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하.”
숨겨졌던 또 다른 편지가 드러났다.
분명 이혼 서류에 대해 주절주절 써 놓은 편지와는 다른 내용이 쓰여 있으리라 확신이 들었으나 움찔거리기만 할 뿐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드먼은 초조하게 몸을 들썩이며 새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치이익.
‘하나만 더.’
하나, 둘, 셋, 넷.
마침내 재떨이 위로 짧게 타들어 간 궐련이 네 개가 되고 나서야 에드먼의 손에 텅 빈 궐련 통이 잡혔다.
무엇이 자신을 망설이게 하는지도 모른 채 에드먼은 편지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가만히 응시했다.
똑똑.
긴 침묵을 깬 것은 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각하. 마린다라는 시녀가 각하를 꼭 만나 봬야 한답니다.”
다프네의 시녀, 마린다.
왜 이 시녀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든 찰나, 데미안에게 마린다의 처벌의 책임을 넘긴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들이지 마라.”
에드먼은 오랜 상념을 끊어 내고 편지지와 이혼 서류를 서랍 안에 넣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에드먼이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각하! 그림! 그림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드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짐작대로 에드먼의 수하와 시녀가 뒤엉켜 몸부림을 펼치고 있었다.
“들어와.”
자리로 돌아오자 시녀가 수하의 손에서 벗어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려던 말. 자세히 해 봐라.”
“아, 네네.”
충동적으로 에드먼을 찾아온 마린다는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방 앞까지 찾아와 시비를 거는 안젤라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일을 끝내고 에드먼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후였다.
‘이 방법밖에 없어.’
이렇게 계속 불안해하며 눈치 볼 바에는 먼저 치워 버리는 게 낫다. 마린다는 심호흡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5년 전에 그렸던 마님의 그림을 찾으신다고요. 제가 그 그림의 행방을 압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네, 그럼요.”
충분한 미끼를 던졌음에도 에드먼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마린다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요한!”
잠시 침묵하던 에드먼은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요한은 헐레벌떡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시녀가 그림의 행방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런….”
“앞장서.”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먼은 마린다를 지나쳐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요한과 마린다는 황급히 따라 나갔다.
“여긴 하녀 생활관이지 않은가.”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하녀 생활관이었다. 요한의 의아함에도 마린다는 대답 대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첫 번째 방문을 벌컥 열었다.
“마린다?”
안젤라의 방이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안젤라는 갑작스러운 마린다의 등장에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보좌관님? 각, 각하?”
뒤이어 요한과 에드먼을 발견한 안젤라는 주춤거렸다.
“안젤라. 이제 그만해.”
“뭐, 뭐?”
마린다는 당황한 안젤라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작스러운 마린다의 행동에 안젤라는 그녀를 막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마린다가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더 빨랐다.
“이건….”
위로 천이 덮인 그림이었다.
“보좌관님. 여기 있습니다.”
“이, 이게 왜 여기에….”
“안젤라. 다 들켰어! 이제 거짓말하지 마!”
마린다에게 그림을 받은 요한이 몸을 돌리려고 했으나 에드먼이 다가와 그림을 앗아 가는 게 빨랐다.
에드먼은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천을 끌어 내렸다.
그가 기억하는 그림이 맞았다.
예외의 날에만 입는 연미복 차림의 에드먼.
그런데 기억과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세상에.”
요한의 중얼거림에도 에드먼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프네의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진 부분을.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요한이 급히 구해 온 복원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나.”
“괜히 손댔다가 그림이 더 손상될 수 있습니다. 저보다 더 경력 있는 복원사가 필요합니다.”
요한의 부탁에도 복원사는 단호했다.
그림에 생긴 손상이 워낙 광범위하고 오래된 탓에 캔버스가 자꾸만 바스러졌다. 아무런 시도도 못 해 보고 살펴보기만 하던 복원사가 내린 결론은 좀 더 경험이 풍부한 경력자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먼은 요한에게 명을 내렸다.
“수도로 연락을 넣어. 이 그림을 그렸던 화가도.”
“예.”
“그리고 그림을 훔친 하녀의 심문을 내가 맡겠다.”
에드먼이 직전 심문을 나서는 건 약 5년 만이었다. 더군다나 이때까지 에드먼이 맡아 온 대상은 거물이었다. 지금처럼 하찮은 하녀 따위가 아니라.
에드먼이 직접 심문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
‘마님….’
사라진 마님 때문이다. 이 일에 사라진 마님이 얽혀 있기에 에드먼이 나선 것이다.
요한은 불안감에 휩싸여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지금 에드먼을 말리며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야 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에드먼은 다시금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존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침대 밑에 처박혀 있던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공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림의 손상은 다프네의 얼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면에 의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찢긴 얼굴.
다프네의 얼굴에 대한 의문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복원사를 내보낸 요한은 생각에 잠긴 에드먼에게 다가갔다.
“각하. 신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신전이라는 단어에 에드먼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많은 병력을 대륙 곳곳에 심기 시작했습니다.”
“발견은 언제 했지?”
“몇 시간 되지 않았습니다만 병력을 푼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황실에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싶고요.”
신전은 어느 나라에도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집단이다.
제국이 생기기 훨씬 전, 천계와 마계, 인간계가 나누어져 있지 않아 질서와 규칙 따윈 존재하지 않던 세계는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세 종족 중 가장 약한 인간은 그만큼 큰 피해를 받았기에 마신에게 빌었다. 인간의 간절함을 들은 마신은 자신의 숨결로 만든 인간 다섯을 내려보냈다.
마법사, 정령사, 검사, 성녀 그리고 미지의 존재.
다섯은 각각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천족과 마족의 싸움에 끼어들어 백 년 동안 쉬지 않고 피 튀기는 전쟁을 했다.
그사이 마법사, 정령사, 검사, 성녀는 후손을 낳아 자신의 능력이 대대로 널리 퍼지게 했고, 이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힘은 세졌다. 결국 인간의 번식력에 패한 것은 마족과 천족이었다.
끝끝내 후손을 낳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는 자신을 희생해 마족의 경계를 지키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몇백 년 전부터 마물, 즉 마족의 마기로 만들어진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가뜩이나 기록이 적은 ‘미지의 존재’의 실존 여부가 미궁으로 빠지게 되었다.
천족의 경계를 지키는 이는 성녀가 되었다. 성녀는 살아생전 단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중 성녀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이가 2대 성녀로 추앙받으며 다른 이들과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났고, 남은 성녀의 자식은 인간과 결합해 검사가 세운 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신전과 블레드 가문이다.
하지만 고고하고 아름답다는 신전의 실상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 인간의 추악함이 신전을 더럽힌 지 오래다.
“대신관의 움직임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신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신관과 에드먼은 대립 구조다.
신전은 에드먼의 약점을, 에드먼은 신전의 약점을 서로 하나씩 쥐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을 통해 약점을 누설하지 않고 서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 냈는데 하필 이 시기에 신전의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됐다는 거다.
“개인 병력까지 투입했습니다.”
“이유는? 아직 못 찾은 건가?”
“예. 하지만 검은 기사단 중 임무를 나갔던 이들이 성기사 하나를 우연찮게 생포해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희소식이었다.
광증에 가까울 만큼 충성심이 깊은 성기사지만 그를 통해 진실을 알 방도는 충분했다.
“약을 준비해. 그리고.”
에드먼은 습관적으로 궐련 통을 꺼냈다. 궐련 통을 열었다가 텅 빈 것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틀 남았다.”
“…모든 준비는 마쳤습니다.”
에드먼이 말한 기한에 맞추려면 늦어도 오늘 작전을 시작해야 닉 아처를 이틀 안에 북부로 데려올 수 있다.
에드먼은 궐련 통을 품 안에 넣었다.
“지금 바로 심문 시작하지.”
“준비되면 바로 사람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요한은 지하실로 향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왔고 복도에서 누군가를 마주쳤다.
“아, 저 보좌관님!”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그림의 행적을 밝혀낸 시녀, 마린다였다.
“안젤라의 처벌은 어떻게 될까요?”
마린다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린다는 이내 흑, 하며 흐느끼더니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건 각하께서 정하실 문제다.”
“아…. 그렇, 군요….”
마린다는 울음기가 남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볼일 끝났으면 물러가라.”
안 그래도 닉을 한시라도 빨리 빼내야 하는 급한 상황이다. 요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린다를 지나쳤다.
마린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멀어지는 요한의 뒷모습을 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요한에게 안젤라의 처벌에 대해 캐물으려고 했으나 시도조차 못 했다. 듣던 대로 요한은 제 주인밖에 모르는 사냥개였다.
‘설마, 주인의 것을 훔쳤는데 가벼운 처벌을 내리겠어?’
마린다는 불안함에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빨리… 빨리 서둘러야 해….”
완벽한 계획을 위해, 유일한 증인인 안젤라가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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