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윈터 공작가의 지하실.
“으… 으으….”
그 깊은 곳 어느 방 안에서 고통에 젖은 신음이 간간이 울려 퍼졌다. 안젤라는 눈을 느리게 떴다가 감으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대충 짐작이 갔다.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지만, 안젤라는 있는 힘껏 온 신경을 다리에 집중했다.
‘다리가… 안 움직여.’
절망스러웠다.
우두둑, 하며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꿈이라고 믿었고, 꿈이어야 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달라진 건 없었다. 안젤라는 눈을 굴려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아, 아아…!”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린 다리를 발견한 안젤라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덜덜 떨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날카로운 비명에도 지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는 것이다.
분명 안젤라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있고, 그들이 숨을 쉬고 있는데도 안젤라의 비명에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숨만 붙어 있는 것처럼.
‘아니야,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봐도 그대로다.
마지막 희망을 담아 손톱이 다 사라진 손으로 다리를 긁어 보았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린 다리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해도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몸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던 안젤라는 결국 지쳐 쓰러졌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시야를 가리고, 초점 없는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안젤라는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해?’
안젤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
‘마린다…!’
몇 년 전, 마린다가 그림을 훔치는 것을 본 건 우연에 불과했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고, 안젤라는 물을 마시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리고 연신 주변을 살피며 까치발을 하고 어딘가로 향하는 마린다를 발견했다.
모두가 탐탁지 않아 하는 마님이 달랑 데려온 게 마린다였기에 안젤라는 그녀를 진작 주시하고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안젤라는 얼른 마린다를 뒤쫓았다.
비록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밖에 보지 못하고 중간에 시녀장과 마주친 안젤라는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안젤라는 마린다의 방에 몰래 들어가 지하실에서 가져온 물건을 확인했다.
“이건….”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황실 화가가 그린 각하와 마님의 그림이었다. 마님의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진 그림.
안젤라는 그림 옆에 놓인 가위와 그림을 번갈아 보다가 각하를 향한 마린다의 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마린다는 제 주인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안젤라는 마린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당장 마님에게 알리려던 찰나, 안젤라는 이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림을 빌미로 마린다를 가지고 놀았고, 그것은 마치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내가,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안젤라는 흐느꼈다. 억울하고, 분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안젤라는 핏줄이 다 터진 눈을 부라렸다.
이를 악물고 철창 가까이 다가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자신에게 뭔가 더 캐낼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최소한의 목숨은 붙여 놓고 식사도 꾸준히 들어온다는 것이다.
안젤라는 점점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침을 삼켰다.
고개를 숙인 하녀가 접시를 내려놓는 순간을 노려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
“잠, 잠깐.”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안젤라는 다급히 하녀의 손에 보석을 쥐여 주었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던 터라 간수가 미처 수거하지 못한 것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필사적으로 숨겨 놓은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걸 줄 테니… 시, 시녀장을 모셔… 와, 줘….”
덜렁거리는 이빨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으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보석을 물끄러미 보던 하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간수가 올까 주변을 초조하게 살피던 안젤라는 긴장을 풀었다. 하녀가 보석을 받고 뒤돌다가 그만 접시가 엎어져 식사를 못 하게 됐으나 안젤라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살 수 있어.’
시녀장님에게 다 말하고 나면 이곳에 있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마린다다.
안젤라는 희망을 품은 채 저 하녀가 시녀장을 데리고 오길 기다리며 몸을 웅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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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
“도련님!”
재차 반복되는 부름에 데미안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벤트는 서류 뒤에 가려져 있던 얼굴을 옆으로 쏙 뺐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불러도 대답을 안 하세요?”
데미안은 벤트의 말을 무시하며 서류를 받았다.
“오늘 좀 이상하십니다.”
벤트는 자리에 돌아가는 대신 데미안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얼굴 초췌한 것 좀 보세요. 그러게 왜 난데없이 이른 시간부터 대련장을 돌고 계셨어요.”
“치워.”
데미안은 코앞까지 들이 밀어진 벤트의 얼굴을 옆으로 치우며 미간을 찡그렸다.
“음, 성격은 평소와 같으시군요.”
안심한 벤트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휙 돌아보았다.
“근데 그 검을 선물한 사람은 찾으셨습니까? 각하 맞으세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안 그래도 골머리 앓고 있는 문제를 입 밖으로 내뱉자 데미안의 얼굴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벤트는 영문을 몰라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예?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건데요.”
“일이나 해.”
“넵.”
그것도 못 물어보나, 벤트는 툴툴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라고 해 봤자 데미안의 자리에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테이블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벤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데미안이 있는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고 벤트는 이상하네,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딜 봐?”
서류로 시선을 돌리던 벤트는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친 후에야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무려 도련님이 내게 질문하신단다.
벤트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데미안은 그 멍청한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아, 예. 예예.”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벤트는 데미안에게 친구가 없다는 것도 잊고 질문에 집중했다.
“평소 내 친구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고 내 친구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왔어. 아무래도 내 친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보낸 것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싫어한다는 사람이 보낸 게 확실해요?”
“…뭐, 거의.”
“그럼 그 사람이 친구분을 싫어하는 것도 확실해요?”
“확실해.”
데미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벤트는 미간을 좁혔다.
“난감하네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아무래도 사라진 그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는 게 빠르겠죠? 그게 제일 간단하고 확실하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에드먼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트는 시간을 확인했지만 아직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려면 멀었다. 벤트는 습관적으로 데미안을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아버지께.”
“각하께요?”
이 부자가 꼭 필요한 용건 없이 서로를 찾아갈 만큼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티타임을 가질 만한 성격은 더더욱 아닌데.
“아직 일정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알아.”
“그럼 각하께 무슨 볼일로….”
“찾으러 가야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예? 누구를요?”
“네가 그랬잖아. 사라진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라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벤트는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설마….”
“그래서 찾으러 가는 거야. 어머니를.”
물어보기 위해서.
“안 된다.”
돌아오는 대답은 고민의 흔적조차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넌 아직 어려.”
에드먼이 데미안의 요구를 거절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려서.
“저는 이제 마냥 어리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었고 정식으로 성년식도….”
“그래서 나를 이길 수 있느냐.”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 누가 들어도 에드먼의 말은 참으로 황당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사인 그를 이길 수 있냐니.
타고난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데미안이지만 에드먼의 옷깃도 스치지 못할 게 자명하다.
그것을 잘 아는 데미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10년 후면 분명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래, 지금은 불가능하지.”
에드먼은 데미안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자만이 수색대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가 수색대 모두와 겨뤄서 이긴다면 제 요구를 들어주세요.”
에드먼은 데미안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여느 때와 같이 업무를 보던 도중 데미안이 찾아왔다. 그리고 대뜸 다프네를 찾는 수색대에 끼워 달라 요청했다.
지금까지 뭐 하나 요구한 적 없는 아이였기에 에드먼은 이 상황이 더 난감했다.
이미 해체한 수색대에 끼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수색대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데미안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수색대 해체 소식을 말하자면 그 이유를 물을 테고, 닉에 대해 알려 줄 생각도 없으나 데미안은 자신을 닮아 고집이 셌다.
그 때문에 실력을 운운한 것인데도 데미안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홀로 나설지도 모른다.
“다프네는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어떻게 말입니까? 수색대도 이틀 전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프네의 초상화를 뿌릴 거다.”
“초상화라면….”
“데미안.”
에드먼은 그 특유의 높낮이의 변화가 적은 낮은 목소리로 데미안을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데미안은 고개를 올렸다.
“왜 갑자기 다프네를 찾으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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