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요한에게 들었습니다. 두통과 불면증이 더 심해지셨다고요.”
“그새 다 말했군.”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각하를 걱정하는 마음이 클 뿐입니다.”
에드먼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은 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사이 집사는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빛이 들어오자 에드먼은 눈을 찡그렸다.
“…마님께서 사라지셨다고요.”
위스키가 남은 잔을 들어 올리던 에드먼의 손이 멈칫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곧 정리될 문제야.”
“각하는 참 여전하십니다.”
집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각하가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드먼은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켠 후 큰 소리를 내며 세게 내려놓았다.
“위스키를 가져와. 독한 것으로.”
“이미 많이 드셨습니다.”
집사는 에드먼을 만류했다.
테이블을 나뒹구는 병만 해도 다섯 개가 넘었다.
“이렇게 취하신 걸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최근?”
“예. 한 달 전…. 그러니까, 연회가 끝내고 곧바로 북부에 도착한 날이니까 토벌 전날이군요.”
집사는 품 안에서 마력석을 꺼내 끼워 넣었다. 창문을 엶과 동시에 찬 공기로 가득 찼던 방은 빠르게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집사는 어질러진 술병을 정리했다. 그리고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다프네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하지만 모른 척 그것을 내버려 두고 술병을 마저 치웠다.
“무슨 일이신지 오늘처럼 집무실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는 취하지 않으셨습니까.”
“…….”
에드먼은 눈을 깜빡였다. 집사의 말대로 에드먼은 토벌 전날 잔뜩 취해 저택으로 돌아왔다.
“술 냄새가 지금만큼이나 진동하셨는데 멀쩡히 침실로 올라가시더군요.”
집사는 기억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집무실에 계셨지요.”
“…기억에 없다.”
“원래 술을 많이 마시면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다.”
에드먼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술을 멀리하는 편은 아니다. 생각날 때 종종 마셨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침대에 몸을 뉘었던 기억은 있다. 좁고, 푹신하고, 따스했던.
에드먼은 제 기억 속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의 침실을 넓었으며 딱딱했고 온기라곤 없다.
그 순간, 열띤 기억 파편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숨을 나누고, 온기를 나누고, 서로를 뜨겁도록 끌어안았던.
“집사.”
“예.”
“내 침실을 정리하는 시녀를 데려와.”
집사는 갑작스러운 에드먼의 명이 의아했으나 곧바로 시녀를 데려왔다.
그사이 환기가 어느 정도 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녀는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비틀거렸다.
“각하를 뵙습니다.”
“한 달 전 토벌 당일. 내 침실을 정리한 기억이 있느냐.”
“정리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 정갈하게 되어 있어 거의 손대지 않았습니다.”
“…물러가라.”
에드먼은 시녀를 물렸다.
기억이 끊기고 이어지는 첫 기억은 집무실이었다. 그는 아침까지 이어진 숙취 때문에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내게 다프네의 실종을 고했던 하녀가 있다. 데려와.”
자꾸만 누군가를 데려오라는 에드먼을 향한 의아함은 커졌으나 벤자민은 착실히 안나를 데리고 왔다.
“각, 각하를 뵙습니다.”
빨래 도중 불려 온 안나는 허리를 푹 숙였다.
긴장된 탓인지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렸기에 안나는 최대한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애썼다.
“다프네가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토벌을 떠난 후로 이상했던 점을 모조리 말해 보아라.”
에드먼은 이상한 점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물었다.
안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게… 이상한 점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라지시기 며칠 전 제 옷을 빌려 입으시고 저택을 비우셨던 적 있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어딜 갔었지?”
“따로 듣지 못했지만… 희미하게 약초 냄새가 났던 것 같습니다.”
약초 냄새.
의원을 찾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집사!”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벤자민을 불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벤자민이 문 앞에 바로 대기하고 있었기에 그는 곧바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마을에 있는 의원을 불러.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예? 그게 무슨… 각하!”
밴자민은 순식간에 자신을 지나친 에드먼을 다급히 따라갔다.
마구간에 도착했을 땐 에드먼은 이미 자신의 말을 타고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벤자민은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각하! 잠시만 진정해 보십시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에드먼은 벤자민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았다.
“세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가서야 합니다!”
도저히 그를 멈출 수 없다고 판단한 벤자민은 뒤에서 열심히 소리쳤다. 에드먼은 벤자민이 말한 방향대로 움직였고, 곧 작은 약초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말의 발이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린 에드먼은 가게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쿠! 깜짝이야. 무슨 일이길래 그리 급하게… 각, 각하?”
약초를 빻고 있던 의원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약 한 달 전쯤 성에서 누군가 찾아온 적이 있을 거다.”
“예, 예?”
“그 하녀가 무슨 처방을 받았는지?”
에드먼이 쏟아 내는 말에 잠시 멍해졌던 의원은 에드먼의 기세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의원은 이내 처방전 기록을 적은 종이를 뒤적거렸다.
마물이 나타나고 땅이 거의 1년 내내 얼어붙어 있는 지형의 특성상 약초꾼보다는 신문물을 다루는 주치의가 더 많다. 오는 사람이 드물긴 해도 이러한 이유로 마을에 하나 남은 약초방이 여기였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여, 여기 있습니다.”
에드먼은 의원이 내민 종이를 건네받았다.
“이 약초는 어디에 쓰이는 것이지?”
“그것이….”
문이 벌컥 열렸다. 벤자민은 숨을 헐떡이며 약초 가게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의원의 말을 들은 에드먼은 벤자민을 지나쳐 안장 위로 올라탔다.
“각하!”
에드먼은 벤자민의 부름에도 그를 기다려 주지 않고 곧바로 저택으로 갔다.
에드먼과 벤자민이 갑자기 말을 타고 밖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삽시간 퍼졌기에 많은 이들이 나와 있었다. 그중에는 알렉과 요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투레질하는 에드먼의 말을 진정시킨 알렉이 물었다.
“알렉, 당장 검은 기사단을 모아.”
“예?”
“서둘러!”
알렉에게 무작정 명을 내린 에드먼은 곧바로 집무실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함임을 눈치챈 요한은 그를 따라 올랐다.
“각하. 일단 진정 좀 하십시오.”
요한은 에드먼의 앞을 가로막았다.
“요한, 비켜.”
“각하!”
“다프네가.”
갑자기 나온 마님의 이름에 요한은 얼굴이 굳었다. 에드먼은 화를 억눌렀다.
“다프네가….”
에드먼은 숨을 골랐다.
“그것이… 임신 여부를 알려 주는 약초입니다.”
“다프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
“그게, 무슨….”
요한은 당황스러웠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듯 둘이 잠자리를 같이 해야 아이가 생길 텐데 지난 5년 동안 합방 한 번 이루어진 적 없다.
더군다나 둘은 첫날밤부터 각방 생활을 이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임신이라니?
요한이 한평생 곁에서 보좌한 에드먼은 결단코 육체적 쾌락에 눈이 멀어 순간적인 충동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다프네가 왜 떠났다고 생각하나.”
“그건….”
요한은 에드먼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요한도 그것을 알 방도가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임신과 연관 지으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요한은 문득 가설을 세웠다.
‘만약 마님께서 납치당한 거라면. 아니면 블레드 쪽에서 마님의 임신 소식을 알고 각하를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라면.’
윈터가의 핏줄은 귀하다. 대부분 한 세대에 한 아이만 태어났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주 늦게 얻거나 혼외 자식인 일이 빈번했기에 윈터 내외는 언제나 그 끝이 좋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런 윈터가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아이를 납치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 와중에 윈터가의 씨를 품은 여인이 사라졌다. 이건 홀대받는 마님이 사라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니 요한. 비켜.”
에드먼은 요한을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갔다.
순간 불쑥 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요한은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혔다.
“각하. 좀 더 기다려 보십시오. 오늘 블레드 쪽에서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마님이 납치당한 게 확실해집니다.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나더러 반나절을 더 기다리라는 건가?”
“오히려 급하게 행동하면 아무것도 모르던 블레드 후작에게 답을 알려 주는 꼴이 됩니다.”
요한은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이 모든 건 마님의 계획일지도 모른다.
마님은 각하를 사랑하고 각하는 마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각하의 티끌만 한 관심을 끌기 위해 벌인 자작극일지 그건 또 어떻게 아는가.
더군다나 배에 밴 자식이 에드먼의 씨라는 보장도 없다.
하룻밤의 실수일 수도 있고, 지난 5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선 단 한 번도 합방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필요 이상으로 너무 흥분한 에드먼을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대모님께서도 계시지 않습니까. 괜한 소란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
“각하. 부디 잘 생각해 주십시오.”
요한은 간곡히 부탁했다.
에드먼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 단추를 풀던 손을 멈췄다.
“…알겠다.”
초조하게 에드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요한은 얄팍한 숨을 터트렸다. 지금은 저택에도 없는 대모님을 들먹일 정도로 요한은 이 상황을 막는 데 급급했다.
기지를 발휘해서 상황을 모면했으나 오늘 밤에 블레드 쪽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이다. 그 전까지 다른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생각에 잠긴 요한이 사라지고, 에드먼은 벤자민을 통해 은밀히 알렉을 불렀다. 에드먼은 알렉을 세워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명을 내렸다.
“영지부터 샅샅이 뒤져.”
“각하.”
“처음 수색한 부분이 겹쳐도 상관없어. 인원은 최대한 많이 풀어라. 그리고.”
“…….”
“요한은 물론 아무도 모르게 해라.”
***
데미안은 걸음을 멈췄다.
“소란스럽죠?”
수업이 끝날 시간에 맞춰 나온 벤트가 데미안의 곁에 섰다.
벤트의 말마따나 저택은 어수선했다. 벤트는 곧바로 데미안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아버지께서?”
“예. 갑자기 마을에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외투도 걸치지 않은 셔츠 차림으로 저 눈보라를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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