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래. 나도 잘 알지.”
데미안이 순순히 대꾸하자 벤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한 판 더.”
“아.”
이러려고.
벤트는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데미안의 손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제 뜻을 꺾고 참고 있으신데 그깟 대련이야 하루에 몇 번쯤은 할 수 있다.
“예예. 합니다, 해요.”
벤트는 데미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던 도중 데미안의 허리춤에 걸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데미안은 선물 받은 검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
그 좋은 검을 왜 안 쓰시지?
“소공작님. 근데 그때 선물 받은 검은 어디 두고 예전 검을 쓰십니까?”
현재 검도 나쁘지 않지만 선물 받은 검은 지금 것과 견줄 수도 없다.
벤트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순전한 우연인지 데미안이 우뚝 멈췄다. 벤트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데미안이 그 검을 마님이 보냈다고 생각한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종이?’
한편, 데미안은 동그랗게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저, 소공작님? 제가 한 말의 뜻은… 으악!”
오로지 데미안에게 의지하고 있던 벤트는 갑자기 자신을 지탱하던 힘이 사라지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 일의 장본인인 데미안은 벤트의 손을 떨군 후 홀린 듯 그 종이를 집었다.
펼치자 드러난 것은 그림이었다.
“…어머니.”
다프네였다.
데미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종이 뭉텅이를 하나 더 발견했고, 다가가 펼쳤다.
아까와는 다른 구조로 그려진 다프네의 그림이었다. 몇 걸음 가면 하나가 떨궈져 있고 또 다가가면 저 멀리 또 다른 하나가 떨궈져 있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하나씩 놓여 있는 종이 뭉텅이를 따라가던 데미안은 이 길로 쭉 가면 소각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뛰어갔다.
“멈춰!”
“소, 소공작님?”
종이 더미를 안에 쑤셔 넣는 것을 보고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불은 종이에 옮겨붙은 후였다.
데미안은 화재를 대비해 배치된 물 양동이를 그 위에 쏟았다. 불길이 꺼지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덩어리로 뭉친 종이를 하나하나 펼쳤다.
불에 태워지고 물에 젖고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었지만, 데미안은 모조리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괜찮은 건 처음에 주웠던 세 장의 그림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구겨짐이 심해 찢어진 게 두 장이었기에 멀쩡한 건 단 한 장뿐이었다.
아마 에드먼이 데려온 화가가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것을 소각하러 가는 사용인이 우연히 떨군 것일 테고.
데미안은 찢어질세라 조심조심 종이를 펼쳤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내리깐 다프네였다. 그림에서마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다프네의 모습을 데미안은 빤히 쳐다보았다.
데미안은 그림의 사소한 한 획도 놓치지 않을 것처럼 그림을 유심히 보고 눈에 새겨 넣었다. 다프네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눈이 붉어질 때까지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소공작님!”
문이 열리고 벤트가 헐레벌떡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벤트는 어깨를 거칠게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대, 대모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데미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이제 막 정문을 통과하는 마차가 보였다.
데미안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 와중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구겨진 옷도 갈무리했다.
간발의 차로 데미안이 도착하자마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대모님.”
데미안은 완벽한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었다.
“소공작님.”
마차에서 내린 노년의 여성은 우아한 몸짓으로 제 손을 데미안의 손에 포갰다.
대모, 소피아.
전대 공작의 친모이자, 자신을 내쫓았던 선대 공작이 죽자마자 나타나서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윈터가의 대모라는 칭호를 받아 냈으며 한낱 정부였으나 지금은 어디 가서 결단코 무시 받지 않는 위치에 선 여인.
그리고 동시에.
“…어서 오십시오.”
데미안을 긴장케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
ㅎㅂㄹㄱ.공금
“성년식은 잘 치르셨나요?”
“예. 촉박한 일정임에도 아버지가 대부분의 마물을 처리하셔서 시간에 맞춰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소리 없이 잔을 내려놓은 소피아는 조용히 데미안을 불렀다.
“도련님.”
“예, 대모님.”
“아직도 공작 각하를 아버지라 부르는 습관을 못 버리셨나요?”
데미안은 제 실수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데미안이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데미안은 당황하지 않은 척 찻잔에 입술을 댔다.
데미안은 최대한 느긋하게 찻물을 입에 머금고 음미했다. 이제 10초 남짓한 시간 동안 변명의 거리를 찾아야 한다.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데미안을 응시하던 소피아는 싱긋 웃었다.
“실수한 것이겠죠?”
데미안은 멈칫하는 것도 잠시 찻잔을 내려놓고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눈은 곱게 휘어졌다.
“아, 예. 제가 말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암요. 제가 버릇을 다 고쳐 두고 갔는데 그래야지요.”
그렇죠.
데미안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피아는 촉박한 시간 내에 준비된 다과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한참 동안 말없이 차에 집중했다.
“내가 좋아하는 찻잎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네요.”
“대모님을 위해 항상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처세술에 능해지셨군요?”
그렇게 말하는 소피아는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표했다.
어느 정도 충분히 차를 즐긴 소피아는 두 손을 무릎 위로 포갰다.
“성년식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워요. 내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인데.”
“괜찮습니다. 대모님의 건강이 더 중요하죠.”
북부 사람이 아닌 소피아는 노년기에 들어선 후로 몸이 많이 약해졌다.
결정적으로 병을 발견하면서 3년 전 따스한 남부로 내려갔고, 하필 데미안의 성년식 때 고열에 시달려 오지 못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소피아는 아직까진 북부 왕래가 끄떡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응접실을 훑었다.
“그런데 저택이 엉망이군요.”
“요새 각하께서 일이 많으신지라 저택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계십니다.”
“아니요. 저택은 안주인의 몫이지요. 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소피아는 이내 혀를 찼다.
“나오지도 않고 또 방에 틀어박혀 계신 건 아니겠지요. 명색이 공작 부인이신데 안살림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소피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공작 부인은 5년 전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안살림은 책임지지도 않고 부인이 된 도리를 다하지도 않는 무책임한 공작 부인이 괘씸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왔는데 얼굴 한 번 내비치지도 않다니.
“소공작님. 당장 부인께 내려오시라 전하세요.”
데미안은 심장이 철렁했다.
다프네가 저택에 없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라졌다는 걸 소피아가 알게 된다면 큰일이 날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대모님. 어머니는 몸이 편찮….”
“대모님.”
그때 문이 열리고 에드먼이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소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각하를 뵙습니다.”
그 짧은 사이 에드먼은 데미안에게 눈짓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데미안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피아의 손을 끌어왔다.
“대모님, 곧 수업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계자 수업이라면 얼른 가셔야지요.”
소피아는 데미안의 등을 떠밀었다. 소피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데미안은 그대로 방을 나왔다.
에드먼은 데미안이 나가는 것을 본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각하.”
“대모님.”
에드먼은 별다른 말 없이 본론을 꺼냈다.
“왜 오셨습니까?”
그 태도에 소피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태도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요한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난데없이 소피아에게서 제 수하의 이름이 나오자 에드먼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급하니까 와 달라고 사정을 하더군요.”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안주머니에 있는 궐련으로 향하는 손을 억눌러야 했다.
소피아는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시겠죠.”
에드먼을 어릴 적부터 지켜봐 온 소피아는 당연히 에드먼의 비밀에 대해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평소 소피아였다면 요한의 편지를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온 이유는 다름 아닌 곧 ‘그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윈터 공작가의 입지가 흔들릴 만한 행동이 아니리라 믿습니다.”
애당초 윈터 공작가의 입지가 흔들릴 만한 행동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에드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피아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인 방은 아직 비어 있죠?”
소피아는 자연스레 안주인 방을 찾았다. 안주인 방은 그녀가 대모라는 지위를 얻은 후부터 남부로 떠나기 전까지 지냈던 방이었다. 중간에 공작 부인이 들어왔으나 안주인 방은 여전히 그녀를 위한 곳이었다.
“장시간 마차에 앉아 있었더니 피곤하네요.”
소피아는 에드먼의 손을 꽉 붙잡았다.
“부디 날 실망하게 하지 마세요, 각하.”
윈터가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
수도에서 내려온 복원사를 맞이하고 안내하던 요한은 소피아의 소식과 연달아 들리는 에드먼의 부름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할 말 없습니다.”
요한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왜?”
에드먼은 오러를 내뿜는다던가 냉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분했다. 그것이 요한을 더 불안하게 했다.
“왜 대모님께 편지를 보낸 거지?”
“…각하께서 달라지셨다고 느꼈습니다.”
요한은 에드먼의 물음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대답했다.
“그동안 마님을 신경 쓰지 않으셨죠.”
요한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개는 주인을 따라 합니다. 주인이 낮잡아 보는 이는 개도 낮잡아 봅니다.”
요한은 자신이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에드먼은 마님의 부재, 이것 하나로 완전히 바뀌었다. 요한은 그런 에드먼이 낯설었다.
이제까지 있으나 마나 했던 마님의 부재로 왜 에드먼이 이렇게 큰 영향을 받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지금까지 각하를 위해 일했습니다. 각하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일 또한 저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주제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소피아를 부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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