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는.”
에드먼은 들고 있던 쪽지를 내려놓았다. 그 옆에는 종이가 닳도록 읽었던 편지 또한 있었다.
나란히 놓인 쪽지와 편지의 글씨체는 똑같다. 분명 다프네가 쓴 것이 맞았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무언가 그를 옭아매 오는 것 같았다. 이 알 수 없는 느낌은 에드먼을 불쾌하게 했다.
난 당신이 너무 싫어요. 이곳이 지긋지긋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다시는.’
에드먼은 쪽지의 내용과 시녀가 직접 전한 말을 되짚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단 한 번도 펼쳐 본 적 없는 편지를 꺼냈다.
진짜 편지.
그것을 보다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나는 왜 이것을 보기 망설이는 것일까.
애드먼은 요즘 들어 종종 이처럼 답답함에 휩싸였다. 정해진 공식과 틀에 맞춰 사는 그는 이런 풀리지 않는 답 없는 질문이 싫었다.
치이익.
궐련에 불이 붙고, 타들어 가고, 연기가 피어난다.
그 궐련이 거의 다 타들어 갈 무렵, 애드먼은 마침내 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드먼은 시야를 어지럽히는 궐련 연기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한곳을 향해 있었다.
텅 빈 편지.
편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지운 흔적도, 고민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새하얀 것이 에드먼의 시야를 채웠다.
‘이 편지를 왜 남긴 것이지.’
새하얀 편지만큼이나 머릿속도 새하얗게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에드먼의 시선은 자연스레 테이블의 한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프네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일까.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렉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낮 동안 내리던 눈이 저녁에 그쳤으나 새벽이 되니 또 구름이 자욱하게 꼈다.
다시 눈보라가 칠 것 같은데. 알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인원이 각하와 저뿐이라 금방 도착할 수 있겠다만 돌아올 땐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채비를 다 마친 알렉은 데미안에게 보고하기 위해 기척을 지우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무언가 그의 옆을 지나치는 게 더 빨랐다.
“?”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는 그때, 에드먼이 말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알렉, 바로 따라와라.”
“…각하?”
알렉은 뒤늦게 에드먼을 불러 보았지만 그는 이미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라진 상태였다.
***
‘왜지?’
마린다는 빠르게 사라지는 두 개 점을 바라보았다.
까득,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마린다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평소라면 손톱이 다 상하는 일 따윈 하지 않겠지만 마린다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계획은 완벽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에드먼은 다프네를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마린다는 고심 끝에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바로 다프네인 척 에드먼이 포기할 만한 쪽지를 써서 건네는 것.
다프네의 필체를 완벽하게 따라 하지 못하기에 일부러 갈겨 썼더니 의외로 상황 연출이 더 극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계획은 완벽에 가까웠다.
에드먼은 굳은 얼굴로 돌아섰고 마린다는 제 계획이 성공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왜 찾으러 가시는 거야?’
싫다는 말이 너무 약했나? 욕이라도 쓸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미 에드먼은 떠난 후다.
마린다는 입 안에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손을 뗐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마린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프네가 저택으로 돌아오면 에드먼에게 접근할 기회가 적어진다. 그 전에 무슨 수라도 써 놔야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마린다는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다.
‘근데 왜 편지가 안 와?’
그러고 보니 편지가 와야 할 시기가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뒤에서 공작을 꾸미느라 바빠 저번 달 편지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마린다가 자처하여 다프네와 함께 이 척박한 북부로 온 이유는 간단하다.
에드먼에게 첫눈에 반한 것도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할 정보원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이렇다 할 중요한 얘기를 주고받은 적은 없기에 5년이나 지난 지금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건 사실이다.
마린다는 깊은 새벽하늘과 조용한 복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가 볼까….”
“어딜?”
“꺅!”
마린다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비명을 내질렀다.
“누, 누구세요?”
당황한 마린다의 물음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복면을 쓴 남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 갑자기 나타난 에드먼의 손님인 닉이었다.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순간 닉 아처가 떠올랐으나 그는 루부즈 감옥에 수감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더군다나 닉이라는 이름은 흔했다.
마린다는 정체 모를 이가 닉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미소를 지었다.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됐어.”
남자는 마린다를 위아래로 훑어보는가 싶더니 곧 사라졌다. 마린다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난 후에 굽혔던 머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왜 어딘지 익숙하지?’
***
시린 바람이 옷 안을 파고든다.
알렉의 우려대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이내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거세지면서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큰 눈보라가 되었다.
목적지까지 반쯤 남았을 즈음엔 쌓인 눈 때문에 말의 속도가 점점 더뎌졌다. 일반 말이라면 이미 실신하고도 남았겠으나 북부의 추위는 인간은 물론 동물 또한 변화시켰다.
“각하! 잠시 쉬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렉은 자신이 탄 말의 입에 일어난 게거품을 보며 외쳤다.
에드먼은 그제야 처음으로 말에서 내렸다. 알렉이 말들을 챙기는 사이 에드먼은 해가 뜨기 시작한 지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큭.”
에드먼은 옅은 신음을 터트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다행히 두통은 금방 가라앉았고 궐련을 피운 듯 울렁거리던 속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다프네가 떠난 것은 엄연한 계약 위반이다. 그 때문에 찾으러 가는 것일 뿐, 그 어떤 일말의 사적인 감정은 없다.
없을 테고, 없어야 한다.
‘또.’
또다.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한 느낌. 그것은 뱀처럼 서서히 발아래부터 시작해 에드먼을 잠식시켰다.
마치 늪처럼. 에드먼이 뒤늦게 알아차릴 만큼.
“!”
번뜩 정신을 차린 에드먼은 안장 위로 올라탔다.
“각하?”
쉬고 있던 알렉은 에드먼의 돌발 행동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드먼은 자신의 말을 살폈다. 그의 말은 북부에서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오래 달릴 수 있는 명마이기에 짧은 사이에 많은 회복을 한 상태였다.
“알렉. 난 먼저 갈 테니 넌 알아서 와라.”
“예? 각하! 각하!”
알렉의 부름을 뒤로하고 에드먼의 말은 투레질하며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찼다. 달리고 또 달렸다.
에드먼은 눈보라 너머로 보이는 경계 마을을 발견하고는 더 속도를 높였다.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에드먼은 그 앞을 서성이는 검은 기사단의 단원과 마주쳤다.
“각하, 일찍 오셨군요.”
“다프네는?”
에드먼은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어디 있지?”
“유진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수하가 에드먼을 데리고 향한 곳은 기차역이었다. 눈보라가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양이 상당하여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유난히 더 잘 보였다.
“각하, 오셨….”
유진을 그대로 지나친 에드먼은 멍하니 걸어갔다.
단정하게 넘긴 갈색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은 하얀 눈.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뿌연 입김을 바라보는 녹색 눈.
다프네였다.
“다프….”
걸음을 옮기며 이름을 부르는 순간.
빠아아앙!
기차 경적이 울리자 한산하던 기차역은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내린 사람들로 인해 한순간에 채워졌다.
바쁘게 지나치는 이들에게 밀린 에드먼이 급하게 고개를 돌려 봤으나 다프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프네를 찾아!”
에드먼은 유진을 향해 소리친 후 인파를 뚫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프네가 기차역에 있던 이유는 기차를 타기 위함이 분명하다. 만약 여기서 다프네를 놓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
에드먼은 수많은 이들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끝내 손을 뻗었다.
손목을 붙잡고 반대편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휘감자 작은 몸이 휙 딸려 왔다.
동그랗게 뜬 녹색 눈과 마주친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프네.”
드디어, 다프네를 찾았다.
다프네는 크게 뜨인 눈을 깜빡였다.
에드먼은 빠르게 다프네의 얼굴 위를 훑었다. 이 얼굴을 내가 왜 잊었을까.
품 안에 가득 찬 작은 몸이 바르작거리며 떨렸다.
“에드먼. 당신이 왜, 왜 여길….”
마치 그가 오면 안 될 곳을 온 듯, 당황하는 모습에 에드먼은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다프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침묵했다.
“내가 그냥 보내 줄 거라 생각했습니까.”
에드먼의 손이 다프네의 배 위를 덮었다.
“감히.”
그리고 힘을 주어, 두꺼운 옷 너머로 다프네가 느껴지게끔만, 움켜쥐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다프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에드먼은 그 얼굴을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 아이를 배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프네는 멍하니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모를 줄 알았습니까?”
에드먼은 실소를 터트렸다.
다프네는 배우가 되었다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세기의 대배우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 들킨 마당에 끝까지 연기를 하니 말이다.
빠아아앙!
둘 사이를 기차 경적이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멍했던 다프네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버둥거렸다.
“…갈 거예요. 놔줘요.”
예상대로 그녀의 목적은 기차를 타고 북부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대로 순순히 놔줄 생각이 없는 에드먼은 다프네의 허리를 휘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아이를 배고 어딜 가려고요.”
다프네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에드먼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뒤늦게 찾았다. 발버둥 치던 것을 우뚝 멈추었다.
“하.”
그리고 옅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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