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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21화 (21/145)

21화

데미안은 미간을 좁히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부터 내린 폭설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 대모님께서 저 폭설 때문에 오늘도 못 오실 것 같답니다. 참 다행이죠.”

벤트는 덕분에 겨우 한숨 돌렸다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데미안과 벤트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문이 제대로 잠긴 것을 잘 확인한 벤트는 데미안에게 품에 넣어 뒀던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이렇다 할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데미안은 이젠 그 말을 무덤덤하게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죽은 사람의 남은 자취를 찾는 것도 어느덧 1년째다.

에드먼은 부족함 없이 데미안을 키웠다. 물론 뜨거운 부정은 없었으나 데미안은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기에 괜찮았다.

이 때문에 데미안은 자신의 친모가 그립다거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수고했어. 이만 가.”

“저, 그런데 소공작님.”

벤트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왜 각하께 여쭤보지 않으세요?”

데미안이 윈터가에 들어온 건 네 살 때다.

보통 사생아더라도 갓난아기일 때부터 입적되기 마련이었기에 4년이나 지난 후에 나타난 데미안이 아무리 에드먼과 똑 닮았다더라도 친자냐 아니냐의 대한 말이 많았다.

그 논란은 꽤 오래 지속되었는데, 그 영향 탓인지 데미안은 어릴 적부터 유난히 눈치가 빨랐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제 친모에 대해 말하기 꺼린다는 것을 손쉽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친모의 정보도 몰래 찾는 것이었다.

“정보로 찾는 건 한계가 있고, 각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굳이 죽은 친모의 이야기를 에드먼에게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네가 알아서 무엇 하게. 이제 찾는 게 지겨워? 바짓가랑이 붙들고 뭐든 다 할 수 있다더니.”

“소공작님!”

벤트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벤트는 윈터가의 가신 가문 중 뉴벨 남작가에서 태어났다.

귀하게 얻은 늦둥이 아들인지라 남작 부부가 어화둥둥 키웠고, 명석한 편인 벤트는 상당히 거만하게 자랐다.

얼마나 거만하냐면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데미안이 천재라는 말을 듣고 상식 퀴즈를 하다가 진 대가로 마구간 청소를 했을 만큼.

귀하게만 자란 벤트는 마구간 청소하다 말고 뛰쳐나와 데미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했다. 뭐든 다 할 테니 마구간 청소는 싫다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 이렇게 되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툴툴거리던 벤트는 입을 삐죽거렸다.

“잠깐.”

데미안은 그런 벤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작은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종이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런 문양을 쓰는 이를 알아봐. 검부터 만년필까지 여러 물건을 만드는 것 같아.”

“정보가 적어서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상관없어.”

“예, 알겠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수업이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벤트도 일찍 퇴근했다.

데미안은 책상에 쌓인 서류를 하나 집었다. 일정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일을 시작할 차례이다.

데미안에게 올라오는 서류는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가십거리부터 시작해 가신 가문의 세금 심사 등등 가지각색이었다.

‘첩보 서류?’

에드먼에게 가야 할 서류가 자신에게 온 모양이다. 데미안은 문득 열어 본 서류의 내용이 심상치 않자 덮으려던 것도 잠시, 다시 펼쳤다.

데미안의 표정은 글을 점점 읽어 내려갈수록 급격히 변화했다.

‘성녀?’

먼 과거. 초대 성녀의 자식 중 하나가 신전을 세웠다.

2세대 성녀를 마지막으로 성녀임을 나타내는 ‘표식’은 조건을 두지 않고 한 세대의 한 사람에게만, 이마에 나타난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바뀌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마지막 성녀가 세상을 떠난 후 새로운 성녀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대신관이 방대한 성력을 가지고 있기에 신전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것에 관한 추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한 첩보가 왔다. 무려 10년 만에 성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데미안은 서류를 끝까지 보았지만 신전의 경계 태세가 강화되어 더 이상의 정보는 구하지 못했다는 말로 끝이 나 있었다.

신전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데미안은 이것이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았다.

데미안은 무의식중에 목걸이를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손에 무언가 걸려 꺼내 보니 로켓이었다.

데미안이 로켓을 열자 다프네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은 채 측면으로 고개를 틀고 눈을 살짝 내리깐 다프네는 수도에서도 열렸던 연회 때의 모습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제 소원이요? 당신이 사라지는 겁니다.”

만약,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사라지지 않으셨을까. 데미안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만약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딸깍.

데미안은 그 그림을 쳐다보며 생각의 파도에 휩쓸려 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아주 작은 힘만으로도 로켓 뚜껑이 닫히면서 다프네의 초상화가 모습을 감추었다.

데미안은 조급한 손길로 로켓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성녀와 관련된 안건을 에드먼에게 전하기 위해 서류를 들고 집무실을 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데미안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반쯤 열린 방 앞이었다.

“복원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사망했다고 하셨죠?”

“예.”

“그럼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각하께 말씀 전하지요.”

대화를 나누던 벤자민은 문 앞에 서 있는 데미안을 발견했다.

수도에서 열린 연회 때 본 데미안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놀랍도록 자라 있었다. 정말이지, 에드먼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오늘 아침에 한 달 만에 재회했을 땐 연회 때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소공작님? 어쩐 일이십니까?”

“…그 그림.”

데미안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그림에 시선을 빼앗겼다.

잃어버렸다가 찾았지만 손상이 심하다는 그 그림. 다프네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찢어진 것이 보였다.

“아, 그것이 맞습니다.”

“범인이라던 하녀는 어디 있지?”

“지하실에 있습니다.”

“그렇군. 아버지가 내게 나머지 처리를 맡기셨으니 따로 보고는 하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끝맺기도 전에 데미안이 사라졌다.

데미안은 에드먼에게 전할 서류도 잊은 채 지하실로 향했다. 조용한 지하실에는 데미안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중간에 간수를 만나 그림을 훔치고 손상을 입혔다던 하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

데미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엎어져 있는 하녀를 보고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간수를 불러 감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패 상태를 보니 죽은 지 며칠 된 것 같았다.

간수들이 시체를 옮기자 감옥 안에는 끈적한 피 웅덩이만 남았다.

별 소득을 얻지 못한 데미안은 이내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몸을 돌렸다.

“이건….”

그곳에 놓인 것은 찢어진 옷 위에 피로 그린 지도였다.

***

톡, 톡.

요한의 보고를 들은 에드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위험했습니다.”

벤트에게 정보를 쥐여 줄 뻔했지만 간발의 차로 그것을 막아 냈다.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에드먼은 고민했다.

1년 전부터 데미안은 갑자기 제 친모에 대해 미친 듯이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과거에 이러한 때를 미리 대비해 지워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나도 안다.”

추후, 데미안은 알게 될 거다. 자신의 친모에 대해.

하지만 에드먼은 그 시기를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에드먼, 난 아버지에게 보여 드릴 거야.”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바라보며 복수를 꿈꾸던 여인의 모습이 흐릿한 잔상으로 남아 아른거렸다.

에드먼이 데미안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부터 모두가 쉬쉬하던 친모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기엔 데미안은 아직 어리숙하다.

곧이어 밤이 찾아왔다.

모두가 기척을 지우고 어둠에 몸을 숨겼다. 에드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빛을 고요한 새벽에 뿌릴 무렵.

초대받지 않은 밤손님이 드디어 나타났다.

***

새벽이 내려앉은 시간.

데미안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는 것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다가 선잠이 들었으나 낯선 기척에 잠에서 깼다. 데미안은 그 기척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착각이었나.’

그러나 그 낯선 기척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일반인도, 기사도 아닌 분명 훈련받은 살수의 기척이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몸을 뉘었으나 이내 눈을 떴다. 날아간 잠이 도무지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을 포기한 데미안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서랍의 맨 첫 칸을 열자 낮에 주웠던 것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너덜너덜한 옷을 조각조각 모으자 하나의 지도로 완성됐다.

당시 감옥에 웅덩이로 고여 있던 피 위에서 발견한 탓에 자세히 봐야 얼룩과 지도가 구분됐다.

데미안은 그것을 빛 아래에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까보다 선명해진 지도가 보였다. 유심히 살폈지만 워낙에 급하게 만들어져서 길만 겨우 보이고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진작 지도를 외운 지 오래지만 계속 붙들고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지도를 외우면 뭐 하나. 어딘지를 모르는데.

데미안은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지도에 더는 손상이 없게끔 조심히 넣은 후 몸을 웅크렸다.

잠이 오지 않았으나, 억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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