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반복되는 상황이다.
다프네는 자신을 붙잡고, 자신이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한다. 이 상황이 데미안은 미치도록 싫고, 참을 수 없었다.
다프네도, 그런 다프네에게 무력하게 붙잡히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도.
“축하드립니다. 이제는 피도 안 섞인 아들에게 억지로 선물을 주는 일 따윈 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데미안의 시선이 다프네의 납작한 배로 향했다.
“저를 대신할, 아니. 저는 되지도 못할 어머니의 든든한 방패가 생기셨잖습니까.”
“…….”
다프네의 크게 뜨인 눈에 데미안은 되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후계자여서. 제가 공작가를 물려받은 후 어머니께 불이익이라도 갈까 걱정하셨던 거 아닙니까.”
“데미안,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뭔가 오해를….”
“기대하겠습니다. 어머니가 낳은 제 동생이, 과연 제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지 없을지요.”
“데미안!”
다프네는 해쓱한 얼굴로 소리쳤다.
슈미즈를 꽉 쥔 다프네의 하얗게 질린 손이 떨리는 것을 데미안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보았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을 텐데 노력하는 다프네의 모습이 가상하다.
“데미안, 나는, 아이는….”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울컥. 막을 새도 없이 붉은 피가 다프네의 슈미즈를 적셨다.
데미안은 슈미즈에 묻은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피는 다프네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
데미안은 입을 달싹였고 다프네의 눈이 감기는 것과 동시에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
“괜찮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며칠 전에도 각혈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괜찮은 게 맞습니까?”
“아직 독성이 몸에 남아 있는 탓입니다. 푹 쉰다면 각혈하실 일도 없을 텐데….”
뉴벨 남작 부인은 도통 말을 듣지 않는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창백했다. 마른 몸도 그대로이고, 상황만 더 안 좋아져 있었다.
“그래도 큰일은 아닙니다. 더디지만 독성이 서서히 빠지고 있어요. 그러니 소공작님,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밤이 늦었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이 뒤돌자 우두커니 서 있는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은 그녀가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쉬세요. 아시겠죠? 제가 벤트에게 말을 해 놓고 가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이 나가고도 데미안의 발은 그 자리에 묶인 듯 꼼짝하지 않았다.데미안은 조용히 숨죽여 다프네에게 집중했다. 다프네의 숨결은 괜한 불안감을 일으킬 만큼 작고, 가늘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안도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숙였던 허리를 펴는 순간.
‘약?’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진 약병을 발견한 데미안이 그것을 주웠다.
다프네의 것이라 여기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려던 때였다.
“소공작님.”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벤트의 목소리에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약병을 품에 챙기고 말았다.
“소공작님?”
아차 싶었지만, 재차 반복되는 벤트의 부름에 결국 발길을 돌렸다.
“가시죠. 방까지 가겠습니다.”
“…아니, 집무실로 가자.”
벤트는 데미안을 따라 집무실로 갔다.
데미안은 세공한 마력석이 달린 검과 떨어진 물건을 상자에 담아 벤트에게 건넸다.
“버려.”
“네?”
벤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걸 다요? 아니, 이 검을요?”
“그래.”
“이 마력석도요?”
“다 버려.”
단호한 데미안의 말에 벤트는 입을 쩍 벌렸다.
“소공작님. 그건….”
“벤트.”
데미안은 자신을 설득하려는 벤트의 말을 끊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이다. 그것들 다 전부 버려.”
“…알겠습니다.”
데미안의 모습에 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쉬십시오.”
벤트가 나가고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은 침실 대신 대련장으로 향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함이었는데, 가는 길에 그 장소로 오고 말았다.
“데미안!”
가녀린 몸으로 꽉 끌어안았던 그때의 기억과 느낌이 생생했다.
‘소름 끼쳐.’
불쾌한 감정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데미안은 속도를 높여 그곳을 최대한 빨리 지나쳤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드넓은 대련장, 데미안은 홀로 섰다.
검을 휘두르고, 휘둘렀다. 정해진 자세가 아니라 그저 검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데미안의 몸은 쉽게 지쳐 갔다.
머리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가 되고 난 후에야 데미안은 검을 내리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설원 위에서 숨을 헐떡이던 데미안은 자리에서 검을 짚고 일어났다.
이대로 침실로 간다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곧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데미안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빛을 받아 빛나는 작은 호수를 발견했다.
호수의 물은 용케 다 얼어 있지 않았다. 살얼음이 얇게 깔려 반짝이는 수면 위를 보던 데미안은 품 안에서 로켓을 꺼냈다.
그러나 열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것을 응시했다.
다프네의 그림이 담긴 로켓.
데미안은 그것을 든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후….”
그리고 옅은 한숨을 내쉰 후 던졌다.
살얼음이 쉽게 깨지면서 퐁당, 하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수면 위는 파동이 치고 있었고, 로켓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됐다.
이것이면 됐다.
다프네를 완전히 털어 냈다. 데미안은 점차 가라앉는 파동을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됐다.
이거면 됐다.
이것으로 되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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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무희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황제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술을 들이켰다.
“음악을 더 빠르게 연주하거라!”
흥이 오른 황제의 명에 황궁의 악사들은 고작 천한 무희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으나, 황제의 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악이 빨라질수록 무희들의 춤사위는 점점 빨라졌다. 절정 부분으로 다다르는 순간 긴장감도 점점 치솟았다.
음악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한 무희가 황제의 앞에서 멈췄다. 황제는 그 무희를 향해 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이리 오너라.”
“폐하.”
무희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에드워드 뒤가뜨 3세.
대륙의 나라 중 가장 거대하고 엄청난 병력을 자랑하는 강대국, 에르타그는 천족과 마족을 물리친 이들 중 하나인 검사가 세운 제국은 점점 인간의 욕망으로 뒤섞였고, 건국 당시의 찬란함 또한 사라졌다.
그것을 뜻하듯 100년 전부터 황금 같던 황족들의 머리카락은 점차 갈색으로 변했고, 아름다웠던 금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족들은 신력의 힘을 빌려 방대한 금액을 쏟아부으며 황금의 색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들은 화려함에 집착했다. 금발이나 금안을 가진 이들을 탐하여 자손에게 더 높은 확률로 찬란함을 물려주기 위해 발버둥 쳤다.
여러 업적을 세운 역대 황제들을 뒤로하고 욕망과 허영심만 가득한 이들이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현 황제, 에드워드는 후자에 속하는 황제였다.
매일 열리는 화려한 연회. 그의 침실을 드나드는 수많은 여인. 그리고 제대로 된 이름도 받지 못한 사생아들이 넘쳐 나는 황궁.
황제는 오늘도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한창 분위기가 물오른 그때. 수하가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흐음, 그가 날 찾아왔다고?”
“예.”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황제의 곁에서 술잔을 채우던 무희만 남겨 두고 연회장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제국의 찬란한 황금을 만나 뵙습니다.”
“그래, 세르기. 오랜만이군.”
황제를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세르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세르기가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실상은 다르다.
블레드 후작이 반역에 가담한 증거를 황제에게 흘린 것이 세르기다.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 황제는 그런 자신과 닮은 세르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마치 젊었을 적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에 세르기를 떠올리면 혈기 왕성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르기의 말이 이어질수록 황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침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이냐.”
“예. 윈터 공작의 검은 오러에 닿은 마물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고 합니다.”
“재라니….”
“제가 우연히 경매장에서 발견한 ‘기억의 기록’ 제1장에 적힌 말이 있습니다.”
<기억의 기록>이란 이름 모를 이가 상세히 적은 다섯 명의 영웅에 대한 책이다.
제국의 황제가 그것을 대대로 물려받고 관리하였지만 50년 전, 나라의 주인이 뒤바뀔 뻔한 반역 후로 책은 실종되어 이따금 종이 쪼가리가 한두 개만 발견될 뿐이었다.
“대예언자가 남긴 말입니다.”
황제는 세르기가 내민 종이를 조급하게 받았다.
“‘검은 재가 황궁으로 불태울 것이고 검은 재가 황족들의 씨를 말릴 것이다.’….”
검은 재.
그리고 윈터 공작의 오러에 닿자 검은 재로 변한 괴물.
검은 재는 다름 아닌 윈터 공작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이런….! 당장 윈터 공작을 반역죄로 체포해라!”
황제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언제나 자신을 낮잡아 보는 그 시건방진 놈이 기어코 나를 죽이는구나!
“폐하,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세르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를 진정시켰다.
“현재 윈터 공작은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을뿐더러 현재 제국민들에겐 아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럼 뭐 어쩌란 말이냐! 윈터 공작이 나를 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흥분한 황제와 달리 침착한 세르기는 그를 조곤조곤 타일렀다.
“죄야 만들면 되지요. 사냥 대회 날, 갑자기 참여한 윈터 공작, 그런데 모든 걸 재로 만드는 오러를 내뿜으며 날뛰기 시작, 폐하께서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윈터 공작의 목을 베었다….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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