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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8화 (8/145)

8화

에드먼은 몸을 돌려 제 소매를 붙들고 있는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우습게도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된 듯 소매를 붙잡은 손은 절박하게 보였다.

“내일 얘기하죠.”

“지금 말해야 해요.”

완강한 말투에 에드먼은 잠시 멈칫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면서도 얼굴을 마주칠 일이 잦지는 않았다.

게다가 대화도 일절 나누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대화를 나눠야 할 이유 역시 없었다.

그렇기에 먼저 적극적으로 대화를 청해 오는 다프네의 이런 태도가 낯설었다.

에드먼은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서 알코올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평소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닌 이유가 설명됐다.

그 순간, 에드먼은 자신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러를 제어하기 힘든 시기 말고도 느닷없이 오러의 파동이 거세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에드먼이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주위에, 그러니까 바로 앞에 있는 다프네는….

“아주 잠깐이면 돼요. 그러니까….”

“뜻대로 하세요.”

“네?”

에드먼은 다프네의 말을 끊고 소매를 붙잡은 손을 떨쳐 내듯 밀어냈다.

그리고 여전히 저를 빤히 보는 다프네를 향해 말했다.

“모두. 부인 뜻대로 하세요.”

에드먼은 끓어오르는 오러를 참고자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지만 술에 취해 찾아오다니요.”

내뱉은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에드먼은 입 안을 잘근잘근 씹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돌아가세요, 부인.”

조급히 몸을 튼 에드먼은 문고리를 붙잡았다.

“…부부요?”

만약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방에 들어갔을 것이다.

“절 부인으로 생각하신 적은 있으세요?”

머리가 아픈 와중에 기분은 멍했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그대를 부인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속이 울렁거린다. 머리가 울린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마음을 숨겼다.

그렇기에 에드먼은 몸을 돌리면서 숄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던 어깨의 멍 자국을 부러 기억에서 지워 냈다.

***

“어머, 마린다?”

마린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급히 옮기던 걸음을 멈췄다.

“안젤라.”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며 뒤돌아보니 역시나 안젤라가 서 있었다. 안젤라의 뒤로 쭉 늘어서 있던 하녀 하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늘 돌아온 거야? 부럽다, 얘. 난 북부를 언제쯤 벗어나려나.”

“뭐, 다 마님 덕분이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풋, 가만히 대화를 듣던 안젤라는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에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이미 비웃음 소리를 들은 마린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마린다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안젤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안젤라는 입가를 가렸던 손을 내렸다. 옅은 비웃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음, 난 잘 이해를 못 하겠네. 아, 난 이만 가 볼게. 워낙 기념품을 많이 사서 짐 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이야.”

“기념품?”

안젤라의 옆에 있는 하녀들은 눈을 반짝였다. 하녀의 대부분은 북부에서 태어나 북부에서 자란 평범한 평민이다.

눈보라가 멎어도 괴수가 득실거렸기에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상단을 제외하고 북부까지 걸음 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 때문에 부유하지 못한 하녀들은 대부분 북부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내가 가서 같이 도와줄게!”

“얘, 넌 바쁘잖아! 내가 도와줄게! 나 오늘 시간 많아!”

그러니 기념품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것들.’

서로 나서서 짐 정리를 자처하는 모습에 마린다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으며 겉으로는 활짝 웃었다.

“그럼 다 같이….”

“너네, 시녀장님 말씀 잊었어?”

안젤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요즘 저택이 흉흉해서 절대 소란스러운 일 만들지 말라고 하셨잖아. 게다가 누가 소공작님의 심기까지 거슬러서는…. 쯧.”

“그건 그렇지만….”

“안젤라.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마. 너도 올래?”

마린다와 안젤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딴 곳에 처박혀 있는 주제에.’

마린다는 안젤라를 낮잡아 봤고.

‘도둑년 따위가 어디서.’

안젤라는 마린다의 이중성을 비웃었다.

신경전이 계속되자 하녀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마린다가 사 온 기념품이 탐나는 건 사실이지만 시녀장과 혈육인 안젤라에게 밉보이면 안나 꼴이 난다.

“마린다, 미안. 다음에 갈게.”

“뭐? 잠깐만 기다려 봐. 내가 뭘 사 왔냐면…”

“내가 좀 흥미로운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안젤라는 운을 뗐다.

“너네 5년 전에 각하와 마님의 그림이 있었던 거 기억하지? 황실 화가가 그린 그거. 그게 사라졌대.”

돌아서는 하녀를 붙잡던 마린다의 몸이 굳었다.

“근데 그걸 훔친 범인이 저택 사용인이라는 거 있지?”

우연인지 의도인지 안젤라의 시선이 동시에 마린다에게 머물렀다. 잔뜩 굳어 있는 마린다를 향해 싱긋 웃은 안젤라는 몸을 휙 돌렸다.

“가자. 할 일이 많잖아?”

“아, 응.”

마린다는 순식간에 홀로 남겨졌다.

‘도둑년.’

사라지기 전, 자신을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안젤라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주먹이 꽉 쥐어졌다.

‘망할, 망할!’

마린다는 거친 걸음으로 제 방에 도착했다. 문을 닫기 전까지 복도를 꼼꼼하게 살피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마린다는 외투를 벗기도 전에 방 한 면을 가득 차지한 액자를 치웠다. 그러자 작은 방이 나타났고, 마린다는 곧바로 그 방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여행길에 가지고 갈까 고민도 했지만 위험 부담이 컸기에 결국 포기했다. 이렇게 오래 내버려 둔 적이 없었기에 마린다의 몸짓은 퍽 다급했다.

방 안은 전체적으로 온도가 낮고 빛 한 자락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에는 천으로 덮인 그림 하나가 있었다.

마린다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황홀하다는 듯 반쯤 풀린 눈으로 그림을 응시했다.

‘드디어.’

제게 기회가 왔다. 늘 멀리서만 지켜봐야 했던 그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기회가.

‘역시. 우린 운명이었어!’

처음 만난 순간 머리에 내리꽂혀 등허리를 울리던 그 전율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5년이면 나도 많이 참았어.”

물론 둘의 사이가 남보다도 못한 걸 자신도 잘 알지만 다프네가 ‘마님’이라고 불릴 때면 정말이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프네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와 나를 방해하는 것도 사라졌다. 마린다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쌓인 먼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천은 흐트러졌다. 동시에 그림의 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연미복 차림을 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

“하… 각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에드먼이었다.

***

“…각하!”

누군가 수면 위로 끌어당기듯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헉, 허억….”

에드먼은 가슴께의 셔츠를 찢을 듯 쥐어짜며 거친 숨을 헐떡였다.

식은땀으로 인해 등과 이마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에드먼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 내며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짙은 땅거미가 세상을 집어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요한은 다급하게 물으며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물을 받고 나서야 갈증에 목이 탄다는 것을 깨달은 에드먼은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요한은 그 시기가 점점 가까워지는 만큼 에드먼을 향한 걱정 또한 커졌다. 이 때문에 질타를 무릅쓰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요한이 본 광경은 소파에 커다란 몸을 한껏 꾸긴 상태로 잠든 에드먼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에드먼이었기에 웬만해서는 다시 조용히 나가려고 했으나 그의 이마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자 결국 깨우고 만 것이었다.

“…화가.”

“예?”

“화가를 불러와.”

요한은 주춤거리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당장!”

에드먼의 외침에 요한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요한이 서둘러 방을 나가자 에드먼은 식은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꿈은 흐릿했지만 다프네의 얼굴이 잔상으로나마 남아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얼굴 중 가장 뚜렷했다.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서성거리며 이 잔상마저 잊을까 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사이 화가는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상태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안경도 어딘가에 흘리고 온 모양새였다.

“아치형 눈썹에 눈꼬리는 내려간 편. 코는 크지 않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며 입술은….”

에드먼은 자신의 입술을 더듬거렸다.

“입술은 이 정도 두께고….”

자다가 봉변을 당한 필립은 잠시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다짜고짜 쏟아 내는 말이 공작 부인에 대한 것임을 깨닫고 재빨리 엉겁결에 주워 온 노트를 꺼냈다.

번복하는 내용이 중간중간 있었으나 한참 동안 이어지던 입씨름이 끝나자 얼추 사람의 얼굴 형상이 잡혀 갔다.

필립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노트에 툭, 떨어졌다. 집중하느라 땀을 닦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수고했네.”

짙은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에드먼은 축객령을 내렸다. 쉴 새 없이 말을 이어 간 탓에 에드먼의 목은 갈라졌다.

“각하야말로 수고하셨습니다.”

필립은 몇십 장의 스케치를 해 에드먼에게 검사받고, 피드백을 토대로 다시 스케치를 하고 또 한 후에야 가장 유사한 스케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필립의 발치에는 구겨진 종이가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이만 쉬게.”

“예.”

필립은 몇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췌한 얼굴을 한 필립이 마지막 스케치를 소중한 보물처럼 품에 안은 채 비틀거리며 사라지자 요한이 들어왔다.

에드먼은 깍지를 낀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림은?”

“죄송합니다. 아직 찾고 있습니다.”

진전이 없다는 소리다.

에드먼도 알고 있다. 도대체 언제 도난당했는지도 모르는 그림을 찾는 게 얼마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지.

“하지만 각하께서 사라진 그림을 찾는다는 얘기를 흘리자마자 사용인 중 하나가 훔쳤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고 있던 에드먼이 곧바로 상체를 당겼다.

“그 소문. 자세히 알아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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