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활활 타오르던 불은 데미안의 방이 재가 되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다행히도 데미안은 다른 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별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틀이 그을린 목걸이를 발견한 순간 데미안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다프네를 찾아가 모든 화를 쏟아 냈다.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몸 때문에 분노는 좀처럼 조절되지 않았고, 데미안은 결국 선이 넘는 발언까지 하고 말았다.
“제 친모도 아닌 주제에 왜 안주인 자리에 계십니까? 윈터 공작 부인의 자리가 그리도 탐나셨습니까?”
늦은 새벽, 침대에 걸터앉아 시선을 깐 채 가만히 데미안의 말을 듣고 있던 다프네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우거진 숲보다는, 이상하게도 깊은 늪지대를 연상케 하는 녹색 눈과 마주쳤다.
회상하던 그 순간, 상념에 젖어 있던 데미안의 눈에 푸른 보석이 달빛을 받아 녹색으로 변했고 그것이 다프네의 눈과 겹쳐 보였다.
“!”
화들짝 놀란 데미안은 가까스로 제 손에서 미끄러지는 목걸이를 놓치지 않고 잡았다. 목걸이를 다시 확인하니 언제 녹색이었냐는 듯 영롱한 푸른 보석이 반짝였다.
그때를 떠올리니 데미안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복잡한 심경을 지우려면 몸을 혹사하는 수밖에 없다.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허둥지둥 방을 나서려던 데미안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새벽 달빛을 머금어 한층 더 고고하게 빛나는 검이 덩그러니 놓여 시선을 끌었다.
‘설마.’
데미안은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데미안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저, 어머니. 오늘이 어머니의 생신이라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의 기억이 데미안의 발목을 휘감아 온다.
데미안은 수련 도중 몰래 나가 뒷길 근처에서 꺾어 온 꽃을 내밀었다.
아마 어머니가 받았을 선물에 비하면 볼품없겠지만 당일에 알게 된 탓에 급하게 준비한 게 이것밖에 없었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채 기다리던 그때.
탓!
따끔거림과 함께 손등이 화끈해졌다.
데미안의 시선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꽃보다도 어머니의 일그러진 얼굴로 향해 있었다.
“너… 이걸 어디… 가져….”
일부러 지우려 애썼던 기억이 다프네가 내뱉는 말과 함께 흐릿해진다.
숨을 거칠게 헐떡이던 데미안은 이내 무언가에게 쫓기듯 방을 뛰쳐나갔다.
그렇게 새벽 내내 대련장을 뛰던 데미안의 행동은 벤트가 발견한 후에야 멈췄다.
***
“각하.”
에드먼은 수하가 내미는 손수건을 보고 나서야 제 손에 피가 묻었음을 깨달았다. 지하실 전체가 피비린내로 가득해 미처 알지 못했다.
손수건을 건네받았으나 이미 마른 피는 잘 닦이지 않았다.
그때, 에드먼이 나간 후에도 심문을 이어 가던 수하가 나타났다.
“얻어 낸 것이 있느냐.”
에드먼의 물음을 받은 요한의 수하는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임무를 받고 떠나는 요한에게 한 가지 당부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녀를 심문할 때 마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시 각하께 발설하지 않을 것.
처음 이 당부를 들었을 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심문을 시작하자 하녀는 이상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곰팡이가 핀 식사부터, 추운 방과 방치와 무시 등등.
늘 심문이나 임무에 참가하느라 저택 상황을 전혀 몰랐던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을 발설할 시, 저택이 발칵 뒤집힐 거라는 것을.
요한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고 있던 것이다.
“…자백했습니다.”
그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선택했다. 마님에 대한 것이야 나중에 말해도 늦지 않다.
“그림을 자신이 훔친 게 맞다고 합니다.”
그 말은 마냥 거짓이 아니었다. 하녀는 다 풀린 혀로 더듬더듬 자백했다. 모두 자신이 한 짓이 맞다고. 반쯤은 계속되는 고문에 지쳐 내뱉은 것이지만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 나온 말은?”
마치 무언가를 더 아는 듯 캐묻는 말에 수하는 식은땀을 흘렸다.
계속 시간을 끌며 하루 넘게 무의미한 심문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나 지금 그가 할 일은 요한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진실을 숨기는 것이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됐다.”
한편 에드먼은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심문에 참여한다고 해서 에드먼이 직접 고문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의 수족 중 심문에 능하다는 이가 진행했으나 이렇다 할 만족스러운 소식은 없었다.
오늘이 닉을 데려오는 기한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가, 에드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각하.”
그때, 수하 중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동시에 에드먼이 고개를 돌렸다.
“왔군.”
요한이 닉을 성공적으로 탈옥시켜 데려왔다.
“요한.”
지하실을 나와 집무실로 들어가자 초췌한 몰골을 한 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에드먼의 등장에 허리를 숙였다.
단 한 명 빼고.
“공작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닉 아처.”
에드먼은 닉을 부르며 요한을 비롯한 이들에게 손짓했다. 자신을 제외한 이들이 나가려고 하자 닉은 황급히 외쳤다.
“어어, 여기 도착하면 이거 풀어 준다면서! 어디가!”
닉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그의 목에는 두꺼운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검사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오러 억제구였다.
“내 의뢰를 성공시킨 후에 풀어 주지.”
“뭐요? 야! 약속이랑 다르잖아!”
에드먼의 말에 닉은 펄쩍 뛰어오르며 요한에게 달려들었다.
“전 일단 기다리시라고 하였지, 그런 약속을 한 적 없습니다.”
“크윽, 너…!”
“그만.”
에드먼은 둘의 신경전을 제지했다. 그사이 요한과 수하들은 집무실을 나갔고 닉과 에드먼 둘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 감옥에서 썩을 텐가.”
“공작님, 저희같이 천한 것들은 그게 삶입니다.”
닉은 거들먹거렸다.
“워낙 끈질기게 구니 그냥 잡혀 준 것이고요.”
에드먼은 그런 닉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을 꺼냈다.
“피붙이 때문이라는 걸 안다.”
닉과 황실은 모종의 계약을 했다. 사실상 계약이 아닌 협박에 가까웠다.
민심을 떨어트리는 닉을 공개적으로 잡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닉의 여동생을 인질로 삼았다.
닉은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황제 시해 혐의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고, 그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갔다.
여동생의 이야기가 나오자 닉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걸 공작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모습이었으나 에드먼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서류 하나를 닉의 발치에 던졌다.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것이다.”
닉은 불신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닉의 호흡은 거칠어졌다. 닉은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닉은 오래전 헤어진 여동생을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당연했다. 여동생은 황실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고, 인질로 잡혀 있었으니.
한 달에 한 번 면회와 여동생에게 황실 시녀로 일하는 혜택을 주는 대신 남은 평생을 감옥에 처박혀 지냈다.
처음 몇 달은 꾸준한 면회가 이루어졌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마지막으로 여동생를 본 지도 벌써 반년 전이다.
감옥이 돌아가는 상황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닉의 수하가 여동생의 행적을 찾으려 했으나 닉은 막았다.
조금이라도 뒤를 캐려는 움직임을 보일 시 여동생을 곱게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달에 한 번 만나지는 못해도 황실 시녀로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여동생이 왜 신전으로 간 겁니까.”
“자세한 내막은 다 알아내진 못했다. 이것도 우연히 알게 된 거고.”
현재 여동생은 황실에 있지 않다. 이미 반년 전, 신전으로 보내진 상태였다.
닉의 이가 으득, 갈렸다. 애당초 겉으로는 고고한 척 뒤로는 더러운 수를 일삼는 황실의 말을 믿으면 안 됐었다.
에드먼은 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내 의뢰를 받아들이겠나.”
닉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조건은 제 여동생의 목숨입니다.”
“그러지.”
“의뢰는 어떤 것입니까.”
문득 닉은 의아했다.
자신이 온갖 불법적인 쪽은 꽉 잡았으나 황실이나 고위 귀족은 건들지 않는다. 실제로 돈만 주면 황제를 암살할 이들이 널려 있다.
도대체 어떤 의뢰를 할 것이기에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황제 시해? 아니면 윈터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베벨록 공작 살해?
과연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이 제게 무슨 부탁을 할지, 닉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한동안 입만 달싹이던 에드먼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 아내를 찾아.”
***
다프네는 흐린 시야에 눈꺼풀을 두어 번 느리게 깜박였다.
“아, 깼네요.”
낯선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다프네는 몸을 휙 일으켰다. 분명 변이 마물을 발견하고 로브를 날려 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부디 변이 마물이 로브를 사람으로 착각하길 바라며 한참을 웅크려 숨을 죽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 눈 속에 있다 보니 다프네는 저체온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 다프네를 구해 준 것은 마을 어귀에 자리한 허름한 집의 집주인이었다.
다행인 것은, 다프네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프네가 윈터 공작 부인일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집주인은 꼬박 며칠 동안 혼절해 있었다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다프네는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댔다.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는데… 경계 마을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고요?”
다프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거길 가야 하는데 가려거든 며칠 뒤에 움직입시다. 요즘 성의 분위기가 워낙 흉흉해서.”
“성, 이요…?”
집주인은 목소리를 낮췄다.
“근 며칠 동안 성에서 기사단이 몇 번이나 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기사단이라는 말에 다프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에드먼이 자신을 찾고 있다.
다프네는 가슴께를 더듬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잡힐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때문일까. 아니면… 기대감 때문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다프네는 하루빨리 이 북부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런 기회는 앞으로 영영 없을 거라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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