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누구?”
“마린다라고 합니다.”
요한은 덧붙였다.
“마님이 결혼하실 때 같이 들어온 시녀입니다.”
에드먼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린다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다프네의 옆에 있던 시녀.
“해서, 도련님께서 직접 처벌을 내리길 원하신다고 합니다.”
“마음대로 하라 해라.”
에드먼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다프네가 그 시녀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다는 건가?”
사건의 발단을 전해 들은 에드먼은 의아했다.
“예.”
“그럼 이 시녀와….”
에드먼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멈칫했다.
“다프네가 가까운 사이였나?”
“전속 시녀로 지내지 않은 게 의아하지만 일단 그렇게 추측됩니다.”
‘추측’된다. 즉 모른다.
다프네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고 심문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모른다.’ 다프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5년 동안 모셔 온 주인임에도. 5년 동안 아내로 두었음에도. 아는 건 없었다.
에드먼의 기억 속에서 다프네의 실종을 고했던 하녀가 떠오른 찰나.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
에드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한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수색대를 철수해야 합니다.”
“이유는?”
“황제가 곧 눈치챌 것 같습니다.”
사적인 감정은 일절 담기지 않은 이유였다.
성과가 없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수색대 인원은 점점 늘어났다. 이 때문에 아무리 조용히 움직인다지만 북부를 주시하고 있는 황제의 눈에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 마님의 실종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펼쳐질 게 뻔하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요한이 긴장한 것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에드먼의 시선 때문이다.
“그래, 철수해.”
“각하. 철수하지 않으… 예?”
하지만 에드먼이 내뱉은 말은 예상과 다른 말이었다. 순순히 요한의 의견을 받아들인 에드먼은 덧붙였다.
“수색대는 철수해. 그리고 닉 아처를 데려와.”
요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닉 아처.
도박, 노예 시장, 의뢰 길드 등등 제국의 어두운 면을 주름잡은 왕. 돈만 준다면 그가 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러나 현재 닉은 황제 시해 미수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상태다.
에드먼의 말은 즉, 닉을 탈옥시키라는 것이었다.
“각하. 그건….”
“알렉과 합세한 것도 모른 척 넘어가는 중이니 더는 내 말에 토 달지 마.”
흠칫, 요한은 어깨를 떨었다. 그리곤 눈을 내리깔며 침을 삼켰다.
알렉이 그를 찾아온 것은 금일 아침이었다. 알렉은 요한에게 무의미한 수색이라며 각하께 말을 전해 달라 부탁했다. 요한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마침 황제라는 적절한 핑곗거리까지 있었다.
물론 그 핑곗거리가 거짓이 아닌 건 아니다. 이대로 점점 수색 규모가 커지면 황제의 눈에 띌 확률도 높아진다.
에드먼은 요한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나 상상하지도 못한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에드먼의 말대로 요한은 그의 말에 더는 토 달지 않기로 했다.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닉 아처를 빼 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겁니다.”
“사흘.”
“루부즈 감옥입니다, 각하.”
요한은 에드먼에게 닉이 어디 수감되어 있는지 말했다.
에드먼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말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루부즈 감옥은 사막 한가운데에 자리한 감옥으로 건설 이래 100년 동안 단 한 명의 탈옥수도 없는 것으로 유명한 악명 높은 감옥이다.
“완벽한 탈옥을 위해서라면 한 달 그 이상이 걸립니다.”
“들켜도 상관없다.”
요한의 호소에도 에드먼은 단호했다.
“그러니까 사흘 안에 닉을 빼 와.”
“…예.”
애당초 요한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요한은 순순히 허리를 숙인 후 집무실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요한의 수하가 가까이 다가왔다. 요한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결단 지은 듯 수하에게 나직이 명을 내렸다.
“…정말이십니까?”
수하의 되물음에도 요한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분을 모셔 와. 되도록 빨리. 그리고 각하가 모르시게.”
이 모든 건 각하를 위해서다. 요한은 불안한 감정을 억누르고 스스로 되새겼다.
***
ㅎㅂㄹㄱ.공금
“소공작님. 진정 좀 하세요.”
벤트는 성난 제 주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데미안의 신경을 더 거스르는 말에 불과했다.
“진정? 벤트, 지금 내가 진정할 때라고 생각해?”
벤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딱히 화내실 필요도 없죠.”
“뭐?”
벤트는 하나하나 짚어 내려갔다.
“그녀가 몰래 훔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마님이 직접 빌려주신 거 아닙니까?”
데미안은 말문이 막혔다. 벤트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인가. 데미안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 각하께서 처벌을 마음대로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네가 알아서 해.”
“예? 제가요?”
화가 가라앉은 데미안은 그대로 벤트에게 떠넘겼다. 벤트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다며 투정을 부렸으나 데미안은 가뿐히 무시했다.
“각하께 맡기면 될 문제를 굳이 가져와서는 제게 맡기시다니. 너무하십니다.”
“벤트.”
“아니. 막말로 소공작님의 것도 아니잖습니까. 혹시 마님이신 줄 알고 그렇게 뛰어…. 커억!”
“일어나.”
데미안은 벤트의 멱살을 잡고 올렸다.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지.”
“농담이시죠?”
어색하게 웃던 벤트는 데미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정색했다.
“진심이세요?”
데미안은 대답 대신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대련장으로 향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나온 벤트는 덜덜 떨며 말했다.
“도련님. 도련님은 평범한 인간인 저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거 잘 아시죠? 전 고작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과 이별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예?”
“입 닫고 검이나 들어.”
데미안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고 얼마 후.
벤트는 바닥에 엎어져 거친 숨을 헐떡였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벤트와 달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데미안은 바위에 앉아 자신의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검술 실력마저 에드먼을 똑 닮아 열두 살에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검술 선생에게 인정받고 더는 가르칠 게 없다는 말까지 들은 데미안이다.
그에 비해 벤트는 뼛속까지 문인이다. 자기 한 몸만 간신히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검술만 할 줄 아니 둘은 애당초 검을 맞댈 상대로 적합하지 않았다.
“헉, 허억, 소공작님.”
벤트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질질 끌고 다가왔다.
뜨거운 숨이 바로 앞에서 헐떡이자 데미안은 검집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거기 멈춰 있어. 다가오지 마.”
“누구 때문에, 허억, 이러시는 건데요, 헉.”
벤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데미안의 명령에 따라 자리에 멈췄다.
“어? 그건 처음 보는 검이네요?”
숨을 고른 벤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먼이 손질하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네요. 이번 성년식 선물로 받으셨어요?”
“선물 사이에 섞여 있던데.”
“와, 이 비싼 걸…! 도대체 누가 준 겁니까?”
문인이지만 검에 관심이 많은 벤트는 눈을 반짝였다.
“정말 좋은 검입니다. 보존 마법도 걸려 있고 강화 마법까지. 웬만한 귀족 가문의 전 재산에 육박할 정도입니다.”
“그래?”
데미안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오는 선물이 거기서 거기라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것 중에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검이었다.
맞춤 제작이라도 한 듯 손에 착 감겼다. 평소 에드먼이 지적하는 데미안의 검술도 보완할 정도의 검은 마치 데미안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각하이신 것 같네요. 이렇게 도련님을 잘 아는 사람은 각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가.”
“각하는 참 알다가도 모를 분입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냉정하시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으신데 말입니다.”
데미안은 떨떠름했다. 이미 에드먼에게 성년식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또 다른 선물이라 생각했다.
“아, 도련님. 제가 소문을 들었는데 말입니다.”
벤트는 그림 실종에 대해 전했다.
“뭐, 못 찾겠죠. 언제 잃어버렸는지 알고 찾겠습니까.”
벤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마님이 사라지신 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마님처럼 일 잘하시는….”
벤트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벤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던 에드먼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말아?”
“예? 제, 제가요?”
“그래, 네가.”
벤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에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 근데 그거 들으셨습니까? 글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변하는 대화 주제에 데미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님?’
얼핏 들리는 단어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다프네와 벤트는 이렇다 할 접전조차 없는 사이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데미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치이익.
에드먼은 궐련에 불을 붙였다. 타들어 가는 소리와 동시에 한 번 깊게 빨아들이자 무언가 폐를 가득 채웠다.
후우우.
들이켠 만큼 깊게 내뱉자 짙은 연기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에드먼은 궐련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는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드먼의 시선을 앗아 간 것은 잉크로 얼룩진 이혼 서류와 편지지.
다시 한번 궐련을 깊게 빨고 내뱉은 에드먼은 문득 편지지를 집어 올려 유심히 살폈다.
편지의 내용은 짧고도 간결했다.
무언가를 향한 고백을 털어놓는 말 따윈 적혀 있지 않았고, 이혼 서류에 관한 이야기만 있었다.
그런 짧은 내용에 비해 편지가 들어 있는 편지지는 지나치게 두툼하다.
에드먼은 내팽개치듯 궐련을 재떨이에 비비고 다급히 편지지를 열었다. 편지를 꺼내고, 나이프로 편지지의 뒤편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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