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상황을 모르는 노아는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노아, 이번에 북부로 보낸 걸 기억하나요?”
“아, 예예. 고놈이 세뇌가 잘 안 먹혀서 쓸 곳이 없는지라 북부에 보내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놈입니다.”
세르기는 수정 구슬을 톡톡, 가리켰다.
깨진 화면을 본 노아는 혀를 찼다.
“누가 터진 겁니까?”
“이리 와서 자세히 봐 봐요.”
세르기는 손을 까딱였다.
노아는 미간을 좁히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 이건….”
노아는 그제야 그것이 자신이 책임지는 것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한 그가 한 발짝 물러나는 순간.
“끄악!”
노아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뼈가 부러져 이미 납작해진 코에서 철철 흐르는 피가 노아의 손을 적셨다.
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기에 노아는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세르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제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신다면… 잠, 잠시만…! 아악!”
쾅! 콰앙!
노아는 몸을 낮게 움츠리고 빌었으나 얼굴 위로 떨어지는 고통은 끊이지 않았다.
“후….”
노아의 위에 올라타 수정 구슬을 내리치던 세르기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치켜들고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화가 좀 풀리네요.”
사르륵 미소를 지은 세르기와 눈이 마주친 수하는 그제야 자신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하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노아에게 향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은 뭉개질 대로 뭉겨져 있었다. 뼈는 돌출되어 있었고 이목구비는 뒤틀렸다.
“웁!”
수하는 치솟는 토기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저런. 이거라도 먹고 진정할래요?”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좁힌 세르기가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에 늘어진 노아의 얼굴 살점을 발견한 수하는 끝내 토기를 참지 못했다.
“우욱! 욱!”
“먹을 상황이 안 되나 보네요.”
세르기는 잔을 기울였다.
“헉, 허억….”
바닥에 주저앉고 토악질을 하던 수하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이제 좀 괜찮아요?”
세르기는 방금 사람 하나를 죽였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하는 공포에 떨었다. 세르기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건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 동료가 부풀려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손톱부터 뽑는 고문을 좋아한다든가, 사람을 죽인 후 꼭 피처럼 붉은 와인을 마신다든가. 도저히 저 아름답고도 다정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동료가 죽고 자신이 직접 모시게 된 세르기는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르게 어딘가 싸한 면이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동료가 말한 것이 진짜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그사이 노아의 시체는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고 있었다.
세르기는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살점을 닦아 냈다.
“무능하면서도 뻔뻔하기까지 하다니. 죽을 만했어요. 그렇죠?”
“흐윽, 예, 예.”
수하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아, 그런데 이제 노아가 없어졌네요.”
세르기는 깜빡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대가 이제부터 노아 하는 거 어때요?”
“예…?”
한순간의 총책임자가 된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죽었으니까, 대체해야죠.”
세르기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새로운 노아에게 첫 명을 내릴게요.”
그는 이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다프네의 행적에 대해 알아 오세요.”
노아가 된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직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지만 노아는 허리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좋아요. 나가 봐요.”
비틀거리며 새로운 노아가 나가고, 세르기는 깨진 수정 구슬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드먼에게 심문당하는 것을 지켜본 것은 5년 만에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말았다.
“다프네가 사라진 것을 블레드 후작이 아는가?”
“사랑스러운 내 누이.”
세르기는 누이가 아버지를 꼬드겨 제 손아귀를 벗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그곳을 직접 벗어날 줄은, 더욱이 상상하지 못했다.
원터 소공작의 성년식 축하 연회 때 수도로 올라온 누이는 그에게 화가 많이 난 채 떠났기 때문이다.
“곧 만나겠네요.”
세르기는 그날을 고대하며 다정히 중얼거렸다.
***
“언제, 어디서?”
에드먼은 알렉을 데리고 급히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질문을 퍼부었다.
그것을 예상했던 알렉은 당황하지 않고 늘어놓았다.
“각하의 명을 받고 영지부터 시작해 샅샅이 뒤졌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마님께서는 마을에 머물다가 가셨던 것 같습니다.”
“…마을에?”
“예. 알아보니 수색대를 해제했을 무렵 마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에드먼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미 북부를 벗어났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니.
“북부의 경계 마을에서 마님을 발견했습니다.”
“다프네가 확실한가?”
“마님을 발견한 자에게 초상화를 보여 줬고 확답을 받았습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재차 물어봤고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분명 마님이 맞았다.
에드먼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찬찬히 심호흡했다.
“다프네를 봤다는 이가 누구지?”
“유진입니다.”
“당장 올려보내.”
알렉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들어왔다. 유진이었다.
“각하를 뵙습니다.”
“유진, 네가 다프네를 발견했다고 들었다.”
“아, 예. 맞습니다.”
“상태는, 몸 상태는 어때 보였지?”
정말 변이 마물 소굴에서 도망쳐 나온 거라면 적어도 사지가 멀쩡할 리 없다.
“그게… 멀쩡했습니다.”
“멀쩡했다고?”
“어느 한 곳도 다치시지 않았습니다.”
다프네의 로브가 변이 마물 소굴에서 발견됐다는 것을 아는 유진도 믿기지 않는다며 덧붙였다.
그럼 변이 마물 소굴에서 발견한 로브는 무엇이지? 의아했으나 에드먼은 일단 나중에 이어서 생각하기로 했다.
“수고했다. 나가면서 알렉을 들여보내.”
“예.”
문 앞에 있었던 것인지 유진이 나가자마자 알렉이 들어왔다.
“먼저 유진을 포함해서 발이 빠른 이들을 먼저 보내서 감시해라. 다프네의 몸에 손대지 말고, 그저 감시만.”
“예, 알겠습니다.”
에드먼은 이제야 중천에 올라선 태양을 보며 말했다.
“떠나는 시간은 오늘 새벽이다.”
새벽이 찾아온 시간.
에드먼은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 탓에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것을 택했기 때문이다.
에드먼의 눈이 빠르게 시계로 향했다.
새벽 1시.
이제 떠나기 위한 정비가 모두 끝날 시간이다.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아무 일 없이 흐른다면 다프네를 만날 수 있다.
에드먼은 다시 눈을 감으려고 했다. 문밖을 서성이는 인기척이 없었다면.
에드먼은 곧바로 감각을 곤두세워 인기척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요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각, 각하.”
그림의 행적을 고했던 시녀, 마린다였다.
에드먼은 기억을 더듬었다. 마린다는 분명 2주 구금 처벌이 내려졌고, 아직 그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니.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 제가 방해됐을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슈미즈 차림의 마린다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허리를 숙였다. 그 탓에 슈미즈가 흘러내리고 휜 어깨가 드러났다.
에드먼은 그저 한마디 했다.
“돌아가라.”
문을 닫으려 했으나 마린다가 에드먼의 소매를 세게 붙잡았다.
그 탓에 멈칫한 에드먼이 잡힌 소매를 빤히 응시하다 마린다는 흠칫 놀라며 손을 거뒀다.
“죄, 죄송합니다.”
에드먼은 마린다를 꾸짖는 것보다 그냥 빨리 보내 버리고 싶었다. 소란스러워질 시 요한이 나타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있어요.”
“…뭐?”
“지금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잠깐이면 됩니다.”
“지금 말해야 해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에드먼은 눈을 깜빡였다. 다프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과 동시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각하께 보여 드려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처벌을 받는 중인데도 나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에요.”
에드먼은 멍하니 마린다가 내민 쪽지를 펼쳤다.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어 내렸던 익숙한 필체. 다프네의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듯 휘갈겨 쓰여 있었다.
난 당신이 너무 싫어요. 이곳이 지긋지긋해.
에드먼은 고작 두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님께서는… 종종 제게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정말 떠나 버리실 줄은… 흑….”
마린다는 울음을 참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마님이 제게 남기신 말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냐.”
에드먼은 꽉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장에서 홀로 적군에게 포위됐을 때도, 마물의 마기에 공격당해 팔이 썩어들어 갈 때도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다.
에드먼은 회피하고자 했다. 왠지 모르게 듣고 싶지 않아 시녀의 말을 멈추려고 했다. 그러나 시녀가 한발 더 빨랐다.
쪽지에서 눈을 뗀 에드먼과 마린다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마린다의 눈이 붉은빛으로 번쩍. 빛이 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마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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