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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5화 (5/145)

5화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리면서 데미안이 들어왔다.

벤트의 말을 듣고 딴생각을 할 틈도 없이 달려왔지만 데미안이 마주한 것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에드먼과 알렉의 대화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참다못한 데미안이 무작정 들어온 것이었다.

‘여덟 살 아이도 안 할 짓을.’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한심함을 느끼면서도 데미안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례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려던 찰나였다.

데미안은 에드먼의 책상 위로 놓인 이질적인 물건을 발견했다.

‘걸레?’

왜 걸레가 에드먼의 책상 위에 있는 것인가, 싶은 것도 잠시. 멀리서는 무늬처럼 보이던 것이 핏자국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데미안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동시에 수하의 말이 떠올랐다.

“마님… 찾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찾았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지만 최근 공작가에서 찾고 있는 건 단 하나, 어머니였다.

분명 어머니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저건.’

답은 정해져 있다.

“…어머니의 것입니까?”

돌아오는 뚜렷한 대답은 없었으나 데미안은 알 수 있었다. 저 정체불명의 천 조각이 그녀의 것임을.

“살아 계십니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데미안은 다르게 물었다.

“그럼 죽었습니까?”

“데미안.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다소 질문에 맞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데미안은 그 말의 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데미안은 주춤거리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그 여자가 죽었다고요?”

데미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무언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날뛰는 이상한 기분 탓에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죽었다고?

‘그 여자가?’

데미안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단언하듯 말했다.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 절대.”

사라지기 바란 것은 맞다. 가끔, 가끔은 그랬다. 하지만 결단코 이런 방식을 바란 것은 아니다.

데미안은 뒤를 돌아 어딘가로 향해 뛰었다.

그렇기에 데미안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고 있는지.

***

데미안이 뛰쳐나가고 알렉까지 내보낸 후, 홀로 남은 에드먼은 상념에 젖어 들었다.

인정한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신경 쓰인다.

“절 부인이라 생각하신 적 있으세요?”

그 이유가 하필이면 사라지기 전에 있었던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에드먼은 잘 안다.

다프네가, 사라졌다.

에드먼은 알렉의 보고에도 다프네가 죽었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증거가 명백한데도 시체가 없다며 살점 하나라도 찾아오라 난리 친 것이 조금 전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에드먼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감에 의지한 것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 다프네가 변이 마물에게 변을 당했다면 살점은 물론 뼈 한 조각마저 모조리 씹어 삼켜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로브라는 아주 큰 흔적이 남은 건 상당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

꾸역꾸역 서류에 고정했던 시선을 돌리자 아주 자연스럽게 창가로 향했다.

다프네의 방.

에드먼은 문득 왜 이렇게나 다프네가 신경 쓰이는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귀찮게 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드먼은 이내 들고 있던 서류마저 내려놓았다.

먼저, 자신과 다프네는 계약으로 묶인 사이다. 그럼 계약을 어긴 것이 화가 난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에드먼은 계약에 대해 떠올렸다.

에드먼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다프네는 그의 허락 없이는 외부인과 만날 수 없으며, 연락할 수도 없다.

그러니 통보에 가까운 잠수는 염연히 계약 위반이다.

더군다나 다프네는 불과 한 달 전, 수도에서 열린 연회 때 이미 사흘이나 잠적한 전적이 있다.

‘아니면 비밀이 누설될까 봐?’

둘 다 일리 있는 가설이다.

계약이 둘의 동의 후에 파기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해도 아쉬울 게 없는 건 에드먼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비밀 누설이다.

마침내 답을 찾은 에드먼은 이 불쾌한 감정을 지우기 위해서는 다프네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바로 보좌관을 불러냈다.

“요한. 화가를 데려와라.”

“화가 말입니까?”

요한은 갑작스러운 에드먼의 명령이 당황스러웠다.

“다프네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가 필요하다.”

“설마….”

요한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안 됩니다.”

요한은 서둘러 덧붙였다.

“마님께서 사라지신 걸 알면 블레드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트집을 잡아 대겠죠.”

요한의 반대는 타당했다. 비록 감옥에 수감 중인 블레드 후작이지만 그의 세력은 아직 수도에 남아 있다.

“더군다나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데미안의 성년식을 치른 지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계약 전, 그러니까 에드먼이 미혼이던 5년 전까지만 해도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그의 세력을 경계했다. 황제가 내린 결정은 황녀와 에드먼을 결혼시켜 그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막 추진하려던 찰나, 에드먼은 대뜸 결혼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황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 소식에 주춤하는 것도 잠시,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이 소식이 없자 2년 전부터는 에드먼과 황녀를 결혼시키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

만약 다프네의 실종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황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둘을 강제로 이혼시킨 후 황녀를 아내로 맞이하라 닦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녀와 황제는 자신의 핏줄이 공작가를 이어받게 하도록 어떻게든 데미안을 내쫓을 거다.

“마님의 사망이 알려지면 피해만 볼 겁니다. 소공작님의 입지가 좀 더 안정된 상황이면 모를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후계자인 데미안이 사생아라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요한.”

잠자코 요한의 말을 듣고 있던 에드먼은 나직이 그를 불렀다.

“다프네는 죽지 않았다.”

“각하…!”

에드먼은 오러를 풀어 터져 나오려는 요한의 목소리를 가로막았다.

요한은 자신을 짓누르는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로브만 나왔을 뿐 시체는 나오지 않았지.”

요한은 그게 그 말입니다, 라고 튀어 나가려는 말을 꾹 참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화가 불러와.”

“…예.”

요한은 곧바로 에드먼의 명을 따랐다.

다행히 인구수가 많지 않은 영지에는 화가가 딱 한 명 있었고, 눈보라가 잠잠해진 틈을 타 화가가 도착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던 화가는 자리에 앉아 있는 에드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각, 각하를 뵙습니다!”

“앉도록.”

화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곧 캔버스와 붓, 물감이 화가의 앞으로 준비되었고, 화가는 눈치껏 붓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저, 각하. 자세는 그리하실는지요.”

현재 에드먼은 창가로 몸을 반쯤 돌린 상태였다.

자세를 묻는 말에 에드먼의 몸이 화가를 향해 돌아가면서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아니.”

“예?”

“그대가 그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다.”

“공작 부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이제 내려오시려는 건가? 화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 안에는 공작과 공작의 최측근만 있었다.

“설명만으로도 사람을 그릴 수 있다고 들었다.”

여태 어디 쓸데도 없었던 보잘것없는 능력이었다. 오랜 기간 무명 생활을 이어 온 화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가는 빠르게 물감을 훑어 갈색과 녹색을 배합할 것들을 눈으로 찾았다.

일단 설명을 다 듣는 게 먼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머리와 눈 색을 말한 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화가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외양을 처음 설명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알기에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일러 주었다.

“인상이라든가 점의 위치라든가 눈썹의 길이와 눈썹산의 높이 등 세세한 것들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에드먼은 오랜 침묵을 깼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막상 내뱉어지는 말이 없었다.

“각하?”

자신을 부르는 화가의 부름에 말을 이어 갈 새도 없이 에드먼은 당혹스러움에 젖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5년 동안 한 지붕 아래 살던 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줄 몰랐으니까.

***

필립은 무명 화가다.

어릴 적 우연히 발견한 재주는 인구가 적은 마을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그것에 힘입어 가족들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며 수도로 올라갔다.

그러나 천재 중에서도 천재만이 모인 수도에서 필립은 한없이 초라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한 가족들을 생각해 15년을 버텼지만, 끝내 무명 화가로 수도 생활의 막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벌써 2개월 전이다.

화가로서의 삶은 거의 포기한 채 살아가던 와중에 윈터 공작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다니.

필립은 제 앞으로 전달되는 최고급 캔버스와 붓, 물감을 보며 침을 삼켰다.

“받으시죠.”

필립은 시종에게서 수표를 건네받았다.

“천, 천 골드?!”

엉겁결에 수표를 받은 필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 골드면 다섯 식구인 필립의 가족이 1년 동안 입에 풀칠하며 일 안 하고도 살아갈 만한 금액이다.

“각하께서 나머지 천 골드는 그림이 완성되면 지급하겠다 하셨습니다.”

총합 2천 골드.

상상도 못 한 금액에 필립의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황실 화가를 제외하고 현재 수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화가도 그림 한 개에 천 골드가 최대인데 고작 자신이 2천 골드라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 저택에서만 생활해 주셔야 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필립은 본래 손이 빠른 편이었지만 2천 골드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림을 한 달 안에 완성할 자신이 있었다.

한 달간 죽은 셈 치고 그림만 그리면 된다.

필립은 들뜬 마음으로 자신이 당분간 지낼 방 침대에 드러누웠다.

각하께서 내일 다시 부른다 했으니 내일부터 진짜 시작이다.

‘정말 아름다웠어.’

화가는 에드먼의 얼굴을 떠올리며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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