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데미안의 후계자 자리가 굳건해지면, 이혼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에드먼은 다프네가 휘갈겨 쓴 종이의 내용을 보며 생각했다.
데미안의 후계자 자리는 언제쯤 굳건해질지. 그의 계획에 따르자면 데미안은 약 2년 안에 후계자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 것이다.
‘…2년.’
데미안이 약혼을 원하나?
알 수 없으니 일단 배제했다.
‘3년.’
아직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마물들이 많으니 더 미뤄야 한다.
‘5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듭 재고해 보니 약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데미안은 후계자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었다고 칠 수 있었다.
‘굳건하다는 기준이 뭐지?’
직위를 물려주기 직전일지도 모른다.
5년이 15년이 되려는 순간,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닉입니다.”
“들어와.”
에드먼이 추가된 계약 조항이 적힌 종이를 서랍 안에 넣은 동시에 닉이 들어왔다.
서랍을 닫은 에드먼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이유로 그대를 불렀는지 충분히 알 것 같은데.”
“알고 있습니다.”
닉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를 찾기 위해 고용했지만, 다프네를 찾은 건 자신이었다. 닉이 아니라.
“난 그대의 여동생 정보를 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닉이 내민 것은 검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무엇인지 알아본 에드먼의 눈가가 좁혀졌다.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그것이 맞습니다.”
“왜 내게 이것을 준 거지?”
생긴 것 그대로 ‘검은 돌’이라 불리는 보석은 본래 하얀빛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석에는 흑마법을 걸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세뇌 마법을 보석에 심어 노예들을 손쉽게 다룬다.
강력한 정신 계열이 아닌 몸을 통제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불법이어도 제국에서는 쉬쉬하며 눈감아 주는 것이었다.
“저와 연결된 것입니다.”
황당한 말에 에드먼은 눈을 깜빡였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저주이다. 그런데 닉은 그것을 스스로 걸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제 충성을 표현할 방도는 이것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는 이유가 뭐지?”
“제 여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제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에드먼이 이에 관해 좀 더 깊은 조사를 해 본 결과, 닉의 여동생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복수.”
“황제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닉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못 들은 것으로 하지.”
“각하의 비밀을 압니다.”
“그래서? 내 약점을 운운하여 복수를 도우라는 것인가?”
닉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 전에 제 알량한 목숨이 위태롭겠죠. 제가 각하께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닉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몇 년이 흐르고 몇십 년이 흘러도 괜찮습니다. 황제와 단둘이 만나게 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그때 무슨 일을 벌여도 결단코 각하께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닉은 덧붙였다.
“제 목숨을 걸고요.”
에드먼은 닉이 건넨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에드먼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게 이득이었다.
만약에 만약까지 모두 머릿속으로 그리고 계산한 에드먼은 그 반지를 손에 쥐었다.
“받아들이지.”
***
벤자민은 일을 하다 말고 눈에 보이는 장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 일이….’
솔직히 말하자면 다프네가 한 일과 다프네의 모습은 도저히 매칭되지 않았다.
선대 공작의 무덤을 파헤쳤다니.
벤자민은 선대 윈터 공작을 떠올렸다.
에드워드 윈터.
그는 완벽한 사내였다. 태생부터 가진 것까지.
그러나 완벽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세간의 사람들은 물론 사용인들마저 완벽하게 속인 에드워드의 진짜 모습은 아주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벤자민은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에드워드는 한마디로 미치광이였다.
그는 매우 늦게 태어난 후계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단 하룻밤의 실수로 하녀의 배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에드워드는 혈통과 평판을 목숨처럼 여기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완벽’이라는 것을 강요받았다.
폭력은 폭력을 대물림한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에드먼에게 풀었다. 고작 세 살 난 아이에게 완벽을 강요하고 채찍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에드워드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때문에 전대 공작 부인이 에드워드가 한 짓을 알고 그를 떠나려 했을 때, 그녀를 감금했다.
2년이라는 긴 감금이 끝났을 땐, 전대 공작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였다.
온전한 시체조차 품에 안지 못한 에드워드는 분노의 방향을 에드먼에게 돌렸다. 에드워드는 에드먼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자살한다.
당시 에드먼의 나이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자신의 부인을 죽이고 아이까지 죽이려다가 끝내 자결한 에드워드 윈터.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기에 벤자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주 오랜만에 전대 윈터 공작이 떠오른 탓인지 늦은 밤인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밴자민은 결국 장부로 손을 뻗었다. 약 3년 동안 방치된 장부이니 각오는 충분히 했다.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장부를 펼쳤다.
“이건…”
벤자민은 테이블 위를 더듬어 안경을 썼다. 한참 후, 장부를 자세히 살핀 벤자민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장부는 누군가 완벽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정확히 마물 토벌 전을 마지막으로.
‘마님이 돌아오셨어.’
마린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마님이 돌아오셨다.
이것이 마린다가 지금까지 잠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왜? 어떻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도, 가설도 없다.
‘이대로 가다간….’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다.
“안 돼…”
각하는 나와 운명인데, 이러면 안 된다. 곤란하다.
까득.
마린다는 입에서 손을 뗐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으나 마린다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가설이지만, 에드먼이 다프네를 데려온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에드먼이 다프네를 ‘왜’ 데려왔냐는 것이다. 마린다는 에드먼과 다프네의 사이를 잘 알고 있다.
둘 사이에 뭔가 변화가….
“…아이.”
“다프네가 임신했다. 내 아이다.”
다프네가 돌아왔다는 말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녀가 에드먼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지?
당최 알 수 없었으나 마린다는 타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둘 수 없지.”
마린다는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분노에 떨었다. 그리고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때, 누군가 손수건으로 마린다의 입과 코를 가렸다.
“읍! 으읍!”
마린다는 저항해 보았지만 한 치의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반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린다는 이내 어느 방으로 질질 끌려가 내동댕이쳐졌다. 그 손길이 얼마나 거친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익숙한 목소리에 마린다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시녀장님….?”
시녀장이었다.
마린다는 멍하니 시녀장을 보았다.
“그만하면 됐다.”
“…대모님”
그리고 시녀장의 옆에는 소피아가 있었다. 마린다는 이곳이 소피아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매우 곤란하단다, 마린다.”
“대모님, 그건….”
“분명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니?”
마린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소피아의 말대로 그때는 자신 있었고,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모두 엉망이 되고 말았다.
“네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마.”
마린다의 어두운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일주일. 그 안에 방도를 구해 와.”
“맡겨만 주세요, 대모님. 이번에는 결코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을게요.”
마린다는 소피아의 방을 나오며 생각했다.
에드먼과 다프네의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다. 만약 그 아이가 없어진다면?
‘그럼 원래 사이로 돌아갈 거야.’
모든 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다프네의 배에 자리한 아이만 없어진다면 말이다.
***
“…의원?”
“네.”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보내신 의원이라고….”
“하.”
에드먼이 거론되자 다프네는 옅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나는 냉소적인 다프네의 반응에 어깨를 흠칫거렸다. 안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마님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는 소식을.
‘정말 마님께서 아이를….’
에드먼과 제대로 된 합방 한 번 한 적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안나는 얼떨떨했다.
“돌려보내.”
“네?”
“의원. 돌려보내.”
다프네는 단호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단순히 다프네의 심정 변화라고 여긴 안나는 의원을 돌려보내기 위해 방을 나갔다.
홀로 남아 침대에 누운 다프네는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충동적으로 삼킨 진실은 거짓말을 내뱉었고, 그 결과가 저것이다. 화를 내며 의원을 돌려보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는 들키게 될 것이다.
‘…아니야.’
애당초 멋대로 오해하고 판단한 건 에드먼이다.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각하, 잠시만…!”
그때였다. 문이 예고 없이 열리고 에드먼이 등장했다.
다프네는 철렁 가라앉은 가슴을 애써 무시한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왔어요?”
다프네는 익숙한 제 방에 에드먼이 서 있는 것을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의원을 돌려보냈다고요.”
빠르기도 하지.
“네, 그랬어요.”
“아침도 걸렀다고 들었습니다.”
다프네는 고개를 돌려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5년 동안 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당신이 제 발로 날 찾아올 만큼.
“후계자로 데미안이 있잖아요.”
듣고 싶은 대답이 있다.
“그 아이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이 아이가 있든 없든, 윈터 공작가의 대는 이어져요.”
심장이 쿵쿵 뛴다.
다프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에드먼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집중했다.
저 남자는 분명 알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지. 모를 리 없다. 저 남자가 이 세상에서 모르는 건 없다.
그렇기에 더욱 잔인한 이였다.
“…이례적인 일입니다. 한 대에 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단지 그뿐이다.
“이건 내 뜻이지만 가신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몸을 회복하고….”
에드먼의 말이 이명처럼 흐릿해졌다.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가신들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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