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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9화 (19/145)

19화

“자, 백작님. 제게 편하게 말씀하시면….”

벤트의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데미안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그림을 꺼냈다.

“…됐다.”

다프네의 그림은 그가 유심히 지켜보던 로켓에 딱 들어맞았다. 데미안은 그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로켓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몸을 돌리던 찰나, 데미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만년필이었다.

데미안은 만년필을 보고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만년필에는 익숙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에드먼은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덜컹, 덜컹.

매서운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를 빼고는 적막했다. 고요했으나 평화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에드먼은 기계처럼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개는 주인을 따라 합니다. 주인이 낮잡아 보는 이는 개도 낮잡아 봅니다.”

주인과 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에드먼은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똑똑.

“준비 완료됐습니다.”

수하의 말에 에드먼은 준비된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은 다프네의 방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다.

해가 떠올랐다.

새벽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밤인 모양입니다.”

블레드 후작의 사람이 오지 않았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로 얼씬거리지 않았다.

“…블레드 후작이 눈치챘을 가능성은 있는가.”

“없습니다.”

닉은 단호히 대답했다.

닉이 단기간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빠른 일 처리와 결단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철저함 때문이다.

의뢰에 실패할지언정 흔적은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흔적이 하나도 없다 싶으면 닉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오늘 밤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지.”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닉은 집무실로 돌아서려는 에드먼을 붙잡았다.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을 찾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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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작님. 어제 무슨 일 있으셨나요.”

데미안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두꺼운 털옷을 걸친 소피아가 데미안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대모님. 그저 생각할 것이 있어서….”

데미안이 평소대로 돌아오자 소피아는 안심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 온실은 언제 봐도 참 아름답군요.”

소피아는 고개를 들어 온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썸머가 잘 가꾼 식물을 구경했다.

소피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자 데미안의 그린 듯한 완벽한 미소는 사라졌다.

데미안은 소피아의 뒤에서 몇 걸음 떨어진 채 생각에 잠겼다.

“이건….”

평소 자주 쓰던 만년필에서 익숙한 문양을 발견한 데미안은 곧바로 침대 아래 놔둔 검을 꺼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매우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같은 이가 만든 것을 각각 다른 이에게 받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단 한 명이 보낸 것이다.

“…어머니.”

다프네가.

만년필과 저 검. 데미안은 곧바로 온 책상을 뒤져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것들을 골라냈다.

총 15개.

데미안은 엉망이 된 책상을 정리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15개의 물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에 갇혀 헤매고 또 헤매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했으나 데미안은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이건 위선에 불과해.’

지금까지 외면할 땐 언제고 이런 물건을 보낸 이유는 오직 단 하나다. 바로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다프네는 끝까지 위선자였다.

“후계자 수업은 들을 만한가요?”

꽃 구경을 마친 것인지 소피아는 뒤돌았다.

“예.”

“각하께서는 소공작님의 나이에 후계자 수업을 끝내셨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대모님.”

데미안은 자라 오면서 정말 보기 드문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데미안은 타고났다.

하지만 데미안은 자신이 결코 에드먼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 수 위였고, 타고났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이였다.

“지금보다 더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를 위해, 그리고 가문을 위해.”

“대모님께서 실망하시는 일 만들지 않겠습니다.”

소피아는 데미안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소피아의 손아귀 힘에 데미안의 손이 새하얘졌다.

“그 말. 꼭 지키셔야 합니다.”

“예.”

분명 따스한 손인데도, 데미안은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에 담근 듯 어깨를 잘게 떨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랜만에 북부에 왔더니 약속이 많아 소공작님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네요.”

“전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소피아가 온실을 나가고, 데미안은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를 풀었다.

고작 단추 하나일 뿐인데 조이던 숨통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후.”

데미안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음 일정이 촉박했으나 지금은 잠시 쉬고 싶었다.

“소공작님?”

그때, 정원사 차림을 한 썸머가 나타났다.

“썸머? 왜 여길….”

오늘은 썸머가 정원사 일을 하지 않는 날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날을 골라 소피아와 온실에 온 것인데 하마터면 둘이 마주칠 뻔했다.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잠깐 들렀습니다.”

썸머는 가까이 다가왔다.

“대모님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썸머는 나직이 물었다.

“아직도 그러십니까?”

썸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아는 데미안은 그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우리 가문에 애정이 크신 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전 아직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고작 열 살이었던 소공작님을….”

“썸머!”

데미안은 다급히 썸머의 말을 가로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데미안의 창백해진 얼굴을 본 썸머는 입을 꾹 닫았다.

“그 일, 다시는 얘기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썸머의 실수였다. 데미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분명 그날 약조했어. 그렇지?”

“…예. 맞습니다.”

“난 다음 일정이 있어서. 그럼 수고하게.”

몸을 돌린 데미안은 멈칫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그거.”

데미안이 가리킨 것은 썸머가 들고 있는 꽃이었다. 온실에 핀 탐스러운 꽃이 아니라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들꽃. 대련장 구석에서 본 들꽃이 확실했다.

“아, 이건 대련장에 있던 꽃입니다.”

“그걸 왜 가지고 왔지?”

“원래 이 들꽃을 보살피던 하녀가 한 분 있었는데 한 달 전부터 보이지 않아서 제가 당분간 관리하려고 가져왔습니다.”

“…하녀? 그 하녀의 이름이 무엇인데?”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해 본 게 아닌지라.”

“그럼 눈 색이나 머리색은? 기억나?”

“머리색은 갈색이었고, 눈 색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썸머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이내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불현듯 다프네가 꽃 구경을 좋아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어지는 생각에, 데미안은 그것이 황당하다고 여겼다. 귀하게만 자랐을 여자가 저런 들꽃을 보살피고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

“할 말이 있어요.”

누군가 에드먼의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말해야 해요.”

돌아서려는 에드먼을 다급히 붙잡은 여자는 이내 스르륵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 모습에 에드먼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여자가 묻는 것이 더 빨랐다.

“절 부인이라고 생각하신 적은 있으세요?”

그는 좀 더 자리에 남아 여자를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에드먼의 몸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 겨우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로브가 떨어져 있었다.

마른 피로 물든 로브가.

“마님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색대의 말에 따르자면 늑대 소굴에는 이미 사람의 뼈가 많았고, 로브에 묻은 피는 사람의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이 로브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

로브 위로 천이 떨어졌다.

에드먼은 천이 떨어진 곳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그림이 있었다. 얼굴을 아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어진 그림이.

“내가 사라지면, 그땐 당신이 날 생각할까요?”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에드먼은 어두운 방에서 눈을 떴다.

집무실은 온통 궐련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안주머니를 더듬다가 테이블 위의 텅 빈 궐련 통을 발견하고 힘없이 손을 떨궜다.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직 낮인가.’

빨리 밤이 되었으면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원히 밤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다.

에드먼은 심장이 날뛰고, 손발이 오그라들고, 입 안이 바짝 마르는 이것이 불안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떤 것을 불안해하고 있는가.

에드먼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지?

에드먼은 드문드문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정신을 나른하게 하는 궐련 연기 때문인지 기억은 이미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에드먼은 위스키를 집어 잔에 기울였지만 몇 방울 떨어지다가 멈추었다. 에드먼은 잠들기 전의 자신이 다 마셨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했다.

에드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부르셨습니까?”

들어온 누군가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방 안을 가득 채운 궐련 연기에 몸을 휘청였다.

“…벤자민?”

벤자민이었다.

“언제 돌아왔지?”

“몇 시간 안 됐습니다.”

수도에서 데미안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연회를 치르고 벤자민은 북부로 향했다. 그리고 약 한 달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것이다.

벤자민은 연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몇 년 전까지 에드먼의 곁을 오래 지켰기에 내성이 생겨서 다행이지 내성이 없는 이였다면 바로 기절하고도 남았다.

“효과가 더 세진 것 같습니다.”

5년 전에도 독했으나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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