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하기야, 감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내가 제 피붙이에게 애정을 느끼긴 할까. 지금 하는 행동마저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들어온 것일 텐데.
에드먼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기준은 감정 따윈 배제한, 오로지 득과 실이다.
순간 물에서 나온 듯 다프네는 깨어났다.
“재미있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다프네는 에드먼의 말을 끊으며 떨구었던 고개를 올렸다.
“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당신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떠난 것이라고.”
에드먼의 미간이 움찔거리며 좁혀졌다.
“그런 헛소문은 잠잠해질 겁니다.”
“왜 헛소문이라고 여겨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모습에 다프네는 오히려 의아했다.
모르는 일이지만 완벽한 증거도 있다고 들었다.
다프네는 평평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나도 확신 못 해요.”
“…….”
“이 아기가, 당신의 아이….”
“설령 당신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씨를 밴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다프네는 배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었다.
“내 아이로 키울 것이고, 윈터가의 성을 부여할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난, 난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 당신은….”
“날 사랑하잖습니까.”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이의 씨여도 상관없다고 말해 놓고서는 확신하고 있었다. 다프네가 자신을 두고 다른 이의 품에 안겼을 리 없다고.
다프네는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에드먼도 알고 있다는 것보다, 에드먼에 대한 다프네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더 버거웠다.
다프네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려 그를 보았다. 지독히도 아름답고, 지독히고 차가운 남자.
“어서 회복하세요. 이제 그대는 몸에 대한 권한 따윈 없습니다.”
말을 남긴 에드먼이 나가고 다프네는 배에 댔던 손을 떨궜다.
나는 그가 전부인데, 그는 내가 전부가 아니다. 나는 그가 유일한데, 그에게 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다프네는 안도했다.
내가 아이를 가지지 않아서. 만약 정말 에드먼의 아이를 가졌다면, 단지 그 이유로 에드먼이 저러는 것이라면 다프네는 아마 맨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안도해서, 그래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없어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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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다시 말해.”
“…각하께서 말씀하신 문신은 세르기 블레드의 수족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높은 확률로 살수를 보낸 이는 세르기 블레드입니다.”
“예상대로군.”
세르기 블레드가 보낸 것이 맞다.
요한은 의아했다. 가문에서 금지옥엽 취급하던 다프네를 왜 암살하려던 것일까. 마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요한은 상념을 끊어 내고 에드먼을 보았다.
분명 오늘 에드먼은 평소처럼 요한의 보고에 답하고 귀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에드먼이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하.”
“할 말이 남았나?”
“…마님께서 임신하셨다 들었습니다. 더불어 불륜 의혹까지도요.”
“그래서 넌 무엇이 진실이라 생각하지?”
예상치 못한 에드먼의 질문에 요한은 당황했다.
당연히 그는 모두 확신하지 못한다. 뭐가 진실인지, 둘 중 진실이 있긴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요한이 아는 한, 에드먼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약 5년 동안 합방조차 하지 않았던 다프네의 태에 있는 생명이 자신의 씨라 확신할 수 없었다.
“가신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의 상황을 전했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마님이 임신하셨다는 결정적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가령…. 가신들 앞에서 의원이 마님을 진찰하게 한다거나.”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에드먼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왜 가신들에게 해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거지?”
“대모님이 오시면서 판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소피아는 지금의 가신들이 이제 막 가주 자리에 올랐을 무렵부터 함께해 왔다.
이 때문에 소피아가 가진 영향력은 결단코 적지 않았다. 소피아가 앞에 나서서 선동한다면, 가신들의 반은 그에 흔들릴 것이다.
“하필 시기가 이렇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적어도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에드먼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아서 하마.”
에드먼은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들어온 사용인에게 명했다.
“벤자민에게 술을 가져오라 해라.”
“요즘 술을 가까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미처 알지 못했다는 듯 에드먼이 반문했다. 요한의 말대로 요 며칠 에드먼은 하루걸러 술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바쁘셔서 훈련도 하지 못하신 지 오래죠.”
“알렉에게 말해 놔라.”
알렉과 대련을 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요한은 방을 나갔다. 그리고 술을 든 벤자민이 들어왔다.
에드먼은 셔츠를 끌어 올렸다.
감싸진 붕대를 풀자 피에 젖은 헝겊이 흘러내렸다. 벤자민은 헝겊을 치우고 어깨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탈 없이 잘 아물고 있었다.
“이대로 유지만 잘하면 금방 나을 것 같습니다. 훈련 안 하고 계시죠?”
“알렉과 대련을 하기로 했다.”
“예?”
벤자민은 눈앞의 큰 상처와 에드먼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이 몸으로 대련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의심받는 것보다 낫다. 그리고 내가 질 것 같으냐?”
“제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만약 각하의 부상이 알려진다면 그때처럼….”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다프네를 견제하는 세력에게 돈으로 매수당한 사용인 하나가 에드먼이 부상당했다는 정보를 넘겼고, 수십 명의 살수가 에드먼을 습격한 것을.
평소라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처리했을 테지만 당시 에드먼은 부상으로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고, 겨우 살수를 상대했다.
당시 에드먼의 상태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벤자민은 일단 치료를 마저 이어 갔다.
“상처가 덧나면 그 시기일 때 각하께서 더 힘드실 겁니다.”
이젠 정말 코앞이다.
“제발 더 다치지만 마십시오.”
벤자민은 당부와 함께 방을 나갔다.
***
데미안이 다프네와 마주친 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어머니?”
다프네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뒤늦게 입가를 가렸으나 다프네는 고개를 돌린 후였다.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데미안은 어색한 정적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예전에, 이렇게 다프네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었지?
기억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마주쳐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더 많았다.
데미안은 문득 다프네를 훑었다. 걸음걸이나 자세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벤트가 가져온 소문대로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이상하게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이 침묵만 흐르던 그때, 기합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훈련이 시작된 것이었다.
“훈련하러 가는 길이었니?”
다프네는 데미안의 차림을 보았다. 이 길로 쭉 가다 보면 훈련장이 있었다.
“…네.”
“그렇구나.”
다프네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럼 나는 이만….”
“조심하십시오!”
데미안과 다프네는 멀리서 들리는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훈련 도중 놓친 검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정확히 그들이 서 있는 위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
퍽!
데미안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를 감싼 것이 다프네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그리고 다프네의 앞에 에드먼이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심장이 아직 세차게 뛰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검을 맨손으로 쳐 낸 에드먼은 팔을 내렸다.
“알렉, 이 검을 날린 자를 데려와.”
대련을 위해 에드먼의 뒤에 있던 알렉은 곧바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미안은 제 얼굴을 더듬는 손에 고개를 돌렸다. 다프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데미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데미안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프네의 몸에 힘이 빠졌다.
“어머니!”
데미안은 비틀거리는 다프네를 황급히 부축했다. 다프네는 이내 데미안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하.”
벤자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각하. 제가 부탁드린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 정도 갈까 싶었는데….”
하루도 다 채우지 못했다.
벤자민은 아주 야무지게 터진 상처를 보며 한숨을 다시금 푹푹 내쉬었다.
에드먼은 알렉과의 대련 대신 갑자기 모든 기사와 대련했다. 당연히 그 누구도 에드먼에게 칼 한 번 제대로 스치지 못했으나 그 수만 수십이다. 잘 아물고 있던 상처가 터지는 건 당연했다.
에드먼은 아무 말 없이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아프긴 하신가 봅니다.”
벤자민이 톡 쏘아붙였지만, 에드먼은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터진 상처를 다시 잘 꿰맨 벤자민은 연고와 붕대를 꺼냈다.
“그건 왜?”
“오른손 주십시오.”
벤자민의 시선은 셔츠를 걷지 않은 에드먼의 오른팔로 향해 있었다.
“검을 그대로 쳐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검을 맨손으로 쳐 냈는데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됐다. 이 정도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에드먼은 욱신거리는지 팔뚝을 매만졌다. 벤자민은 한숨을 내쉬며 연고와 붕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신들과 대모님께서 만찬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
에드먼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가지 않으시려고요?”
“아니.”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만찬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던 터라 벤자민은 당황했다.
“대모님이 계신 마지막 만찬인데, 가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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