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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32화 (32/145)

32화

붕대와 헝겊을 정리하던 벤자민은 문득 에드먼을 보았다.

“각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

“장부 말입니다. 안주인이 맡아서 보는 장부. 누군가 그걸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아무래도 그간 마님께서 남몰래 장부 관리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순 없지만, 짐작은 갔다. 벤자민은 머뭇거렸다.

“마님께서 안주인의 장부를 맡으신 적 있습니까?”

“없다.”

단호한 대답에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에드먼은 벤자민을 뒤로하고 만찬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식당 앞에 있던 사용인들은 느슨하게 서 있다가 에드먼을 발견하고는 허둥지둥 정자세를 했다.

에드먼의 등장을 안에 있는 가신과 소피아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에드먼이 이를 막았다. 그리고 반쯤 열린 문에 손을 집어넣고 열었다.

“그래서 제가…. 각, 각하?!”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황급히 일어났다.

에드먼의 시선은 상석에 앉은 소피아의 맞은편에 서 있는 다프네에게 박혔다.

다프네는 서 있었다. 의자 없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각하.”

소피아는 서둘러 에드먼에게 다가왔다.

“말해. 다프네가 왜 서 있는 거지?”

한껏 물오르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평소 만찬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았던 에드먼은 가라앉은 눈으로 가신들을 응시했다.

괜히 답답한 기분에 몇몇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에드먼의 시선을 피했다.

“빨리 답하는 게 좋을 텐데.”

“그게, 마님께서 실수로 의자에 음식물을 흘리셔서 다른 것으로 교체하느라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그렇지요, 마님?”

“…맞아요.”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은 다프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뼛주뼛 다가온 사용인이 다프네의 자리에 의자를 가져다 놓을 때까지.

“자, 각하께서 만찬에 참석하신 건 정말 오랜만이죠?”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올려 흥을 유도했다.

에드먼이 다프네의 옆자리에 앉자 그제야 분위기는 아까처럼 돌아갔다.

에드먼과 다프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다프네는 음식을 건들기는 했으나 정작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적었다.

“마님, 임신하신 탓에 입맛이 없으신가 봅니다.”

“…조금요.”

소피아는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사용인이 접시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임산부에게 좋다는 음식입니다.”

소피아는 다프네를 유심히 살폈다.

다프네는 반강제로 이곳에 끌려와 앉을 곳도 없이 서서 무시당할 때와 똑같이 무표정이었다.

설마 다프네가 에드먼을 부른 건 아닐까, 싶었지만 에드먼은 다프네가 부른다고 올 사람도 아니었다.

소피아가 다프네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임신했다는 에드먼의 말에는 증거가 없었다. 소피아는 다프네가 임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셔 보세요. 제가 힘들게 구한 거랍니다.”

그리하여 소피아는 한 가지 음식을 준비했다.

일반인에게는 무향이지만 임산부에게는 구토를 일으키는 역한 냄새가 나는 이것을 구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모든 걸 밝혀낼 것이다. 다프네가 이혼을 피하고자 임신한 척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접시를 덮고 있던 뚜껑이 열렸다. 다프네는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식기를 들어 올렸다.

소피아는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먹는 다프네의 모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웁.”

그러나 다프네가 입을 틀어막았다.

울컥, 그리고 입을 틀어막은 손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

“일단 표면적으로 큰 이상은 없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한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 애초에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상성이 맞지 않은 음식이 만나 독이 된 것이기에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남작 부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각하, 그런데 마님께서는….”

“부인. 늦은 시간 와 줘서 고맙네.”

“…의원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더는 말을 이어 가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요한이 들어왔다.

“밤이 깊었습니다, 각하.”

“…몇 시지?”

“3시입니다.”

시간이 어느덧 그렇게 흘러갔다.

각혈하며 쓰러지는 다프네를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온 후 뉴벨 남작 부인이 오기까지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흘렀는데 말이다.

“먼저 가.”

“…알겠습니다.”

요한마저 나가고 에드먼은 고개를 젖힌 채 마른세수했다. 에드먼은 얼굴을 덮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잘게 경련하고 있는 손을 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눈을 감으면 다프네가 쓰러지는 순간이 생생히 그려졌다.

에드먼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묻은 마른 피가 없었다면 시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창백하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창백한 목덜미 너머로 팔딱팔딱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먼은 느리게 목덜미에서 손을 뗐다.

손끝에서 팔딱이던 느낌이 사라지자 허한 기분이 들었기에 에드먼은 주먹을 다시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프네의 방을 나왔다.

“각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저 마린다예요. 기억하시죠? 5년 전에 잃어버린 그림도 제가 찾아 드렸잖아요.”

그림을 찾았던 시녀, 마린다였다.

“무슨 일이냐.”

“각하께 꼭 전해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마린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작게 속삭였다.

“마님께서 달거리를 하십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복도 탓에 에드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린다는 급하게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빨래터에서 마님의 피 묻은 슈미즈를 보았다.

“그러니까, 마님께선 임신하신 게 아니에요. 제 말이 믿기 어려우시겠죠. 하지만 정말이에요.”

마린다는 에드먼이 자신을 지나치자 다급히 뒤쫓았다.

“그러니까, 여인은 달거리를 하지 않으면 임신을 한 것인데 마님은 달거리를 하셨어요. 그러니 마님은 임신하신 게 아니에요.”

점점 격차가 벌어지자 마린다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만요!”

온 힘을 다해 뛴 마린다는 에드먼의 앞을 막아섰다.

“각하. 저… 각하를 사랑해요.”

마린다는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마린다는 부푼 기대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달빛이 비친 창가에 선 에드먼이 보였다.

‘…어?’

그리고 차갑도록 무표정인 에드먼도.

이게 아닌데. 분명 각하께서는 날 뜨겁도록 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셔야 한다. 저렇게 차가운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각하를 처음 본 순간 들렸던 음성이다.

“각하께서는 널 사랑해, 마린다.”

마치 주문과도 같은 말에 마린다는 저도 모르게 그대로 내뱉었다.

“절, 절 사랑하시잖아요.”

“황당하군.”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고백에 에드먼은 마린다를 지나쳤다.

홀로 복도에 남은 마린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멍하니 생각했다.

‘…아이가 가지고 싶으신 거야.’

그래서 내 말을 외면하고 계신 거야. 난 아이가 없지만, 마님은 있잖아. 그러니까 마님을 놓지 못하고 계신 거야.

“아이….”

나도 아이 가질 수 있는데.

마린다는 곧바로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각하께 말씀드리는 거야. 나도 아이 가질 수 있다고. 아이를 가지면 다시 내게 돌아오실 거야. 각하는…. 읍!”

누군가 손수건으로 마린다의 입과 코를 가렸다.

버둥거리던 마린다는 이내 손수건에 묻힌 수면제 향기에 깊은 수마에 빠졌다.

***

“저… 각하를 사랑해요.”

에드먼은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기분이 더러웠다.

불쾌함을 억누른 것은 오로지 다프네 때문이다. 다프네가 유일하게 데려온 것이 저 하녀라서.

에드먼은 궐련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미 잠자긴 글렀기에 서류나 볼 생각이었다.

“마린다예요. 기억하시죠? 5년 전에 잃어버린 그림도 제가 찾아 드렸잖아요.”

에드먼은 궐련을 입에 갖다 대기 전 우뚝 멈췄다.

그림을 언제 잃어버린 것인지는 알린 적 없다. 당연했다. 에드먼도 언제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드먼은 문득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다프네가 휘갈긴 추가 계약 조항과 불륜 증거 그리고 시녀가 전한 쪽지가 있었다.

에드먼은 그 세 종이를 모두 꺼냈다.

‘…다르다.’

다르다.

휘갈긴 글씨체는 미묘하지만 분명 달랐다.

그리고 불륜 증거와 시녀가 전한 쪽지는 같았다.

에드먼은 조급한 손길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이 나타났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마린다. 마린다라는 시녀를 찾아와. 어서!”

에드먼의 재촉에 요한은 곧바로 마린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한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각하… 밖으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이 에드먼을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저택 밖이었다. 다리가 기이하게 꺾인 채 즉사한 마린다의 시체가 있는.

“시녀의 방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에드먼은 시체를 살펴보다가 요한이 내민 쪽지를 받았다.

“마님, 정말 죄송합니다. 질투에 눈이 멀었습니다. 부디 절 용서해 주세요.”

“아무래도 이 시녀가 마님에게 상성이 맞지 않는 음식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방에 증거들도 더 발견됐고요. 유서를 남기고 옥상에서 자결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버려.”

마린다의 시체는 화장도 하지 않고 성 밖으로 버려졌다. 들짐승들이나 마물들의 먹잇감이 될 마린다의 시체로 무언가 다가왔다.

그리고 마린다의 시체는 뼈 한 조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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