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정말이에요.”
마린다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니까, 마린다 네 말은 마님께서 네게 마차도 빌려주시고, 옷도 빌려주시고, 장신구도 빌려주시고, 돈도 주셨다는 말이니?”
“네, 그렇다니까요.”
시녀장은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치가 빠른 마린다는 시녀장과 사이가 원만했기에 그녀의 실수에 관대한 편이지만 이번 문제는 조금 달랐다.
마린다가 마님께서 빌려주셨다고 주장하는 안주인 전용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바람에 소공작님이 착각하셨고, 마님이 아니라 일개 시녀라는 것을 알자 화를 내셨다. 고작 시녀 따위가 공작가를 우습게 보냐며.
소공작님이나 각하가 연루된 이상, 시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야 네 말을 믿어 주겠다만 소공작님은 다를 거다.”
소란스러움에 헐레벌떡 뛰쳐나온 시녀장은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소공작님을 아주 오랜만에 보았다.
도련님의 친모가 남긴 유일한 물건을 마님이 망가트렸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3년 만에 보는 것이었다.
한편 마린다는 억울했다. 자신의 말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모두 마님이 빌려준 건 사실이다.
물론 눈보라를 안전하게 뚫고 갈 마차가 안주인 전용 마차밖에 없다며 눈치를 주긴 했으나 어쨌거나 빌려준 건 마님이다.
‘그럴 만했지.’
5년 동안 이 지루한 북부에 갇혀서 꼼짝 못 한 게 다 누구 탓인데.
평소 쌀쌀맞던 다프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마린다는 이내 기세등등해졌다.
그렇게 신나는 여행을 즐기고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반긴 것은 데미안이었다.
각하와 똑 닮은 수려한 데미안의 미모에 마린다는 새삼 얼굴을 붉혔다.
‘왜 나와 계신 거지?’
설마 나를 위해….
하지만 마린다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데미안이 마린다를 보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화를 쏟아 냈기 때문이다.
“혹시…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마린다는 슬그머니 물었다.
“마린다. 놀라지 말고 들으렴. 마님께서 사라지셨다.”
“네?”
“그게 벌써 보름 전이야.”
수색대가 이 눈보라 속에서 5일 동안 수색과 철수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찾은 거라곤 피에 젖은 로브뿐.
시녀장은 고작 며칠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마린다에게 말해 주었다.
“변이 마물 소굴에서 마님의 로브를 찾았다고요? 마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건가요?”
마린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건 정확하게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수색대는 마님을 찾는 게 아니라 마님의 시체를 찾는 중이라고 볼 수 있지.”
‘충격이 큰 모양이네.’
마린다는 비록 마님의 전속 시녀가 아니었지만, 이 저택에서 공식적으로는 유일하게 마님을 생각하던 사람이다.
모든 사용인이 마님에게 등 돌릴 때 마린다만이 마님을 동정했다.
“그럼… 각하께서 재혼하시는 건가요?”
시녀장은 마린다의 물음에 숨겨진 의미를 눈치챘다.
‘블레드 가문으로 전령을 보내려는 거구나.’
블레드.
제국의 건국을 함께한 가문 중 하나인 동시에 초대 가주가 성녀인 것으로 명성이 높은 가문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신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 명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황제도 어찌 못 할 정도로 권세를 누리던 것도 잠시, 반역에 가담한 증거가 밝혀진 5년 전부터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그나마 블레드의 고명딸, 다프네가 윈터가의 안주인이 되면서 간신히 멸문의 위기는 넘겼다.
철통 보안을 자랑하는 악명 높은 외딴섬에 있는 감옥에 수용되었다고는 하지만 연락할 길이 있을 테고, 딸의 부고 소식 역시 전해 듣게 될 거다.
만약, 블레드 후작이 원래대로 루부즈 감옥에 갔다면 이런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루부즈 감옥은 일반 감옥과는 다르다. 황궁의 안전을 위협하는 이들이 수감된 곳이다. 한마디로, 돈과 권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다프네의 오라비이자 블레드의 후계자인 세르기가 블레그 후작을 대신해 자처하여 루부즈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 덕분에 블레드 후작은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기에 바깥일에 대해 들을 게 분명하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무엇보다 각하의 의중이 가장 중요하니까.”
시녀장은 눈치 빠르게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호한 대답과는 다르게 시녀장은 각하가 재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인도 사라졌겠다, 나이도 아직 젊겠다. 아이가 있고 결혼한 전적이 있어도 각하가 손을 뻗으면 부나방처럼 뛰어들 여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황녀? 아니면 공녀?’
훌륭한 업적은 뒤로하고 외모만 놓고 보더라도 각하께 목매달았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는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베벨록 공녀와 황녀 역시 포함이었다.
“어쨌든 처벌이 내려지면 알려 주마.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한다.”
시녀장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덧붙였다.
마린다는 시녀장의 근심이 단지 마님의 실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또 다른 문제라도 있어요?”
“있고말고.”
불투명하게 대답한 시녀장은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원래도 감정 기복이 적고 무뚝뚝하기에 모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나 몇 년이 되도록 각하는 불편한 분이었다.
그러니 마님이 사라지고 나서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진 주인의 부름에 평소보다 더 긴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각하가 시녀장을 부른 이유는 다소 뜬금없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시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말이지….”
***
적막하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방을 보며 생각했다.
며칠 전 다프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를 제외하면 그간 5년 동안 ‘단 한 번도’라고 단언할 정도로 찾지 않았던 이곳은 낯설었다.
최소한의 가구와 두껍게 쌓인 먼지. 좋게 말하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을 정도다.
편지 한 장과 이혼 서류. 그게 다다. 자신의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에드먼은 먼지가 자욱한 방 한가운데서 우둑하니 자리를 잡고 가만히 섰다.
종일 창밖 너머로 이 방을 바라보다가 뭔가에 홀린 듯 무작정 들어왔다.
에드먼은 숨을 들이켰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아무런 체취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갑갑함이 밀려오자 에드먼은 궐련을 꺼냈다. 불을 붙이기 직전, 에드먼은 고개를 들어 올려 방을 둘러보았다. 궐련의 향은 독하니 분명 한 개비만 피워도 이 방을 가득 채울 것이다.
“…….”
에드먼은 이내 궐련을 쑤셔 넣고 눈을 감은 채 방의 주인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나는 건 없었다.
당연했다. 에드먼은 다프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대를 부인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에드먼은 기억을 더듬으며 느리게 눈을 떴다.
***
성년식 한 달 전 수도에서 열린 축하 연회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5년 만에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있고, 연회의 목적이 소공작인 데미안의 성년식을 축하하기 위함이기에 새벽이 넘도록 물오른 분위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연회를 끝마친 에드먼은 뻐근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후….”
업무를 보는 것보다 사람을 대하는 게 더 지쳤다.
“고생하셨습니다.”
“벤자민.”
그때, 연회가 열린 수도의 별장의 집사 벤자민이 나타났다.
벤자민은 벤트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대대로 윈터 공작가에 한평생을 바친 가문의 일원이다.
“수고했네.”
본래 연회는 안주인의 담당이다.
하지만 에드먼의 말을 전해 들은 벤자민은 아무 말 없이 촉박한 일정 동안 완벽한 연회를 준비했다.
“요한에게 전해 들었다. 본성으로 내려올 거라고.”
“예.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본성으로 갈까 합니다.”
벤자민은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저택을 훑었다.
그가 젊었을 무렵부터 맡은 이 별장은 벤자민에게 큰 의미였다. 그 때문에 5년 전, 결혼과 동시에 이 별장을 떠나는 에드먼과 합류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욕심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그럼 같이 내려가지.”
“예. 알겠습니다. 저, 각하.”
“말해.”
“혹시 마님께서….”
“다프네?”
“아, 아닙니다. 피곤하실 테니 들어가 쉬십시오.”
머뭇거리던 벤자민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벤자민이 물러가자 에드먼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행했다.
그가 방 앞에 도착했을 땐 누군가 문 앞에 웅크려 있었다.
“…부인?”
무릎 사이에 파묻혔던 고개가 들렸다. 복도가 어두운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으나 다프네가 맞았다.
에드먼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몸이 안 좋다며 돌아간 이가 왜 여기 있을까.
더군다나 다프네는 그리도 그리워하는 수도에 올라와 사흘 동안 연락 두절인 상태로 외박까지 했던 상황이다.
에드먼이 가까워지자 다프네는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에드먼의 손이 움찔거렸으나 다프네가 벽을 짚고 중심을 잡는 게 더 빨랐다.
에드먼은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에드먼은 부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에 눈길을 주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방으로 돌아가 처리해야 할 서류가 가득하다. 지금 당장 시작해도 동이 틀 무렵에나 끝날 양이다.
에드먼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다프네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에드먼.”
그러나 다급한 손길이 에드먼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떨쳐 낼 수 있을 만큼 미약한 힘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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