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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25화 (25/145)

25화

흐릿해지는 시야에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별을 담아 놓은 듯한 신비로운 눈동자. 수려하면서도 섬세한 선으로 그려진 남자는 언제나 그렇듯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완벽했다.

공작이라는 혈통부터,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 제국을 수호하는 지위까지.

감정 따윈 없는 차가운 냉혈한. 악마.

저주스러울 만큼 사랑하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도 모르게 기대라도 한 것인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에드먼은 날 찾아온 게 아니야. 내가 목적이 아니야.

다프네는 끓어오르려는 호흡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에드먼, 잘 들어요. 아이는….”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시야가 휙 바뀌었다.

에드먼이 갑자기 느껴지는 살기에 다프네를 품에 안고 몸을 굴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잘 벼려진 단도가 박혀 있었다.

“각하!”

사람들의 비명에 섞인 유진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이 살기를 왜 지금 알았지?’

에드먼은 바람과 함께 옷깃을 파고드는 살기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 의아했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내려 다급히 다프네를 살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것을 빼고는 다친 곳은 없었다.

에드먼은 다른 살수가 달려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프네의 어깨를 움켜쥐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저쪽으로 쭉 달리면 제 수하가 있을 겁니다.”

“…….”

“다프네.”

에드먼은 다프네의 어깨를 재차 흔들었다. 다프네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뛰세요.”

에드먼은 다프네의 등을 유진이 있는 방향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인원은 총 셋.

에드먼을 상대하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이면서도 약했다. 에드먼은 인파가 빠지길 기다리면서 검을 꺼냈다.

‘누가 보낸 것이지?’

에드먼은 자신에게 살수를 보낼 법한 사람을, 그동안 보내온 이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고작 셋으로 에드먼을 상대할 생각을 할 만한 이들은 없었다.

에드먼은 묘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인파가 빠져나가자 에드먼은 먼저 몸을 날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살수의 목에 칼을 그었다.

너무나 쉬웠다.

살수는 마치 당황한 듯 주위를 살피고 있었기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붉은 눈?’

얼굴을 칭칭 감은 두건 사이로 보는 기이한 붉은 눈을 본 순간, 뇌가 폭발한 블레드의 수족이 떠올랐다.

“!”

텅 빈 마지막 퍼즐마저 끼워진 순간, 에드먼은 몸을 틀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대기를 하다가 한 습격. 에드먼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 에드먼의 곁에는, 다프네가 있었다.

살수의 목적은 에드먼이 아닌 다프네였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챈 에드먼이 황급히 다프네를 찾았다.

“다프네!”

에드먼의 외침에 다프네가 몸을 돌린 동시에 살수가 단검을 던졌다.

***

“뭐?”

데미안은 셔츠에 팔을 끼워 넣는 것을 우뚝 멈추었다.

“아버지가 사라지셔?”

벤트는 툭 떨궈진 셔츠를 들어 데미안의 팔에 끼워 넣었다.

“알렉 님도 사라지신 걸 보니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큰일은 아니랍니다.”

“누가?”

“집사님이요.”

이곳에서 집사라고 불리는 이는 벤자민 한 명뿐이다. 애당초 집사가 없었고 집사의 일을 시종장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말을 전한 이가 벤자민이라는 말에 데미안의 의심이 누그러졌다.

“자, 빨리빨리 입으시고. 어서 가시죠.”

벤트는 다음 일정을 재촉했다.

에드먼이 갑자기 사라져도 데미안의 일정은 아무런 변동 없이 흘러간다.

데미안은 수업을 듣고, 가신들과 가벼운 조찬을 같이 하고, 다시 수업을 듣고, 서류를 보다가 검술 대련을 했다.

“후, 이젠 정말 버겁습니다. 소공작님.”

감기 기운이 있다면서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아침에 출근한 벤트 탓에 오늘 데미안의 대련 상대가 된 검은 기사단의 부단장 크리스가 검을 내려놓았다.

“정말 내년이면 절 훌쩍 뛰어넘으실 겁니다.”

“아직 멀었어.”

데미안은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크리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왕왕 데미안의 대련 상대가 되었던 크리스는 마물 토벌 후 다시 검을 맞댄 데미안의 실력이 더 발전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말이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데미안은 마치 에드먼의 어릴 적 모습을 거울에 비춘 것처럼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비록 그 당시 에드먼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함이 흘렀으나 이런 괴물 같은 면은 판박이다.

에드먼은 마치 굶주린 짐승과도 같았다. 메마른 사막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크리스가 에드먼을 처음 봤을 땐 그는 전장에 홀로 낙오되어 적들을 몰살한 후였으니까.

갈무리하지 못한 오러의 기운이 지금도 생생했기에 크리스는 솜털이 곤두선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나저나 오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집중을 잘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검을 손질하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데미안은 태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예. 수장들이 또… 뭐라 한 겁니까?”

“소벨 후작이 내게 제 딸을 들이밀더군.”

“소벨 후작의 딸이면….”

소벨 후작이 늦은 나이에 얻은 딸, 세리아는 사교계의 새로운 꽃이라며 자주 가십거리에 올랐다.

더군다나 에드먼과 동갑이다.

소벨 후작의 말에 다른 가신들은 헛기침하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최근 소벨 후작의 별장에서 연회가 많이 열린다 싶었는데 그때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상대다. 소벨은 영향력이 꽤 큰 가문이며 최근 마력석 광산에 뛰어들어 판을 크게 벌이고 있었다.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고려해 본다고 했지.”

“소공작님.”

크리스는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미안의 모습에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 뜻을 알아챈 데미안은 피식,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순수한 생각은 하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마.”

“무슨…! 어째서 그렇게 세상 다 산 이처럼 말씀하십니까? 소공작님께서는 분명 사랑하는 분과 결혼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는 쩔쩔매며 말했으나 데미안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소벨 후작이 넌지시 하는 말을 듣고 나쁘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데미안은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로 올라왔다. 모든 일정은 끝났기에 서류를 볼 시간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서류에 오래 집중하지 못했다.

대련 때 집중을 잘 못 한다는 크리스의 지적은 예리했다. 데미안은 서랍을 열어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 벤트에게서 구한 저택의 내부 구조가 그려진 종이를 꺼냈다.

데미안은 두 개를 비교해 보았다. 감이 통 잡히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두 개를 번갈아 가며 보던 데미안은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벤트였다.

“소공작님. 아직도 안 주무십니까?”

벤트의 물음에 데미안은 창문을 보았다. 깜깜한 하늘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

데미안은 자신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도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저녁도 거르셨잖습니까. 각하께서는 문제없으실 겁니다.”

벤트는 자신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는 것도 모른 채 한참 동안 조잘거렸다.

“목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말하는 거 보니 쌩쌩한 것 같은데.”

“…콜록, 콜록!”

벤트는 갑자기 기침하며 목을 움켜쥐었다.

“전 그럼 퇴근하겠습니다…. 푹 쉬세요….”

벤트는 염소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마쳤다.

“아, 참. 대모님께서는 내일 아침 일찍 오신답니다.”

그러고 보니 눈보라가 거의 멎었다. 오가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 쉬어.”

“예.”

벤트가 나가고 데미안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한참을 뒤척였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지도를 꺼내 또 한참을 보낸 데미안은 검을 들고 대련장으로 내려갔다.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기를 몇 시간.

“하….”

데미안은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몸이 고되니 그나마 머리가 조금 맑아진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으러 간 것일까?

역시, 어머니는 살아 계신다.

어머니가 돌아오신다면 물어볼 것이고, 궁금증을 해결한다면 이 종잡을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데미안은 동이 트는 것을 보며 몸을 돌렸다.

***

harbaragi_syk

“누구?”

소피아의 눈이 좁혀졌다.

“마린다라는 시녀입니다.”

“마린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던 소피아는 반쯤 기울었던 몸을 일으켰다.

몇 시간 전에 막 공작가로 돌아온 소피아는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아, 공작 부인이 데려온 그 시녀.”

지참금은커녕 몸 하나 달랑 온 공작 부인이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였다는 게 이제야 생각났다.

그런데 그 시녀가 자신을 왜?

“들여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린다가 들어왔다.

“대모님을 뵙습니다.”

소피아는 생각보다 예쁘장한 마린다의 얼굴에 미간을 좁혔다.

“할 말이 무엇이지?”

“아, 저, 그게….”

마린다의 눈이 빠르게 소피아의 뒤를 훑었다. 그것의 의미를 알아챈 소피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까딱였다.

소피아의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이 나가고 단둘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말이었으면 좋겠다만.”

“대모님.”

마린다는 망설였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문의 어른이신 대모님이 모르신다는 건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판단되어….”

모른다고?

소피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다급히 내려놓았다.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소피아의 귀로 들어온다. 그런데 모르는 일이라니?

“빨리 말해 보아라.”

“그것이….”

마린다는 느리게 입을 달싹였다.

“마님께서….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셨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예.”

마린다가 내민 것은 웬 종이 더미였다.

“얼마 전… 마님의 방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뒤로 넘길수록 소피아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공작 부인의 약점을 잡아 기분이 좋았으나 곧 의문이 떠올랐다.

“넌 공작 부인의 시녀가 아니더냐.”

“하지만 대모님께서 모르시는 게 말이 안 돼요. 아무리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고 해도 대모님께서는 아셔야죠.”

소피아는 공작 부인의 불륜 증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니?”

“대모님 곁에 있게 해 주세요.”

“흐음.”

마린다는 마치 소피아의 어릴 적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순진한 척하며 영악하게 챙길 건 다 챙기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장단에 맞춰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네?”

“이걸 나한테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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