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약혼하면 후계자의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잖아요. 외부 세력이 들어오는 게 아니니 폐하께서도 견제의 부담이 덜할 테고요.”
툭, 툭.
에드먼은 책상을 두들기며 다프네를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이혼도 빨라질 테고요.”
툭.
에드먼의 손이 멈추었다.
“아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이… 요?”
다프네의 눈이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데미안의 자리가 굳건해져도 아이는 낳으셔야죠.”
숄을 그러쥔 다프네의 손이 잘게 떨렸다.
치욕스럽다.
오로지 아이, 아이, 아이.
다프네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아이를 품은 것일 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프네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느리게 내뱉었다.
“걱정 마요.”
다프네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아이, 꼭 낳아 줄 거니까요.”
***
문을 열자마자 궐련 연기가 훅 끼쳤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뉴벨 남작은 걸음을 옮겼다.
“벌써 다 사용하신 겁니까.”
뉴벨 남작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은 궐련이었다.
“항상 남작 부인께 신세를 지는군.”
이 궐련을 만든 것은 약초에 능한 뉴벨 남작 부인이다.
“효과가 미미해지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저번보다 더 셀 겁니다.”
“그래.”
에드먼은 궐련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뉴벨 남작은 손에 힘을 주어 에드먼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각하. 이번 해만 들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에드먼이 궐련에 든 약 효과를 높이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치료 목적으로 복용한 것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것을 고려해도 지나칠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나도 안다.”
뉴벨 남작은 옅은 한숨과 함께 손을 뗐다.
에드먼은 궐련을 가져가 텅 빈 통 안에 채워 넣었다.
“들으셨겠지만 마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소량이지만 워낙 마르신지라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합니다.”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한 손 안에 들어오던 다프네의 마른 손목과 가는 허리를 떠올렸다.
뒤늦게 자각하고 얼굴이 굳어진 찰나.
“각하!”
요한은 급하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자 방 안에 있던 뉴벨 남작과 에드먼이 대화를 멈추었다.
“무슨 소란이냐.”
“성기사를 생포해 오던 이들이 마물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그럴 리가.”
뉴벨 남작은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물 토벌을 끝낸 지 이제 겨우 한 달이지 않나.”
“맞습니다. 마물들의 새끼라는데 그것이, 그 수가….”
“몇 마리냐.”
“그것이… 열이 넘어갑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을 준비해.”
“각하.”
요한은 에드먼을 불렀으나, 차마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요한도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큰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마물 토벌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소란 피워 봤자 손해야.”
검은 기사단을 보내면 될 문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발각될 확률이 높다. 에드먼 홀로 가는 것이 맞는 선택지다.
요한은 말에 오르는 에드먼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절대… 절대 오러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에드먼은 성 밖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마기 냄새가 풍겼다. 에드먼은 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검은 기사단의 기사 다섯이 마물과 싸우고 있었다. 에드먼은 말에서 뛰어내려 마물을 반으로 갈랐다.
끼에에엑!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 마물이 쓰러지고, 다친 팔을 움켜쥔 기사가 에드먼을 발견했다.
“각하…!”
기사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뒤로 물러나 있어.”
다친 기사를 뒤로하고 에드먼은 하나하나 베어 나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물의 사체가 나뒹구는 설원 속, 그 피를 뒤집어쓴 에드먼은 홀로 우뚝 섰다.
다섯 모두 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었으나 큰 부상은 없었다.
“각하!”
“저게 성기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검을 털어 마물의 살점을 떨군 에드먼은 우두커니 놓인 자루를 열었다.
재갈은 반쯤 풀어져 있었다.
힘줄을 끊은 탓인지 성기사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미세하게 들썩이는 어깨가 아니었다면 시체로 착각할 만큼.
“마물을 언제 맞닥뜨린 거지?”
“성기사가 탈수로 죽지 않게 잠시 재갈을 풀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재갈이 엉성하게 묶여 있던 모양이다.
“다시 묶어라.”
“예.”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 중 하나가 성기사에게 다가갔을 때, 성기사가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잡았을 때부터 저러는데, 통 무슨 언어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성기사는 갑자기 발작하며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사가 제압하려고 했으나 성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에드먼이 한 발짝 움직인 그때.
끼에에엑!
저 멀리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에드먼은 검을 고쳐 쥐었다.
“…변이 마물이다.”
변이 마물이 나타났다.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말을 꺼낸 이는 요한이었다.
요한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된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요한을 막던 뉴벨 남작은 피우던 궐련을 재떨이 위에 지졌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남작님, 현재 밖의 상황을 좀 보십시오.”
요한은 창밖을 가리켰다.
저녁이 되자 눈보라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금방 그칠 것으로 보이는 눈보라였으나 상황이 좋지 않다.
마물의 수가 많고, 부상자까지 있을 텐데 이 눈보라를 뚫고 오는 게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하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다.”
에드먼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만약의 상황까지 대비해 다른 명령을 내렸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저도 잘 압니다.”
“요한.”
“저도 평소라면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각하의 상태는 불안정하십니다.”
오러를 쓰면 위험하다는 것을 에드먼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오러를 쓰게 되면 분명 그 자리에서 폭주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에드먼이 오러를 숨긴 이유가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요한, 정신 똑바로 차리게. 자네가 이렇게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돼.”
뉴벨 남작은 요한을 진정시켰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각한 요한은 낮게 침음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각하는 괜찮을 걸세. 분명.”
그렇게 말하는 뉴벨 남작의 속도 실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에드먼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봐 온 뉴벨 남작은 알 수 있었다. 에드먼의 폭주는 해가 지날수록 점점 난폭해지고 있다.
에드먼이 그만큼 더 세졌기에 오러도 마찬가지로 방대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성장이다.
예전에는 검은 기사단 모두가 달려들면 아주 잠시나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때 에드먼을 기절시키거나 결박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그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대마법사의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
“대마법사님은? 연락은 해 보았나?”
“이미 몇 달 전에 했습니다. 하지만 저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이라 대마법사님이 과연 올해는 일어나실 수 있을지….”
뉴벨 남작은 한숨 대신 궐련 연기를 내뱉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침묵이 길어질수록 재떨이 위에 궐련과 재는 점점 쌓여만 갔다.
마침내 붉은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벽이 되었을 무렵.
재떨이가 빈틈없이 가득 찼을 때, 창가를 서성거리던 요한은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유심히 살폈다.
눈보라 사이로 검은 점이 희미하게 보였다.
쏟아지는 눈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으나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요한은 뒤돌고 외쳤다.
“남작님!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뉴벨 남작과 요한은 다급히 밖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더 거세진 눈을 뚫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과 마주했다.
말 다섯 필이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각각 사람이 하나씩 엎어져 있었다.
에드먼은 선두에 있는 말을 이끌고 이 눈보라 속을 걸어온 것이다.
“각하, 괜찮으….”
요한은 나오는 와중에 챙긴 두꺼운 외투를 에드먼의 어깨에 덮으려 했다.
그러나 에드먼이 손을 들어 올려 행동을 저지하는 것이 더 빨랐다.
에드먼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각하!”
말을 마친 에드먼이 쓰러지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얼핏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각혈하셨다고요.”
그 말에 시선을 돌리자 뉴벨 남작 부인이 있었다. 다프네는 진찰을 위해 올렸던 소매를 내렸다.
“하녀 아이가 놀라 그대에게 연락을 넣은 모양이야. 별일 아니네.”
잔기침하다가 약간의 피를 토해 냈다. 독을 먹고 각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안나가 그것을 발견하고 뉴벨 남작 부인에게 연락을 취하고 말았다.
“늦은 밤에 미안하게 됐네.”
“괜찮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제 일입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몇 가지 약을 챙겼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이 약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현재 마님에게 좋지 못한 약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다프네는 약을 바라보다가 뉴벨 남작 부인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고맙네.”
다프네는 약을 따로 챙겼다.
‘언제 안 거지?’
혹여 다른 이들도 아는 건 아닐까, 다프네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밖에 모릅니다.”
그런 다프네의 생각을 읽은 듯 뉴벨 남작 부인은 작게 속삭였다.
다프네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진료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에게 말하였는가.”
뉴벨 남작 부인은 자신의 말을 회피하던 에드먼이 떠올랐다.
그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한참을 고민해 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할 것인가?”
“아닙니다.”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다프네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뉴벨 남작 부인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른 몸. 그 위를 덮은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 늪을 연상케 하는 녹색 눈동자.
다프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가벼운 거짓말도 아니고 무려 아이를 가졌다는, 무게가 다른 거짓이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도대체 다프네가 왜 그러는지 영영 알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다프네의 거짓말에 밝혀지는 것은 왠지 꺼려졌기에 임산부에게 좋지 않다고 알려진 약을 몰래 챙겨 주었다.
“현재 마님께서는 너무 마르셨습니다. 잘 먹고 푹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도 받으시면 안 됩니다.”
“알겠네.”
진찰을 위해 가져온 물건을 정리하려던 그때, 누군가 조급하게 문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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