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마님이 사라졌다-16화 (16/145)

16화

“지, 지금 뭐 하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하녀는 중얼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이제 심문 안 받지?”

“…….”

“이미 자백을 받았으니 당연하겠지. 그럼 심문도 끝났으니 이제 넌 어떻게 될 것 같아?”

하녀의 말대로다.

첫날, 심문을 받다가 이대로 죽을 것 같았기에 거짓된 자백을 했다. 이곳을 나가서 진범인 마린다를 잡고 모든 진실을 밝히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여기 들어오는 사람은 간수들 빼고 내가 유일해.”

안젤라는 번뜩 상황을 직시했다. 저 하녀마저 등을 돌리면, 자신은 죽는다.

“잠, 잠깐 내가 어떻게 돼, 됐었나 봐!”

안젤라는 다급히 철창을 붙잡았다.

“보석 다, 다 줄게! 그러니까 제발….”

“진작 이랬어야지.”

하녀는 혀를 찼다.

“어서 말해. 보석 어디 숨겨 놨어?”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마린다는 보석함을 열어 보고는 활짝 웃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안에는 마린다가 생각한 것 이상의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엔 마린다가 빼앗겼던 보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린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을 바라보다가 보석함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참다못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풋. 푸하하하!”

감옥 안에 갇혀서 몰골이 엉망이 된 안젤라의 모습은 상상 그 이상으로 통쾌했다. 안젤라를 독살하기 위해 감옥에 들어갔다가 이런 횡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미린다는 보석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하마터면 이 보석을 그냥 다 놓칠 뻔했어.”

시녀장에게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한다고 하길 백번 잘했다. 순전히 안젤라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자진한 것이었는데 이런 횡재를 하게 될 줄이야!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고, 다리는 기괴하게 뒤틀려 있고, 이가 모조리 빠진 그 모습은 마린다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짜릿한 순간 중 하나였다.

마린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로브를 썼다.

일주일 동안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마린다는 아주 익숙하게 돌을 쌓아 오른 후 자신의 방 창문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보석함을 잘 숨기고 나자 타이밍 좋게 감시하는 기사가 들어왔다.

“무슨 일 있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이며 묻었다. 기사는 시선으로 방을 쭉 훑었다.

마린다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떻게 된 게 이 북부 사람들에게 제 미모는 단 한순간도 통하지 않는다. 마린다는 자신이 꽤 예쁘장한 외모를 가졌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공작도, 공작의 보좌관도, 기사도, 그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고 날파리만 꼬이니 스트레스까지 받을 지경이다.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지?”

“그냥 있었….”

“경?”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기사와 마린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시녀장이었다.

“고생이 많죠. 점심은 드셨나요?”

“…….”

기사는 답하지 않았지만 시녀장은 그 침묵의 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제가 잠깐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경들은 점심 드시고 오세요.”

“그건….”

“잠깐인데요, 뭘. 게다가 제가 이 아이에게 훈수 둘 것이 많아서 그래요.”

마린다와 대치 중이던 기사는 문밖의 기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고작 시녀 하나 때문에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도 모자라 식사까지 대충 때워야 했기에 마음속에 불만이 쌓이던 참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시녀장인만큼 기사들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크흠, 그럼 한 시간만 부탁드립니다.”

기사가 나가고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시녀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우고 조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뭘 하고 있어? 왜 빨리 안젤라를 죽이지 않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시녀장님. 제게 다 생각이 있어요.”

마린다는 시녀장의 귀에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장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번졌다.

“좋아. 아주 좋구나.”

“그럼 이대로 진행할게요.”

시녀장은 매우 흡족해하며 마린다의 어깨를 두들겼다.

“아, 시녀장님. 저 잠깐 다녀올 곳이 있는데 시간 좀 벌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대신 30분 안에 돌아와. 기사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

“그럼요. 금방 다녀올게요.”

기분이 좋아진 시녀장은 마린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마린다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와 3층 맨 끝, 마님의 방으로 향했다.

‘어디 한번 당해 봐라.’

문을 노려보던 마린다는 곧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쌓여 있기에 소매로 입을 가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나왔다.

마린다가 방을 나간 뒤, 숨죽이고 있던 안나는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는 한동안 여기저기 불려 가느라 바빠 미처 마님의 방을 청소하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 시간을 내 청소를 하러 왔다.

하지만 청소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 누군가 들어왔고, 안나는 저도 모르게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분명 마린다였는데.’

먼지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마린다가 확실했다. 안나는 아직 2주가 다 되지 않았음에도 마린다가 돌아다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커튼을 치고 나왔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안나는 마린다가 서 있던 곳을 서성거렸다.

혹여 들킬까 제대로 고개를 내밀지 못했기에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결국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안나는 포기했다. 먼지가 쌓인 창틀을 짚고 창문을 여는 동시에 부유하던 먼지가 바람을 타고 밖으로 향했다.

“콜록, 콜록!”

안나는 소매로 입을 가려 기침한 후 콧물을 훌쩍였다.

청소를 하기 전, 안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겨우 화장실과 작은 드레스 룸이 하나 딸린 소박한 방은 한눈에 들어왔다.

안나는 지금까지 마님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마님이 당한 일이 하나, 둘 떠오르자 과연 마님이 돌아오는 게 옳은 일인지 의문이 생겼다.

‘어쩌면 마님한테는….’

이곳이 견디기 힘드셨을지도 모른다.

빗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됐어.’

안나는 머리를 털어 괜한 생각은 잊기로 하고 이제는 익숙해진 청소를 시작했다. 이불과 커튼을 털고 바닥을 쓸었다. 하나 있는 작은 테이블 위도 청소했다.

깔끔하다 못해 물건이 아예 없었기에 치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를 닦다 보니 먼지가 서랍 틈새에 끼고 말았다. 그것을 발견한 안나는 멈칫하고 고민에 빠졌다.

‘…안은 보지 말고 빨리 닦자.’

그렇게 각오한 것이 무색하게 안나는 서랍을 열자마자 익숙한 물건들 사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반쯤 탄 종이 쪼가리였다.

매번 마님의 방은 안나가 담당했기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안나는 그 종이를 집어 올렸다. 자세히 봤지만 검게 타 있는 데다가 얼핏 보이는 글자는 제국어가 아니었다.

배움이 짧아 제국어의 형태만 간신히 아는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나라 언어인가?’

마님은 귀족이니 여러 나라의 언어를 아실 거다. 물론 지금까지 마님이 다른 언어를 쓴 적을 본 적은 없지만.

안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앗!”

다시 종이를 내려놓으려던 때, 안나는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종이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리는 손을 매만지며 고개를 쭉 빼 보았지만 종이는 불이 붙어 있기는커녕 그대로였다.

안나는 종이를 더 살펴보려고 했으나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곧 복도가 사람들로 득실거릴 시간이었기에 안나는 서둘러 다프네의 방을 빠져나왔다.

화륵.

그리고 서랍장 안 깊은 곳. 종이에 불이 붙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벤트.”

데미안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습관적으로 벤트를 불렀다.

“여인들은 다 꽃을 좋아하려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벤트는 거친 숨을 헐떡이느라 대답할 겨를조차 없었다. 데미안의 시선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용케 핀 들꽃으로 향해 있었다.

“헉,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크고 귀한, 허억, 꽃일수록 더 그런 것, 같고요.”

벤트는 정신없이 바닥에 뻗으며 겨우 대답했다.

크고 귀한 꽃.

데미안은 벤트의 말을 되짚으며 작고 흔한 들꽃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구는 벤트를 보며 혀를 찼다. 그 의미를 아는 벤트는 고개만 겨우 들어 반박했다.

“소공작님의 기준을 일반인 기준으로 삼지 마세요. 그랬다간 온 대륙의 반 이상이 허약할걸요.”

“일어나.”

“설마 한 번 더요?”

벤트는 핏기가 싹 가진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소공작님. 이거 안 보이세요? 제 아기 피부가 다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벤트의 얼굴은 고작 며칠 사이에 확 바뀌었다.

타고난 에드먼이나 데미안과는 다르게 벤트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이맘때쯤이면 쩍쩍 갈라지는 피부에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벤트의 탱글탱글하던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았고 잿빛으로 물들었다.

이게 다 이틀 내내 갑자기 일정을 촉박하게 잡고, 남은 시간에는 온통 대련만 주야장천 하는 데미안 때문이다.

데미안에게는 가벼운 몸풀기일지 몰라도 벤트는 정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소공작님이 이러는 거, 각하가 일축하신 거 때문이죠.”

데미안이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벤트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에드먼이 데미안의 요구를 단칼에 기각했다는 것을.

예상했던 결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각하의 뜻이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너….”

에드먼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벤트는 단호히 덧붙였다.

“지금 소공작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후계자 자리를 굳건하게 만드는 겁니다.”

현재 데미안은 윈터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다.

하지만 사생아인 데미안의 입지는 다소 불안정했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신들을 많이 만나 입지를 다지고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경쟁자가 갑자기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각하께서는 아직 젊으시기에 불장난을 하실 수도 있고, 과거에 한 불장난의 결과로 웬 여자가 데미안 또래의 아이를 데려올지도 모른다.

물론 각하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귀족 가문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인 만큼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다.

“도련님도 잘 아시잖아요.”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