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 그건….”
순간 눈이 마주쳤다.
마린다의 밝은 갈색 눈이 붉게 물드는 순간, 소피아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마님을 내쫓아야죠.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졌는데. 그리고 새로운 공작 부인으로… 저를 추천하세요.”
“공작 부인을… 내쫓고… 새로운 공작 부인을….”
소피아는 마린다의 말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마린다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소피아는 눈을 번쩍 뜨며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마님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했다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웬 식은땀을…. 아니, 그보다 확실한 증거니?”
“네.”
마린다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 말은 조작한 걸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말이란다.”
마린다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럼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마님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 봤자 신뢰 관계가 전혀 없는 각하나 소공작님께서 믿어 주실 리 없었다.
“가신들을 불러와야겠구나. 이런 중대한 사항을 다 알아야지.”
***
“가신들이?”
“예. 아무래도 대모님의 부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벤트는 올라오면서 본 것을 데미안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 올까요?”
“됐어. 중요한 일이라면 내게 제일 먼저 말씀하셨을 테지.”
“그건 그렇습니다. 아, 소공작님. 비에슈 백작에게 받은 마력석은 어떻게 세공할까요?”
“아.”
데미안은 뒤늦게 비에슈 백작에게 받았던 마력석을 떠올렸다.
크기가 크고 순도가 높아 단순히 온도를 데우는 용도로 쓰기엔 아깝다며 벤트가 온종일 데미안을 설득한 끝에 세공하기로 한 마력석이었다.
벤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도의 유명한 세공사에게 예약을 넣었고 윈터 공작가라는 이름 덕인지 바로 연락이 닿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넣어.”
“예? 정말 그래도 됩니까?”
벤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마력석은 데미안의 것이지만 그것의 세공 디자인을 자신이 직접 지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기쁘다며 벤트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 저번에 말씀하셨던 거 있지 않습니까.”
벤트는 품 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냈다.
데미안이 만년필과 검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알아봐 달라며 같이 주었던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이상하게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정보가 없다고?”
“예. 이런 경우 둘 중 하나인데…. 정체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거나, 이렇다 할 정보도 없는 무명일 겁니다. 더 알아볼까요?”
“…아니, 됐어.”
데미안은 여러 개의 만년필 중 습관처럼 쓰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찾으러 떠나셨으니 어차피 어머니는 돌아온다. 그러니 이것들을 선물한 장본인인 어머니께 여쭤보면 된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늦은 시간이고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벤트는 가라앉은 얼굴로 돌아왔다.
“소공작님, 급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소공작님.”
의아해하던 그때, 벤트의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
“그게 정말입니까?”
가신들의 되물음에 소피아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모님께서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소피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소피아의 갑작스러운 소집에 가신들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소피아가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님이,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다니.
왜 소공작님의 성년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납득이 갔다.
“그럼 소공작님의 성년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게….”
술렁임이 거세지자 손수건으로 가린 소피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면 마님은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의 물음에 잠시 정적이 흐르던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당연히 이혼하셔야지.”
이 귀족 사회에서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일은 흔한 일이다. 비록 야반도주는 흔하지 않더라도 이혼은 큰 흠이 되기에 상황을 조용히 마무리하거나 합의를 본다.
하지만 가신들은 그런 관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망설임 없이 이혼 얘기를 꺼냈다.
“그럼 차기 공작 부인은 어느 분이 되실까요.”
에드먼의 또래나 결혼 적령기인 여식이나 친척이 있는 집안들이 서로를 빠르게 흘끔거렸으나 빤히 보이는 속내를 감추려는 듯 헛기침하며 괜히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문제는 대모님께 가장 먼저 여쭤봐야지요.”
“대모님, 혹시 생각나는 영애가 있으십니까?”
마침내 원하던 상황이 오자 소피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겉으로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싶군요.”
소피아에게 선물 공세를 할 시간을 벌게 될 몇몇은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소피아는 덧붙였다.
“더군다나 그분은 5년 동안 윈터 가문의 안주인이었죠. 차기 공작 부인을 벌써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서 뭐 합니까! 불륜이라니요.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습니다!”
방금 이 말을 한 자작은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정부를 다섯 번이나 갈아 치웠다는 가십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맞는 말이라며 옹호했다.
“윈터 공작가의 재산은 한 톨도 주지 못합니다. 지참금만 되돌려 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애당초 마님께서 가지고 오신 지참금이 있답니까?”
“없죠. 딸랑 맨몸으로 오신 걸 잊으신 겁니까?”
껄껄거리며 저들끼리 판을 벌이는 모습을 소피아는 흡족하게 주시했다.
“확실합니까?”
한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뉴벨 남작, 왜 그러는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뉴벨 남작의 분위기 깨는 말에 옆에 앉은 가신이 눈치를 주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증거가 없잖습니까. 대모님께서도 이것을 알게 되신 경로가 있을 거 아닙니까.”
뉴벨 남작가는 벤자민의 가문처럼 대대로 윈터 공작가에 헌신하는 가문이다.
신분에 개의치 않고 할 말 다 하다 보니 적이 많고 비록 작위는 남작이지만 웬만한 가문보다 오래되고 유서 깊다. 더군다나 현재 뉴벨 남작은 데미안의 후계자 수업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었다.
뉴벨 남작의 이러한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소피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짓했다.
“저도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습니다, 남작님. 하지만 이걸 보는 순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피아의 옆에 있던 시녀가 품 안에서 종이 더미를 꺼냈다.
“마린다입니다. 마님께서 결혼하실 당시 블레드 가문에서 데려온 아이지요. 이 아이가 발견한 것입니다.”
“허어, 빼도 박도 못한 증거군요.”
마린다가 꺼낸 종이 더미는 다름 아닌 편지였다. 그냥 편지가 아닌, 사랑과 그리움이 듬뿍 담기다 못해 넘쳐 나는 편지.
편지의 내용은 뒤로 갈수록 점점 서로를 향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끝내 야반도주를 하자며 몰래 만날 시간과 장소가 적힌 것으로 끝났다.
“그렇다면 정말로 마님이….”
“마린다라고 했었나?”
뉴벨 남작은 눈가가 붉은 마린다를 응시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대가 마님의 측근 시녀인가?”
“사정이 있어서 측근 시녀는 아니지만 결혼하시기 전에도 모셨기에 마님에 대해서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내가 듣기론 다른 하녀가 있다는데.”
마린다의 축 처진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 아이는… 제가 주제넘게 마님을 걱정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제게 화가 나셨을 때 가까이했던 하녀입니다.”
“마님께서 이런 편지를 주고받는 걸 알고 있었나?”
“정말 죄송합니다!”
마린다는 무릎을 꿇었다.
“마님께서 이것을 누설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저를…. 흑.”
마린다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뉴벨 남작. 그만하시오. 이 시녀도 용기를 내어 마님을 고발한 거 아니오.”
참다못한 가신 중 하나가 뉴벨 남작을 막아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잘된 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서 마님이 마음에 드셨던 분 계십니까? 없죠. 이 기회에 다 털어놔 봅시다.”
또 다른 이가 말을 이어 갔다.
“옳은 말입니다. 마님이 안주인의 역할에 충실하기라도 하셨습니까, 아니면 지참금을 많이 챙겨 오셨습니까.”
“윈터 공작가에 비해 너무 떨어지죠.”
가신 중 하나가 히죽거렸다.
“전 이때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들 내기 기억하시죠? 그때 나왔던 가장 긴 예상 기간이 고작 2년이었는데 5년이나 버티셨죠. 뭐, 밤 기술이라도 좋으신지.”
“뭐?”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피아와 가신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표정이 굳은 벤자민과 벤트의 앞에 데미안이 서 있었다.
데미안은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마지막 말을 한 가신 앞에 섰다.
“다시 말해 보아라.”
처음 듣는 데미안의 하대에 가신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 소공작님. 뭔가 잘못 들으신 것 같습니다.”
“‘전 이때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들 내기 기억하시죠? 그때 나왔던 가장 긴 예상 기간이 고작 2년이었는데 5년이나 버티셨죠. 뭐, 밤 기술이라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이어 가자 가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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