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미 안나를 돌려보낸 후다. 이렇게까지 늦은 시간에 다프네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요한이 있었다.
“요한?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부인. 지금 가 주셔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답지 않게 다급했다.
“각하가….”
순간 요한의 시선이 뉴벨 남작 부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다프네가 있는 곳이다.
요한은 말을 삼켰고, 뉴벨 남작 부인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으며, 다프네는 옷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마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과 요한이 급히 사라지고 다프네는 홀로 남았다.
각하가….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을 빠르게 살피던 눈이 떠올랐다.
다프네는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네 개의 붉은 반달 자국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익숙한 취급이다. 밥 먹듯이, 아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건 손에 꼽을 정도이니 밥 먹듯이 말고 숨 쉬듯 받았던 취급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던 다프네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쉬어야 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어제 무리하여 에드먼을 찾아간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기어코 다시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 다프네가 창가로 향했다. 그 순간 온몸을 가시처럼 찌르는 고통이 덮쳐 왔다.
“윽.”
다프네는 신음을 흘리며 가슴께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다가 벽을 짚었다.
아주 찰나에 불과했으나 다프네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다프네는 거친 숨을 헐떡이는 것도 잠시,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다프네를 스쳐 방으로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시린 바람에 다프네는 숨을 느리게 내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에드먼의 집무실과 침실이 한눈에 보였다.
다프네는 조금 전의 고통을 떠올렸다.
‘…시작됐구나.’
드디어 시작됐다.
“각하의 공격을 받은 흔적은 없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의 말에 요한은 안도했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갈무리되지 못한 각하의 오러에 노출된 탓에 내상이 조금 있긴 합니다.”
검은 기사단의 기사이니 이 정도로 버틴 것이지 일반 기사였다면 심각한 내상으로 남아 한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한 달 동안 꾸준히 약을 먹으면 충분히 나을 정도입니다.”
“다행입니다.”
정신을 잃은 기사 다섯의 진찰을 끝낸 뉴벨 남작 부인은 머뭇거렸다.
“각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언제나 같으시지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기 전까지 그가 단단히 일러둔 말이다.
“집사님.”
벤자민이 알렉과 들어왔다.
둘 다 손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설마….”
요한의 눈이 크게 떠지자 알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문을 잠그는 와중에 문틈으로 오러가 새어 나왔습니다.”
“마법은요?”
“했습니다.”
에드먼은 현재 오러를 스스로 다스릴 수 없다.
이 때문에 대마법사의 결계 마법이 걸린 방 안에서 홀로 지내면서 오러가 진정될 때까지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벤자민은 뉴벨 남작이 치료 중인 손끝을 바라보았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손끝이 화끈거렸다.
“각하의 오러가….”
“맞네.”
뉴벨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5년 만에 에드먼의 오러를 느낀 벤자민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오러가 더 강해졌다.
“역시 맞았군요.”
벤자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부디 큰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긴 인내의 시간이 이제 시작되었다.
다프네는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으나 결단코 좋은 꿈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등 뒤가 식은땀으로 젖어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다프네는 상체만 일으킨 채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상태로 침대 옆, 작은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안나가 매일 여기에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와 잔을 두고 간다.
오늘따라 멀리 있는 것인지 한참을 더듬거려도 잔이 잡히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뜨거운 것이 닿았다. 다급히 손을 뗐으나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 전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숨을 내쉰 다프네는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그러나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은 몸은 깨진 잔의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을 바닥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픔 대신 누군가의 단단한 품과 제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느껴졌다.
“…조심.”
귓가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다프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에드먼이다.
어지럽다.
깊은 심연 속에 갇힌 에드먼은 허우적거렸다. 손발을 움직여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에드먼도 알고 있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다.
에드먼은 숨을 참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모든 숨을 멈추자 고통이 그를 옭아맸다.
그 고통이 점점 짙어지면서 참을 수 없으려던 지정까지 오른 후, 에드먼은 눈을 뜨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느리게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검은 것이 가득 차올랐다. 빚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었다.
무언가 그의 손에 닿았다. 조각난 책상다리였다.
방에 들어와 정신을 잃기 전, 고통에 몸부림쳤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부서진 모양이다.
책상다리는 물론 에드먼의 방 안에는 성한 물건 하나 없었다. 다행히 결계 마법 덕분에 벽은 금 간 곳 없이 멀쩡했다.
에드먼은 폐허가 된 방바닥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변이 마물 세 마리와 싸움을 시작했다. 변이 마물은 일반 마물에 비해 훨씬 월등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상대하기 더 까다롭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일반인에게만, 그러니까 일반적이지 않은 에드먼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에드먼에게 일반 마물과 변이 마물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현재 에드먼은 평소와 달리 오러를 쓸 수 없다. 지금 사용하게 된다면 조절하지 못하고 폭주하게 된다.
맨몸이나 다름없이 변이 마물과 싸우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리 남겼을 때.
“각, 각하!”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에게 마물이 달려들었고, 에드먼은 오러를 사용했다.
한발 늦은 탓에 정신을 잃은 성기사는 그대로 마물에게 삼켜지는 것과 동시에 마물과 함께 재로 변했다.
곧바로 오러를 갈무리했으나 그 짧은 사이에 기사들은 혼절했다. 그리고 걸어서 저택에 도착한 후, 에드먼도 쓰러졌다.
에드먼은 바로 뒤에 있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두통이 조금 가라앉는 듯싶었다.
그는 문득 손에 걸린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희미하지만 낯선 내음이 그의 코를 스쳐 갔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의 침실에는 다프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에드먼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 당겼다.
다프네의 살 내음이 묻은 이불을 내려다보던 에드먼이 조금씩 이불에 가까이 고개를 숙인 순간, 가라앉았던 오러가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다.
에드먼은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앞이 흐릿해진다.
또다시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에드먼은 눈을 뜨려 했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눈은 완전히 감기고 암흑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은 눈을 떴다. 의아했다. 분명 심연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전혀 다른 곳이었다.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에드먼은 그제야 이곳이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비친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고 할 때.
“하…”
침대에 누워 있던 이가 옅은 한숨과 동시에 일어났다.
‘다프네.’
다프네였다.
에드먼은 다프네라는 것을 발견한 즉시 헛웃음을 지었다. 하다 하다 다프네마저 이 끔찍한 악몽 속에 나타나다니. 점점 그를 괴롭히는 방식이 발전하고 있었다.
오러는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다. 모두가 에드먼 같은 이들을 찬양했으나, 에드먼이 이것이 축복이 아닌 저주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힘은 에드먼의 정신을 좀 먹었다. 깊은 심연 속에 갇혀 있을 때면 에드먼의 오러에 죽은 것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원망의 말임이 틀림없는 것들을 내뱉으면서.
하지만 이런 괴롭힘은 새로웠고 전혀 반갑지 않았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머리를 쓸어 올리고 테이블로 손을 뻗는 것까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전부 눈에 담았다.
쨍그랑!
맑은 소리와 함께 주전자와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깨졌다. 멈칫하던 다프네가 이내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중심을 잃고 깨진 유리 조각이 가득한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에드먼이 손을 뻗은 건 그때였다.
“…조심.”
다프네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프네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에드먼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다프네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이리도 생생할 필요까지 있을까.’
이런 것까지 생생할 필요는 없는데.
“…그대가.”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 때문일까.
“싫다.”
마음속 깊은 진심을 내보였다.
“미치도록 싫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낯선 모습을 다프네로 인해 알아 가는 게 불쾌했다.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지면 편할까….”
중얼거리던 에드먼은 다프네가 없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 상황을 다시 겪을 바에는 차라리 눈앞에, 옆에 두는 게 나을 것 같다.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다프네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요.”
“알아.”
“언제부터요?
언제… 언제부터였을까….
에드먼은 기억을 되짚었다.
동시에 앞이 흐릿해졌다.
“그건….”
툭.
다프네는 힘이 풀려 쓰러지는 에드먼의 무게에 뒤로 밀려나면서 침대로 함께 쓰러졌다. 조심스레 그의 옷을 세게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에드먼이 분명하다. 이렇게 모진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을 잔인한 사람은 에드먼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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