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후우.
바람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요한의 얼굴을 뒤덮었다. 순간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독한 궐련이다. 에드먼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피웠다.
“요한.”
치이익.
불은 분명 다른 곳에 지져지는데 마치 제 살결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요한은 자신의 발아래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오러를 발견했다. 요한은 그제야 깨달았다.
각하는 지금 침착하신 게 아니라 화를 주체하지 못하시는 것뿐이라고.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듯 꾸물거리는 오러를 보며 요한은 마른침만 삼켰다.
“넘어가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대모님께 연락을 넣은 네 수하, 지하실로 보내.”
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예.”
에드먼은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내 준비되었다는 요한의 말을 듣고 지하실로 향했다.
***
안젤라는 어렴풋이 들리는 비명에 눈을 번쩍 떴다.
눈동자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몸의 긴장을 풀었다.
‘오늘도 안 왔어.’
안젤라는 각질이 허옇게 올라온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불안에 떨었다.
그 하녀는 이틀이 지났음에도 시녀장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보석만 홀라당 먹은 것일까. 안젤라는 입술에서 피가 날 때까지 씹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안젤라는 황급히 철창에 달라붙었다. 하녀가 음식을 가지고 올 시간인 모양이다.
그러나 음식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 하녀가 아니었다.
“아직도 살아 있네?”
간수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안젤라를 향해 빵을 던졌다.
안젤라는 간수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앙상한 손을 뻗어 그 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퍽퍽한 빵이 목에 걸릴 법도 하지만 어느새 요령이 생긴 안젤라는 물 없이도 빵을 순식간에 해치우게 됐다.
안젤라는 빵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빨다가 이상한 맛에 서둘러 손가락을 뺐다. 아까부터 미묘한 맛이 난다 싶었는데 자신의 손가락 때문인 듯했다.
‘배고파.’
아직 부족했기에 아쉬움이 남은 안젤라는 슬그머니 철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뚜벅. 뚜벅.
안젤라는 다시금 들리는 발소리에 바르작거리며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안젤라는 혹여 자신을 죽이려는 간수일까 불안에 떠느라 발소리가 겹쳐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발, 제발.’
안젤라는 부디 저 발걸음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길 바랐지만 그 간절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젤라는 정확히 자신이 갇힌 곳 앞에 멈춰 선 발걸음에 망연자실했다.
“안젤라.”
“…시녀장님?”
하지만 안젤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개를 돌리자 하녀의 옆에 로브를 걸친 시녀장이 서 있었다.
“고생 많았다.”
“시녀장님….”
안젤라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래. 누명을 썼다고?”
“예, 예. 저는 정말 훔치지 않, 않았어요.”
시녀장은 오물로 더럽혀진 안젤라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었다.
자신을 돈 많은 귀족의 장난감과 다름없는 첩으로 팔아 버리려는 시녀장의 속셈을 알게 된 후부터 둘의 사이는 남보다 못한, 그저 장부 조작 일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맞았다.
이리도 자신을 따스하게 내려다보는 시녀장의 눈을 마주하자 안젤라는 그간 시녀장에게 쌀쌀맞게 대했던 것이 후회됐다.
‘내가 왜 그랬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니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시녀장님. 어서 절 꺼, 꺼내 주세요. 제가 진, 진범을 알고 있어, 요.”
“시녀장님. 곧 간수가 올 거예요. 빨리 나가야 해요.”
하녀는 갑자기 시간이 지체되었다면서 시녀장을 다그쳤다. 하지만 이미 안젤라의 말을 들은 시녀장은 하녀를 제지하고 귀를 기울였다.
“진범? 진범이 누구더냐.”
“그건…. 쿨럭!”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눈 한 번 깜빡하자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자신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뭐지…?’
안젤라는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아, 드디어 죽네요.”
하녀, 아니 마린다가 로브를 벗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도.
“쯧. 너무 늦게 온 모양이야.”
따스한 미소를 짓던 시녀장이 자신과 맞잡았던 손을 손수건을 닦을 때도.
“마린다, 내가 적당히 넣으라고 했잖니.”
“죄송해요. 그래도 죽는 모습은 볼 수 있잖아요.”
아.
안젤라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조금 전 먹은 이상한 맛이 나던 빵. 하녀의 정체. 시녀장의 말.
모든 게 하나를 뜻하고 있었다.
‘나, 죽고 있구나.’
안젤라는 축축하게 젖은 입 안을 채운 게 자신이 토한 피라는 걸 알아차렸다. 동시에 고통이 밀려왔다.
타들어 갈 듯 뜨거운 목과 배와는 달리 찬 기운이 손끝부터 시작했다. 몸은 작게 경련했고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뒤집혔다.
“큽, 크흡.”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이 혀가 말려들어 왔기에 안젤라는 몸을 배배 꼬았다.
“어때요, 제 계획?”
“좋구나. 이 망할 것이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어.”
안젤라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게. 얌전히 죽을 것이지 왜 나까지 잡아끌었을까.”
시녀장은 안젤라의 무지함에 혀를 찼다. 점점 죽어 가는 눈동자가 통쾌했으나 찝찝했기에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마린다. 이제 가자.”
“네. 잠시만요.”
시녀장은 미련 없이 몸을 휙 돌렸다. 마린다는 안젤라의 앞에 무릎을 쪼그려 앉았다.
“지금 네 꼴을 봐.”
도르륵. 안젤라는 눈을 굴렸다.
“내가 이겼어.”
넌 졌고.
마린다는 싱긋 웃었다.
“잘 가.”
안젤라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점점 굳어 가는 몸을 하나하나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두 개의 인영을 보며 안젤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얼마 후, 딱딱하게 굳은 몸은 다신 되돌아오지 못할 온기를 잃고 차게 식었다.
***
데미안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눈보라 사이로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한 붉은 노을이 데미안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소피아의 등장 때문만이 아니라 저택 전체가 어수선했다. 사용인들이 평소보다 더 눈에 띄지 않기에 조용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멍하니 보고 있던 데미안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소공작님.”
“비에슈 백작.”
가신 중 한 명인 비에슈 백작은 허리를 숙였다.
“드세요.”
비에슈 백작은 반쯤 까져 번들거리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연신 훔쳤다.
“수업을 끝내고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 백작은 어쩐 일로 온 겁니까?”
“제가 공작님의 성년식에 참석 못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한 마음으로 소소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비에슈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마력석 광산 사업을 하는 자다.
마력석이란 보석과 비슷한 개념을 가진 것으로 광산에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마력석 안에는 검사의 오러, 마법사와 정령사의 마나, 성력까지 담을 수 있다.
마력석은 쓰임이 많다.
오러나 마나, 성력이 담긴 마력석을 기계에 넣으면 방을 순식간에 뜨겁게 달굴 수 있어 북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다.
이 외에도 쓰임이 다양한 마력석은 제국의 반 이상이 비에슈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정도로 사업 판이 컸고, 마력석의 순도도 다 높았기에 모두가 비에슈를 통해 마력석을 얻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과거의 한 자락에 불과하다.
비에슈 백작은 가주 자리에 오른 지 고작 10년 만에 제국의 돈줄 중 하나였던 자신의 가문을 말아먹었다. 비에슈 백작가는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재산은 물론 소유하고 있는 광산과 마력석을 모두 몰수당했다.
데미안의 성년식에도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남은 마력석, 즉 전 재산을 몰수당할 때도 목숨 걸고 숨겨 두었던 마력석을 가져왔다고 했으나 데미안은 시큰둥했다.
“수하를 통해 전해 받겠습니다.”
“소공작님. 그러지 마시고 딱 한 번만 보는 게 어떻습니까?”
익숙한 데미안의 반응에 평소라면 그저 명을 따랐을 테지만 비에슈 백작은 어쩐 일인지 데미안을 붙잡았다.
“구하기 힘든 마력석이 들어왔습니다.”
비에슈 백작은 누가 들을까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크고 귀하지요.”
크고 귀한.
그 단어에 홀린 듯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나 비에슈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응접실로 데미안을 안내하는 게 더 빨랐다.
구하기 힘든 마력석을 가지고 왔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마력석은 하나같이 수준 높은 장인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건 뤼방드 제3대 장인인 리콜나스가 제작한 것으로….”
정말 마력석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닌 데미안은 비에슈 백작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 반응을 본 비에슈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로 히든카드를 꺼냈다.
“사실 이걸 보여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에슈 백작이 꺼낸 것은 일반 나무 상자였다. 실상 속은 별 볼 일 없으니 포장만 화려하던 이전 마력석과는 달랐다.
투박한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작은 로켓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에슈 백작은 로켓의 뚜껑을 열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마력석이었다. 녹색이 오묘하게 섞인 마력석은 세공하지 않은 것으로 주먹의 반 정도의 큰 크기를 자랑했다.
“인어의 눈물입니다.”
비에슈 백작은 이 보석이 데미안의 눈길을 끌었음을 단번에 알아챘다.
“일부러 세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어의 눈물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마력석임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마나, 오러, 성력까지 모두 담을 수 있으….”
“이걸로 하지요. 벤트.”
비에슈 백작은 활짝 웃었다.
“역시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인어의 눈물은….”
“받아라. 잃어버리지 말고.”
비에슈 백작은 말을 다 이어 가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이 로켓에서 인어의 눈물만 쏙 빼서 옆에 서 있던 수하에게 던지고 자신은 로켓만 챙겼다.
몇억 골드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에 비에슈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 소공작님. 조, 조심히 다루셔야…”
“벤트에게 원하는 걸 말하세요.”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만한 건 다 들어줄 겁니다.”
엉겁결에 데미안을 따라 일어나 그를 붙잡으려던 비에슈 백작이 우뚝 멈췄다.
데미안은 진작 비에슈 백작의 접근 의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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