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에드워드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건 평소 거슬렸던 윈터 공작을 치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의 평판마저 끌어올릴 좋은 기회였다.
“좋아, 좋구나. 그렇지만 윈터 공작이 폭주를 안 하면 어쩔 것이냐.”
“제게 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니 믿어만 주시지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세르기의 모습에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툭, 데구루루. 이질적인 소리는 황제의 곁에 있던 무희가 잔을 떨어트린 것이었다. 모든 걸 들은 무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덜덜 떨었다.
에드워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세르기는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기 전,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취미는 여전하군.’
내보내면 될 것을 굳이 옆에 두어 다 듣게 하고 죽이는 취미는 몇 년째 변하지 않았다.
세르기가 혀를 차며 뒤집어쓴 로브를 꼼꼼히 정리하는 동안, 누군가 그의 옆을 지나쳤다.
피로 낭자해 있을 곳으로 향하는 여자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교태 섞인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분명 현장을 봤을 터임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세르기는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 황제의 총애를 차지한 애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세르기는 미간을 좁히며 사라지는 밝은 갈색 머리를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
춥다.
다프네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얄팍한 숨을 터트리자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끝내 깊은 수마에서 깨어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다프네는 놀라는 기색 없이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에드먼이다.
에드먼은 또다시 다프네의 방을 찾아왔다. 어제와는 다르게 에드먼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숨긴 채 다프네를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불을 끌어 내린 다프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드먼.”
“…….”
“내 말 들리죠?”
다프네는 시린 방바닥 위를 맨발로 걸어갔다. 에드먼이 있는 어둠 앞으로.
더욱 선명해진 눈동자가 보인다.
이 때문에 그와 똑 닮은 데미안이 생각나는 건 당연했다.
“저를 대신할 게 생기지 않으셨습니까.”
데미안을 붙잡지 말고 변명하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떠날 텐데 데미안과 오해를 풀어서 무엇 할까. 데미안에게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실수를 반복한다.
다프네는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입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속으로 자조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안아 줘요.”
다프네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여긴 너무 춥고 외로워요.”
그래서 그런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아무 생각도 안 나도록, 날 안아 줘.”
허리를 휘감는 손길에 다프네는 눈을 감았다.
희미한 햇볕이 내리쬔다.
다프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마력석이 다 떨어진 것인지 방 안에는 한기가 돌았다. 다프네는 문가로 다가가 색이 바랜 마력석을 꺼냈다.
서랍을 열어 봤으나 이미 죽어 버린 마력석만 가득할 뿐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하….”
다프네는 결국 침대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갈증이 심했던 것인지, 그 후로도 주전자가 텅 빌 때까지 물을 마셨다.
다프네는 침대 위에 무릎을 세워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가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풍경은 아름답고 고요했다. 다프네는 결심했다.
‘…빨리 떠나자.’
하루빨리.
최대한 빨리.
그러기 위해서는 데미안이 입지를 단단히 굳혀야 한다. 그리고 가장 빠른 방법은 약혼이다.
에드먼이 거절했으나 다프네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몇 년 동안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다.
반대할 에드먼도 상황이 여의치 않고 다프네가 아는 데미안이라면, 분명 약혼을 거절하지 않을 거다.
이미 잠이 달아난 다프네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서랍에서 깃펜과 종이를 꺼냈다.
그것도 잠시, 하지만 귀족들은 쓰지 않는 싸구려 재질의 종이를 보고 멈칫했다. 종이를 서랍에 쑤셔 넣은 다프네는 이내 옷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 된다고?”
“예.”
“종이가 부족한가?”
시종장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침부터 마님의 얼굴을 보는 것도 불쾌한데 대뜸 마력석과 종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부족하진 않지만 아껴서 나쁠 게 없지 않습니까.”
시종장이 내민 것은 다프네가 원래 쓰던, 평민들이 쓰는 싼값의 종이였다.
“마님께서는 안주인이시죠. 그러니 아랫것들에게 마땅한 모범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마님께서 이렇다 할 일들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다프네는 아무런 말 없이 시종장을 보았다.
시종장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렇게 해도 마님께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무슨 소란이지?”
“소, 소공작님.”
갑작스러운 데미안의 등장에 시종장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버지가 일전에 내게 부탁하신 서류가 집무실에 있다. 열쇠가 여기 있나?”
“열쇠는 집사님께 있습니다.”
“그렇군.”
데미안은 다프네에게 한 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사라졌다.
“…자네의 뜻을 잘 알겠네.”
다프네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온 신경을 작은 인기척에 집중했다.
데미안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발소리가 멀어지고, 사라졌다.
‘후.’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바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데미안은 창백한 다프네의 안색을 뒤늦게 떠올렸다.
‘푹 쉬라고 했는데 뭘 그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예전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면 이렇게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데미안은 벤자민에게 들러 열쇠를 얻은 후 에드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책상에서 찾던 서류를 발견하고 집으려던 찰나, 휘갈겨 쓴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머니?’
데미안은 다프네의 글씨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다프네와 에드먼의 집무실은 아무런 연관도 없을 텐데.
의아해하던 데미안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며칠 전, 요한의 아침 일정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오늘도 또….’
다름 아닌 에드먼의 방 자물쇠 검사였다.
요한은 산산이 조각나 바닥을 나뒹구는 자물쇠를 주웠다.
오러가 아니라 단순히 힘으로 끊어진 것이다. 방대한 오러가 바로 문 하나를 두고 넘실거리니 이 근처에 오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끼고 어지러움이 일어났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이곳에 얼씬거리지도 않으므로 자물쇠를 이렇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에드먼이다.
하지만 의아한 점은 결계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것이다. 에드먼의 오러와 충돌한 흔적도 없이 깔끔하다.
요한은 굳게 닫힌 방문을 응시하다가 새로운 자물쇠를 꺼내 걸었다. 에드먼이 이성을 잘 유지하겠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대마법사님께 또 연락을 해 봐야겠군.’
이제와는 다른 경우가 발생하니 불안함은 극에 다다랐다.
대마법사는 다섯의 영웅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인물로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어 아주 오래전부터 노화가 멈춘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리고 동시에 에드먼의 폭주를 막을 유일한 존재다.
요한에게는 전자의 사실보다 후자가 더 중요했다.
대마법사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에드먼의 오러가 소량 담긴 마력석을 가끔 대가로 받으며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요한 님,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을 찾았다며 수하가 요한을 찾아왔다.
아무리 에드먼이 근 한 달 동안 몇 배의 서류를 처리했다고 해도 공백이 며칠 생기자마자 요한의 일거리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럴 시간도 없다.
“어서 가지.”
집무실로 향하려던 찰나, 낯선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걸음을 멈추고 창가로 다가갔다. 요한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 이제 막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요한은 곧바로 벤자민에게 향했다.
바쁘게 돌아다닌 벤자민은 곧 진실을 알아 왔다.
“마님의 초대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님…?”
요한은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초대받은 이가 소벨 후작 영애라는 것을 듣자마자 다프네의 속셈을 깨달았다.
요한은 다프네를 찾아갔다.
“…마님.”
응접실에 앉아 있던 다프네는 요한의 등장에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데. 왜요?”
“그걸 지금….”
요한은 터져 나오려는 말을 꾹꾹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마님은 마님이다. 최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마님이 더 잘 아실….”
“에드먼이 내게 부탁했어요.”
다프네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한 이의 이름이 나왔다.
“그러니까 따지려거든 에드먼에게 가서 직접 따져요.”
요한은 입을 달싹였다.
각하가 마님에게 이 일을 부탁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 없이 다프네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에드먼에게 확인받아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에드먼을 만날 수 없다.
“나가 줘요. 곧 영애가 올 거라서요.”
요한은 결국 응접실을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벨 후작 영애가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지, 요한은 안경을 벗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
그때, 누군가 나타났다.
***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소벨 후작의 외동딸, 레이첼은 사랑스러운 외향을 지녔다. 파릇파릇한 녹발과 옅은 갈색 눈이 특히나 그랬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허름한 양피지에 초대장을 적어 넣은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고작 반나절 만에 답장이 올 줄 몰랐어요.”
“윈터 공작가에서 온 초대장인데 시간 끌어 봤자 저만 손해죠.”
레이첼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프네는 그 뜻을 알아챘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까요? 전 부인께서 왜 저만 부르신 건지 알아요.”
레이첼은 사랑받고 자란 그 나이답게 당찼다.
“소공작님의 약혼녀로 절 점찍으신 거겠죠.”
다프네는 확실한 답 대신 침묵했다.
“사실 부인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을 때 놀랐어요. 아버지에게 듣기론 마님께서 홀대받는 위치라지요?”
다프네를 무시하는 게 전혀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하는, 그 어느 풍파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레이첼이 해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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