싶으십니까?”
“!”
“후계자 자리가 굳건해지면 무조건 이혼을 진행한다, 라.”
안 그래도 창백한 다프네의 얼굴은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 데미안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저 얼굴을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다프네가 아니라.
“아버지와 참 재미있는 계약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할 말이 없구나.”
다프네는 언제나 그랬듯 회피했다.
데미안이 한 걸음 다가갔고, 다프네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는 당신을….”
“소공작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나타났다.
어두운 표정의 요한이었다.
“…황명이 내려왔습니다.”
황제가 그들을 불러들였다.
***
“사냥 대회라니요.”
“매년 참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마침 건국 300년이 되는 해이니, 올해는 꼭 참여하라는 겁니다.”
요한은 황제가 보낸 것을 벤자민에게 설명했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동안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공작가를 끌어들일 리 없다.
“그렇겠지만 황명을 거절할 방법은 없습니다.”
편지에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다. 이것을 거역할 시 반역자로 몰린다. 결단코 피할 수 없는 명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각하께서 문을 걸어 잠그신 지 이제 막 일주일 됐습니다. 한 달은 넘게 기다려야 하는데….”
윈터 공작가, 즉 에드먼이 목적일 텐데 그가 없으면 황제가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방도를 찾아야 했다.
“소공작님.”
벤자민은 멍한 데미안을 불렀다.
“…어.”
데미안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소공작님께서는 인제 그만 주무십시오. 밤이 깊었습니다.”
“…그래.”
평소라면 끝까지 자리를 지켰을 데미안이건만 그는 순순히 일어났다. 다른 이들은 그저 이 일에 많아 놀랐나 보다, 하며 넘겼다.
데미안은 오로지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어두운 복도를 거닐었다.
데미안이 그 종이를 발견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다프네가 돌아온 것은 이혼을 위해서다. 그리고 이혼하기 위해서는 데미안의 후계자 자리가 굳건해져야 한다.
데미안은 우뚝 멈춰 섰다.
자신은 그저 다프네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말에 불과했다.
그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래, 그런 것이다.
이야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소식을 들은 뉴벨 남작이 합류했으나,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대마법사님과 연락이 닿는 겁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겠네.”
그러나 날짜에 맞게 도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흘 안에 수도로 출발해야 한다.
“황제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닉이 수도에 있으니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아, 닉 아처를 데려왔다고 했지.”
에드먼은 며칠 전 닉을 수도로 돌려보냈다.
“요한, 각하께서 닉 아처를 탈옥시킨 게 온전히 마님을 찾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맞습니다.”
뉴벨 남작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남작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부인께서 마님의 주치의시죠. 그럼… 혹시 마님께서 임신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요한.”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요한의 이름을 부르며 막았다.
그러나 이미 뉴벨 남작이 다 들은 후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전 아직도 마님의 임신이 믿기 어렵습니다. 남작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다. 각하와 마님은….”
“그게 무슨 말이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에드먼이 있었다.
에드먼은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이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드먼이 자리에 털썩 앉는 순간.
“…각하!”
요한의 말문이 먼저 트였다.
요한은 다른 이들이 하고 싶은 물음을 전부 빠르게 물었다.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아니,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빠르죠? 몸은 괜찮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에드먼은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도 모른다.”
“이번에도…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에드먼은 언제나처럼 그동안의 기억이 통으로 비어 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방을 나온 에드먼은 알 수 있었다. 이번은 뭔가 다르다.
그리고 익숙한 기척이 모여 있는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며칠이 지난 것이지?”
“일주일입니다.”
일주일.
에드먼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기본적으로 한 달은 훌쩍 넘겼는데 일주일이라니.
복잡함에 에드먼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왜 모여 있던 것이지?”
에드먼의 물음에 다른 이들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요한이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그것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에드먼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한마디 할 뿐이었다.
“준비해.”
“각하.”
“다른 방도가 있나?”
없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분명 계략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알 때까지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는 게….”
“요한, 상대는 황제다. 반역죄로 몰리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따르는 게 좋아.”
현 황제는 군주로서 타고난 자질이 없다.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인지 유난히 황제의 자리에 집착하였고 반역에 대한 과민 반응이 심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지 어느덧 30여 년. 그 짧은 사이 반역죄로 역사에 지워진 가문의 수가 벌써 열이 넘어갔다.
“황제에게는 내가 답신하마. 다들 물러가.”
에드먼은 편지를 챙겨 방을 나왔다.
밤이 늦었으나 에드먼은 침실 대신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낯선 이의 방문이 있었음을 알아채고 멈춰 섰다.
에드먼은 곧 며칠 전 데미안에게 서류를 부탁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걸음을 마저 옮겼다.
불이 켜지자 엉망이던 모습 그대로의 집무실이 드러났다. 에드먼은 자리에 앉아 가득 쌓인 서류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중간에 멈칫하더니 방향을 틀었다.
‘이건….’
에드먼이 집은 것은 다름 아닌 다프네가 휘갈겨 쓴 추가 계약 조건이었다.
서류 틈에 껴 있던 것이 테이블 위에 대놓고 올려져 있었다. 분명 누가 만졌다는 뜻이고, 에드먼의 집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데미안.”
데미안이 알게 되었다. 난감한 상황이다.
데미안에게 모든 걸 설명해 줘야 하나? 아니면….
“각하.”
노크 소리와 함께 벤자민의 목소리가 에드먼의 상념을 깨트렸다.
“들어와.”
벤자민의 품에는 술이 들려 있었다.
“상처를 봐 드리겠습니다.”
단추를 푸는 사이 벤자민은 깊숙한 곳에서 붕대를 꺼냈다.
“혹시 각하께서 혼자 하셨습니까?”
벤자민의 물음에 고개를 내리자 엉성하지만 꼼꼼하게 싸맨 상처가 보였다. 에드먼은 그걸 이제야 확인했다.
벤자민은 상처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그러고는 치료를 하지 않고 당황한 듯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왜 그러지?”
“그것이… 상처가 다 회복되었습니다.”
그 말에 에드먼은 곧장 상처가 있던 곳을 더듬었다.
상처는커녕 부드러운 살결만 만져졌다.
“정말 대단합니다.”
벤자민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도 괴물 같은 회복 속도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언제 봐도 놀라웠다.
“각하?”
벤자민은 표정이 굳은 에드먼을 불렀다.
“아, 피곤하시겠군요. 침실로….”
벤자민은 난장판이 되어 있을 침실을 떠올렸다.
“제가 지금 정리하겠습니다.”
“…됐다. 어차피 잠도 안 오니 집무실에서 서류를 볼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상처가 다 나았다고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에드먼은 대답 대신 서류를 집었고 벤자민은 익숙한 그의 반응에 이내 집무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에드먼은 곧바로 서류를 툭, 떨궜다.
그는 말끔히 나은 제 상처를 더듬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분명 변이 마물에게 공격당했다.
후각이 발달한 변이 마물은 에드먼의 다 낫지 않은 부상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오른쪽 어깨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여러 마리인 데다가 지켜야 할 사람들도 있으니 어깨를 내어 줘야 했다.
에드먼도 자신의 회복 속도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고작 일주일 안에 나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게다가 감겨 있던 붕대는 또 무엇인가.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그저 답답하고 복잡할 뿐이다.
그러던 그때, 기억의 파편 한 조각이 드러났다.
“안아 줘요.”
에드먼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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