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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36화 (36/145)

36화

다프네가 에드먼에게 물은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물었던 것을 겨우 입 밖으로 꺼냈다.

다프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힘겹게 에드먼을 밀어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체격 차이를 결단코 무시할 수 없는지라 다프네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몸의 반 정도만 깔려서 다행이지 제대로 깔렸다면 아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정신을 잃은 에드먼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다프네는 우연히 손을 보았다.

‘피.’

다프네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다가 에드먼을 돌아보았다.

다급히 에드먼의 몸을 뒤집고 그의 상체를 더듬거렸다. 어깨를 만진 순간, 축축했다.

서둘러 셔츠를 끌어 내리자 터진 상처에서 피가 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이건….”

“다프네!”

그가 날아오는 단검에 그녀를 감싸 안았을 때 생긴 상처였다.

***

“오늘따라 조금 으스스하지 않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매년 이맘때쯤이면 이랬잖아.”

“아, 벌써 그때가 왔구나.”

하녀들은 저택의 가라앉은 온기에 이상함을 품지 않았다. 이맘때쯤 저택이 한층 더 추워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말 시작됐구나.”

하녀들의 대화 소리를 들은 데미안은 자리에서 우뚝 멈춘 채 중얼거렸다.

“예, 시간 한번 참 빠릅니다.”

데미안의 뒤에 있던 벤트도 덧붙였다.

어젯밤, 에드먼의 그날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부디 짧았으면 좋겠습니다. 작년에는 한 달 하고도 이틀이었죠.”

언제나 그렇듯 저택이 어수선하든 말든 데미안의 일과는 똑같이 흘러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에드먼이 안정을 취할 때까지 후계자 수업이 잠시 중단되고 자유 시간으로 교체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과의 반이 후계자 수업이었던 데미안의 시간이 텅 비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데미안은 많은 일을 했다.

오늘은 대련이었다.

“도련님, 수고하셨습니다.”

벤트는 근육통 때문에 다리를 절뚝이고 다녔기에 오늘도 대련 상대는 크리스가 되었다.

“수고했어.”

데미안은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그런데 마지막 기술 말입니다. 각하께서 알려 주신 겁니까?”

크리스는 거의 검을 떨어트릴 뻔했던 데미안의 마지막 기술을 언급했다. 에드먼이 주로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로 매우 단순하고 짧은 움직임이지만, 이에 필요한 힘과 집중력이 크게 소모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쉽게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어깨너머로 본 거야. 아버지는 아직 나를 가르쳐 주시지 않잖아.”

그러니 데미안의 말에 크리스가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제대로 배운 적 없는 기술에 그대로 당한 크리스는 시큰거리는 손목을 문질렀다.

“크리스.”

데미안은 검을 내려 보았다.

“오러 각성을 빨리하는 방법이 있을까.”

오러 각성은 검사에게 오러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몸에 열이 오르고 며칠 동안 앓는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

힘이 강할수록 오래 앓는다. 보통 오러 각성은 스무 살 전후로 나타나는데 에드먼은 고작 열 살의 나이로 반나절 정도 걸렸다.

그래서 모두가 에드먼의 오러가 별 볼 일 없으니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에드먼은 그저 본래 있던 규칙을 깨고 재창조하는 무법자다.

“현재 소공작님은 결단코 늦은 게 아닙니다.”

“나도 알아.”

데미안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저 빨리 오러를 각성하고… 후계자 자리를 오로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데미안이 모든 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잘 아는 크리스의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제가 꼭 알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가 대련장을 떠나고 데미안이 홀로 남아 훈련을 하던 와중이었다.

“소공작님!”

벤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혹시 에드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설까, 데미안은 바짝 긴장했다.

“무슨 일이야.”

“세공된 마력석이 왔습니다!”

“…그래.”

“정말 빠르지 않습니까? 소공작님의 이름을 좀 들먹이긴 했는데 이렇게 빠르게 세공될 줄이야.”

벤트는 품에서 상자를 꺼내 열었다.

마력석은 낯선 장신구로 세공되어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제가 직접 디자인한 장신구입니다. 검에 두르는 형식입니다.”

“검?”

데미안은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렸다.

빛의 각도에 따라 오묘하고도 다채롭게 빛내는 마력석과 투박한 제 검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거 말고요.”

“무슨 검?”

“이번에 선물 받으신 거 말입니다. 마님께서 주신 것 같다는 그 검.”

대련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데미안은 멍하니 보는 것도 잠시 손을 뻗었다.

벤트의 예감은 적중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이지만 중간중간 회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검과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장신구의 조합은 실로 아름다웠다.

외향뿐만 아니라 장신구로 세공한 마력석에 오러를 넣으면 검을 사용할 때 마력석에 있는 오러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 이유로 착용해 놓은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데미안은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어보자.’

확실히 하자고 결단을 내린 데미안은 곧바로 다프네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

문을 두들기며 다프네를 불렀다.

“…데미안?”

“들어가겠습니다.”

데미안이 그대로 문을 열자방 안에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침대에 기댄 다프네가 있었다.

데미안이 검을 내밂과 동시에 다프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려 왔다.

“이 검, 어머니가 보낸 게 맞습니까?”

데미안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프네는 에드먼이 내민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대답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 데미안의 앞에 섰다.

“대답, 해 주십시오.”

데미안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곧 진실을 마주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코앞까지 다가온 진실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

“데미안. 나는….”

다프네가 변명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데미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데미안은 곧바로 다프네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데미안!”

데미안의 무자비한 힘에 다프네는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하고 끌려갔다.

처음에는 멈추려고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프네는 데미안의 빠른 속도에 맞춰서 걷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데미안을 따라잡는 건, 더군다나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아....!”

중간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티던 다프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히 데미안이 다프네를 꽉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다.

데미안은 뒤를 돌았고 다프네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다프네가 입술을 달싹거리던 찰나, 데미안은 다시금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전보다 눈에 띄게 느려진 걸음이었으나 다프네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헐레벌떡 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다시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데미안의 방이었다.

마침내 데미안이 손을 놓자 다프네는 시큰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때, 다프네를 방 한가운데에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데미안이 나타났다.

다프네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일 새도 없이 데미안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물건, 어머니가 보낸 것이 맞습니까?”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한 다프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데미안은 다프네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데미안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다프네를 보며, 화를 쏟아 내지도, 분노의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건지.

“데미안, 내 말 좀 들어 주렴.”

“그동안 좋으셨습니까?”

데미안은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자신이 평소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던 물건들로 한가득하였다. 그중 다프네의 앞에서 사용한 물건도 적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 모습을 보면서, 좋으셨습니까.”

속이 울렁거린다. 데미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 만족하시겠죠.”

충분하겠지.

데미안은 상자를 그대로 떨궜다.

상자 안에서 물건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다프네와 데미안의 사이로, 그들의 발치에 물건이 쌓였다.

“본래 어머니의 것이니 가져가세요.”

데미안은 다프네를 스쳐 지났다.

“아니면 버리든가.”

말을 내뱉은 직후, 데미안은 다프네의 멍한 눈과 마주했다.

데미안은 문득 자신이 한심해졌다. 다프네는 그저 위선자에다가 기만자일 뿐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다프네의 그림을 로켓에 담아 둘 정도로 기다리고 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다프네는 발치에 뒹구는 것들을 보다가 데미안이 지나치자 번뜩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 그게 아니야.”

다프네는 급한 마음에 데미안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너무나도 쉽게 쳐 낼 수 있는 약한 힘이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늪에 빠진 듯 꼼짝하지 못했다. 그건 붙잡힌 소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이렇게 또 어머니에게, 이 여자에게 휘말리게 된다.

“난,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그럼.”

한숨을 삼킨 데미안은 뒤돌았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절 축하하기 위해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어머니가?”

“나는….”

다프네의 동공은 하염없이 떨렸다. 그 떨림이 그에게도 전해졌기에 데미안은 불쾌했다.

고작 이런 약한 척으로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다면 다프네는 실패했다. 자신은 이제 그 어리숙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우습다.

언제까지 피해자인 척, 약자인 척 위선이나 떨 생각인지.

탓! 일부러 거칠게 소매를 떨구자 다프네의 마른 어깨가 흠칫했다.

“예전처럼 저택에서도 마주치는 일 없으면 좋겠습니다.”

데미안은 최대한 낮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그리고 다프네가 잡았던 소매를 툭, 툭 털었다.

“이렇게 허락 없이 손에 몸을 대는 일도요.”

데미안이 방을 나서려는 것을 알아챈 다프네는 떨궜던 손을 다급히 뻗었다.

그러나 곧 그가 한 말이 떠올랐기에 닿기 직전, 멈췄다. 다프네는 서둘러 말을 쏟아 냈다.

“데미안. 난 너를 기만하려던 게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 정말로….”

“그럼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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