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게 무엇이죠?”
소피아는 에드먼이 내민 것을 집었다.
쪽지였다.
“대모님께서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린다가 자살하기 직전 작성한 쪽지를 보던 소피아는 무심한 얼굴로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거네요. 아, 이게 자살했다는 시녀가 남긴 건가요?”
“대모님.”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땐 공작가를 책임지셨던 분이니 예의를 갖춰 말씀드리는 겁니다.”
“…….”
“이만 돌아가십시오.”
“각하.”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동이 트기 전 떠나십시오.”
소피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숄을 쥔 소피아의 손에까지 그 떨림이 전해지고, 에드먼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다 공작가를 위해서였습니다.”
더는 듣기 싫은 이유다.
“마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윈터가와 어울리지 않아요, 각하. 제가 각하의 마음에 들 영애를 데려오겠습니다. 혈통도 좋고 기품 있고 아름다운….”
에드먼은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언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안타까워하지도, 조롱하지도 않은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었다.
“…다 마님의 부탁이었습니다.”
에드먼이 우뚝 멈추었다.
소피아가 말하는 마님은 다프네가 아니었다. 에드먼의 친모, 전대 공작 부인이었다.
“좋은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는 게 마님의 소원 중 하나셨습니다. 마님께서 얼마나 각하를 사랑하셨는데요. 각하, 제 말 믿으시죠?”
사랑.
이 얼마나 아름답게 포장된 끔찍한 단어인가.
“모든 건 각하를 위해서….!”
에드먼은 소피아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닫았다.
바로 옆에는 요한이 있었다.
“대모님의 짐 정리를 도와드려.”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요한이 방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문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에드먼은 텅 빈 복도를 거닐었다.
“마님께서 얼마나 각하를 사랑하셨는데요.”
에드먼은 미간을 좁혔다.
그가 향한 곳은 다프네의 방이었다.
고요한 방 안으로 오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에드먼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 아래, 다프네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드먼은 손을 뻗었다.
움찔.
다프네의 눈이 느리게 떠졌다.
“…에드먼?”
다프네는 잠긴 목소리로 에드먼을 불렀다. 에드먼은 흠칫 놀라며 뻗었던 손을 거두려고 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탓인지 다프네는 몽롱한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점차 깜빡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다프네의 눈은 점점 감겼다.
에드먼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동이 트고 나서야 방을 나왔다.
***
“마님이 데려온 시녀가 자살했답니다.”
“…마린다?”
데미안은 벤트의 말에 기억 속에서 이름을 끄집어냈다.
“네. 그 시녀요.”
“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쪽지까지 남기고 자살했답니다.”
하루아침에 멀쩡한 이가 자살했다. 게다가 어제 새벽, 소피아의 병세가 악화되어 급하게 남부로 향했다고 한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 탓에 저택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데미안의 하루는 똑같이 흘러간다.
“소벨 후작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데미안은 벤트에게 받은 편지를 뜯어 내용을 훑어보았다. 구구절절한 말을 걷어 낸 본론은 자신의 딸과 티타임을 가질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표정이 왜 그러는데?”
데미안은 벤트의 떨떠름한 얼굴을 발견했다.
“정말로 소벨 후작 영애와 결혼하실 생각입니까?”
“나쁘지 않은 상대지.”
“그건 그렇지요.”
데미안은 답변을 위해 깃펜을 들었으나 이내 종이에 아무런 말도 적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도대체 왜?”
“각하께는 말씀드리셨습니까?”
“천천히 말씀드려도 돼. 다른 상대를 생각해 놓으셨다면 이미 내게 언질을 주셨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편지를 다 쓴 데미안은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내가 어제 부탁한 일은?”
“아, 여기 있습니다.”
벤트는 서류를 내밀었다.
“그나저나 그라운 남작을 왜 조사하라고 하신 겁니까?”
데미안은 벤트에게 그라운 남작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그의 인적 사항부터 약점까지.
“그냥….”
“전 이때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들 내기 기억하시죠? 그때 나왔던 가장 긴 예상 기간이 고작 2년이었는데 5년이나 버티셨죠. 뭐, 밤 기술이라도 좋으신지.”
“할 일이 좀 있어서.”
눈치 빠른 벤트는 그라운 남작이 뭔가 큰 잘못을 했을 것이라 여겼다.
“이만 수업 들으러 가시죠.”
다음 일정인 후계자 수업을 위해 집무실을 나온 데미안은 코끝을 스치는 약초 냄새를 맡았다.
“…의원?”
저택에 의원이 있나?
에드먼이나 데미안은 아픈 일이 없었기에 저택에는 따로 주치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저택에서 약초 냄새가 나는 건 굉장히 낯설었다.
“소공작님? 어디 가십니까?”
데미안은 점점 약초 냄새가 짙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수록 불안감에 휩싸인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데미안의 감은 적중했다. 약초는 다프네의 방에서 나는 것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원인 뉴벨 남작 부인과 다프네였다.
“마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습니까?”
“괜찮네.”
“다행히 독이 소량인지라 후유증은 적게 남을 겁니다.”
‘독?’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ㅎㅂㄹㄱ.공금
“소공작님.”
“…….”
“소공작님?”
두 번째 부름이 있고 나서야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보였다. 데미안의 후계자 수업을 책임지는 뉴벨 남작이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아….”
뉴벨 남작은 데미안이 수업 시간 내내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를 막지 않은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필기하는 손과 수업의 내용을 그대로 입력하는 비상한 머리 때문이다. 수업한 내용에 대해 무슨 질문을 해도 데미안은 다 대답했다.
가끔은 에드먼의 어릴 적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데미안은 방을 나서기 전 멈췄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뉴벨 남작은 잠시 고민했다. 에드먼이 따로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후계자인 데미안도 알 권리가 있었다.
“상성이 맞지 않은 음식을 드신 게 독이 되어 가벼운 각혈을 하셨습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데미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데미안은 가만히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쿵쿵, 뛰는 심장은 평소보다 더 빨랐다.
내가 왜 이러지?
‘어머니가 걱정돼서?’
내가, 그 여자를?
데미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연스레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목걸이의 존재가 확연히 느껴졌다.
지금 네가 걱정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되새겨 보라며, 중얼거렸다.
데미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
“많이 나으셨습니다.”
에드먼이 셔츠 단추를 채우는 동안 벤자민은 빈 술병과 헝겊을 정리했다.
“그래도 정말 의원에게 보이지 않으실 겁니까? 흉터가 남으실 텐데요.”
“어차피 흉터는 많아.”
셔츠를 두어 개만 풀어도 가슴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보인다. 어깨의 흉터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다.
“팔뚝은 잘 치료하고 계시지요?”
“…그래.”
에드먼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기에 벤자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멍 정도의 상처는 에드먼에게 별거 아니다.
에드먼은 가히 괴물 같은 회복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어깨에 난 상처만 해도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무는 속도가 빨랐다.
“아, 마님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쌓인 서류를 집는 애드먼의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벤자민이 눈치챌 틈도 없이 다시 움직였다.
“안 가 보시렵니까?”
“…….”
“각하. 마님은 각하의 아이를 가지신 분입니다. 홑몸도 아니신데 각혈까지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한결같은 에드먼의 모습에 벤자민은 한숨을 삼켰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이제 정말 며칠만 지나면 다 나으실 테니 제발 몸 좀 쓰지 마십시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벤자민은 곧장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서류를 보던 에드먼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오른팔이었다. 에드먼은 셔츠를 걷었다. 에드먼의 오른팔은 오래전 생긴 흉터 몇 개를 제외하면 깨끗했다.
분명 날아오는 검을 튕겨 냈다. 그러나 상처는커녕 아무런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수하 중 한 명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들어온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다프네?”
창백한 얼굴을 한 다프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에드먼은 눈을 깜빡였다.
“할 말이 있어서요.”
다프네는 종이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가신 가문 중 몇 명의 이름이 적인 종이였다.
“이게 뭡니까?”
“데미안 또래의 여식이 있는 가문이에요.”
에드먼은 고개를 들어 올려 다프네를 보았다.
“굳이 외부 세력과 합치는 것보다는 가신 가문에서 뽑는 게 후계자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 것 같아서요.”
“…데미안을 약혼시키려는 겁니까?”
“네.”
“아직 어립니다.”
“이때쯤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요.”
다프네는 숄을 끌어 올렸다. 아직 몸을 움직이는 게 버거운지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다프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계약 결혼보다는 정략결혼이 나을 테니까요.”
에드먼은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훑었다. 어떻게 안 것인지 몰라도 정말이지 딱 데미안 또래의 여식이 있는 가문들이었다.
“당신이 알아서 골라요.”
“…다프네.”
몸을 뒤돌려던 다프네가 멈추고, 에드먼의 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책상 위로 재가 쏟아졌다.
종이였다.
당황한 다프네는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데미안을 지금 약혼시킬 생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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