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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4화 (14/145)

14화

“그….”

따지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데미안은 순간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손이 축축해졌다.

“그러니까, 어머니께, 여쭤볼 것이… 생겨서….”

데미안은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에드먼은 다시금 데미안을 불렀다.

“데미안.”

“…예.”

“다프네의 얼굴이 기억나느냐.”

“…….”

데미안은 침묵했다. 입술이 달싹거렸으나 내뱉는 말은 없었다.

데미안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왜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일까.

“이만 물러가거라.”

무슨 정신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소공작님?”

데미안은 에드먼의 집무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벤트가 말을 걸든 말든 정면만 보고 걸었다.

벤트가 졸졸 따라오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닦달했으나 이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런 벤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창문 밖, 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

‘…온실.’

“마님은 꽃 구경을 좋아하셨어요.”

“벤트. 더는 따라오지 마.”

데미안은 홀린 듯 온실로 향했다.

온실로 들어가자 잠깐 추위에 노출되었던 몸이 빠르게 체온을 되찾았다.

어릴 때를 빼고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온실은 기억에서의 모습과 똑같았다. 따스한 온도, 아름답게 피어난 꽃.

데미안은 수많은 꽃 중 하나로 향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꽃.

데미안은 다프네가 꽃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아니, 다프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어머니는 이 따스한 온실에서 수도를 그리워하신 걸까. 이곳이 그리도 싫으셨을까. 그래서 떠나셨을까.’

데미안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프네의 얼굴이 기억나느냐.”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물어만 보자.’

어머니를 찾아서, 하나만 물어보자.

검을 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딱 그것만 물어보자.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온실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도대체 지금 어디 계신 걸까.

“각하. 화가를 데려왔습니다.”

“…….”

“각하?”

에드먼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문은 다시금 열렸다.

화가, 필립이 들어왔다.

며칠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던 필립은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훨씬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흐느적거리며 허리를 숙인 필립은 품 안에 고이 안고 왔던 것을 내밀었다. 손바닥 정도의 크기로 초상화 말고도 에드먼이 따로 명한 그림이었다.

“초고입니다. 종이에 붙일 그림은 좀 더 선이 다듬어지고 채색까지 들어갈 예정입니다.”

에드먼은 캔버스를 뒤집었다.

“…….”

선이 다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이 하나 있었다. 정면을 가만히 응시한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놀랍군.”

지금까지 본 필립의 그림 중 가장 다프네와 흡사했다.

에드먼은 손을 뻗어 그림의 입가를 가렸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향한 입꼬리가 사라지자 완전히 다프네와 똑같았다.

당연했다. 다프네는 이렇게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에드먼을 본 적 없으니 이쪽이 더 흡사했다. 그래서 에드먼은 그 캔버스를 하염없이 어색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슬쩍 눈치를 보던 필립은 에드먼이 입 부분을 가린 것을 발견했다.

“저, 각하. 하관을 수정할까요? 무표정이라든지….”

“아니.”

에드먼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필립의 말을 기각했다. 그림으로조차 무표정인 다프네를 보고 싶지 않았다.

“…천 골드를 더 추가로 수하를 통해 보내겠네.”

“예, 각하.”

필립은 천 골드가 추가된다는 말에 간신히 침을 삼켰다. 3천 골드. 가볍게 그림 한 장 그리는 것에 무려 천 골드가 추가되었다.

당장이라도 침대 위로 쓰러지고 싶은 욕구는 천 골드가 추가된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잠은 죽은 후에 실컷 잘 텐데 그게 대수랴. 3천 골드가 눈앞에 있는데.

혼을 담아서라도 최선을 다해 그림을 완성하고 3천 골드를 받을 생각에 필립은 행복에 젖었다.

그리고 캔버스를 회수하기 위해 두 손을 뻗었으나 한참이 지나도 캔버스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슬그머니 들자 에드먼이 캔버스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여 잘못 그린 부분이라도 있나 덜컥 겁이 나던 그때.

“이 그림 내가 가지지.”

“아, 그건 선이 아직 지저분합니다. 시간을 조금 주신다면 더 완벽하게….”

“아니. 난 이것을 원해.”

필립은 느닷없는 에드먼의 고집이 의아했으나 자신에게 나쁠 건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어차피 머릿속에 다프네의 얼굴 형태가 잡혀 있기 때문에 다시 똑같이 그리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필립이 나가고 에드먼은 요한이 닉을 데리고 올 때까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프네가 이렇게 생겼었나.

꿈에서 어렴풋이 봤던 다프네의 모습이 이제 완전해졌다.

“각하, 요한입니다.”

“…들어와.”

에드먼은 반 박자 늦게 대답하며 캔버스를 내려놓았다.

요한과 닉이 들어왔다. 어깨와 머리에 눈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수하와 만난 직후 바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의뢰를 시작하기 전, 닉은 본인의 수하를 만나게 해 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연락을 넣자 곧바로 접선 장소와 시간을 정하자는 답이 돌아왔고, 당일이 되자 요한은 감시 삼아 따라간 것이다.

“일단 얘기를 하기에 앞서 이 집무실, 믿을 만합니까?”

에드먼은 닉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적어도 이 집무실을 만든 자는 죽었다.”

“그럼 다행이군요.”

닉은 왠지 모르게 주변을 살피던 것을 그만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저택에 블레드 후작과 연락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블레드 후작의 이름이 나오자 에드먼은 미간을 찡그렸다.

“난 내 아내를 찾으라 한….”

말을 중간에 멈춘 에드먼은 비로소 닉이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에드먼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내 아내가 블레드 후작과 연락을 하고 있었군.”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서 닉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에드먼에게 건넸다.

평범한 쪽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접힌 방식이 특이하다는 거였다.

“직접 만들어 낸 방식이라 조금만 충격을 가하면 바로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에드먼은 쪽지를 살폈다.

닉의 말대로 아주 조금만 풀어도 찢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이것을 공작 부인의 방 아래 담벼락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쪽지를 푸는 방법은?”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을 제 수하에게 보냈으니 못해도 내일 안으로 연락이 올 겁니다.”

닉은 불편한지 오러 억제구를 매만지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얻은 건 있습니다.”

“다프네의 실종에 가설이 생겼지.”

다프네의 실종에 블레드가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는 가설과.

‘블레드 후작에게 납치됐을 가설.’

물론 후자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에드먼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기로 하였다.

“아마 블레드가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공작 부인이 사라진 지 4주 가까이 되었으니 북부를 넘어서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북부만 수색했던 게 허망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다프네를 찾지 못할 시, 온 대륙을 뒤져야 할 것이다.

블레드 후작이 작정하고 숨겼다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검은 기사단의 인력을 빌려주지.”

“각하!”

요한은 다급히 에드먼을 말렸다.

“검은 기사단의 인력까지 투입된다면 너무 눈에 띕니다. 바로 알아차리겠죠. 게다가 닉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황제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요한은 닉을 빼내기 위해 그와 똑같은 신체 사이즈를 가진 시체를 구했다.

그리고 ‘평소 앙금이 있던 죄수들에게 구타를 당해 온몸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훼손되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듦.’이라는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닉의 사망에 황제는 통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 전에 다프네의 초상화가 완성될 거다.”

“…일주일. 일주일 안에 마님을 찾지 못하면 그때 검은 기사단을 투입하십시오. 그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에드먼은 팔짱을 낀 채 팔뚝을 느리게 두들겼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것을 같이한 사이이기에 자신이 열 번 말하면 한 번은 들어준다고 해도 에드먼의 행동은 예상할 순 없었다.

요한은 초조하게 에드먼의 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해.”

요한은 안도했다.

촉박하긴 하지만 닉의 수하는 발이 빠르고 수도 많았다.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오러 억제구 때문에 몸이 두 배로 힘들다며 닉이 돌아가고 보고를 마친 요한도 돌아가려고 했다.

“요한. 이 사이즈에 맞는 액자를 가져와.”

그러면서 에드먼이 꺼낸 것은 다프네의 초상화였다.

선이 지저분했으나 요한은 그게 마님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요한이 나가고 집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캔버스로 시선을 주었다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캔버스를 넣어 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것과 맞닥뜨린 에드먼은 멈칫했다.

에드먼은 책상 서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다프네의 숨겨진 편지를 꺼냈다.

아직 열어 보지 못한 편지.

“…….”

이 편지를 남긴 다프네는,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걸까.

***

휘이잉.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친다.

누군가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인 산 중턱에 힘겹게 올라섰다. 두꺼운 로브가 펄럭거리자 가는 손이 로브를 꽉 붙잡았다.

하아, 터져 나온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바로 앞에 북부의 마지막 경계선이 쭉 펼쳐져 있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손아귀의 힘이 약해졌다.

휘이잉!

그때를 놓치지 않은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고, 결국 로브가 뒤집히면서 갈색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드디어.”

그 머리카락 사이로 녹색 눈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이내 가느다란 손은 다시 로브를 쓰고 머리카락까지 꼼꼼히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로브를 당겨 녹색 눈까지 철저하게 숨긴 후에야 다프네는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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