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왜 여기 계십니까?”
다프네에게 시선이 팔린 것을 들킨 데미안은 왠지 모를 뜨끔함에 괜히 톡 쏘아붙였다.
바람이 멈추었다. 다프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모아 정리하면서도 데미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그리도 그리워하는 곳이 여기지 않습니까.”
사계절 중 세 개의 계절 동안 눈이 내리는 북부는 보기엔 아름다웠으나 그 추위가 상당하다.
예고 없는 눈보라가 칠 때도 있고, 마물이 자주 출몰하여 함부로 성 밖으로 돌아다닐 수조차 없다.
그의 어머니라는 이름의 거죽을 쓴 여자는 북부를 싫어했다. 새하얀 눈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고, 늘 무료해했으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주 어렸을 땐 그 시선이 제대로 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리석은 날들이었다.
데미안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곳은 북부와 정반대였다. 볼 것이 많고 풍경 하나하나가 아름다웠으며 따스하다. 가히 5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리워할 만한 곳이었다.
“좋으십니까?”
돌아와서 좋으냐는 물음에, 다프네는 열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이 춥구나.”
상황을 모면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선택을 잘못했다. 다프네와 있을 바에는 세 치의 혀처럼 구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리는 편이 더 나았다. 데미안은 제 선택을 후회하며 발코니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성년의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
그를 붙잡듯 조금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예, 그렇지요.”
더는 다프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데미안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혹여 내게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니?”
데미안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빳빳하게 굳은 몸을 돌리자 그런 데미안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가는 다프네가 보였다.
“아니, 아니지. 아마 선물이란 선물은 다 받겠구나.”
다프네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곧이어 해결책을 찾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원은 어때?”
“소원….”
어둠 속에서 유난히 튀는 녹색 눈이 그를 보며 깜빡였다. 그에 따라 눈이 자취를 감췄다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다 들어주마. 성년식인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돌연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손끝부터 피가 가시는 느낌과 동시에 온몸이 차가워졌다.
“제 소원이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데미안은 순식간에 다프네의 앞까지 다가왔다.
늘 올려다보았던 여인은 어느새 그와 눈높이가 똑같아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 감회는 꽤 새로웠다.
항상 이 여자를 올려다볼 줄 알았다. 뻗은 손이 또 내쳐질까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볼 줄 알았는데.
“당신이 사라지는 겁니다.”
마음속에 독 사과처럼 품고 있던 말을 꺼내는 건 생각보다 쉬웠고.
“…그렇구나.”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았다.
다시금 불어오는 바람이 둘 사이를 휘몰아쳤다. 분명 아까와 같은 가벼운 바람일 터인데 데미안에게는 이상하리만큼 뼛속까지 아릴 정도로 시렸다.
***
“부, 부르셨습니까. 소공작님.”
안나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데미안의 모습에 어깨를 떨었다.
요 며칠 동안 상상도 못 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멀리서나 얼굴을 보던 자신이 감히 공작 각하의 앞을 막고 소리를 치지 않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은 기사단의 단장에게 불려 가고 소공작님의 부름을 받지 않나.
안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제 허름한 하녀 복에 비볐다.
“네가 어머니의 측근 시녀라 들었다.”
예상대로 마님과 관련 있었다.
마님을 위한 것인 만큼 안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저, 저는 미천한 하녀인지라 측근 사용인이 될 수 없습니다.”
수하에게 들은 얘기와 다르자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누가 측근 시녀이냐.”
“그게… 마님께서는 측근 시녀가 없으십니다.”
“뭐?”
날카롭게 되물어 오는 물음에 안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데미안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제게 붙어 있던 측근 사용인이 다프네에게는 없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녕 모르고 계셨던 걸까. 안나는 당황한 듯 보이는 데미안의 모습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마님께서 필요 없다 하시기도 하셨지만 결정적으로…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짠 것처럼 아무도 손을 들지 않고 저들끼리 키득거리던 모습이 생생했다. 시녀장은 거기에 동참했다.
“어쩔 수 없군요.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측근 시녀 하나 없이 지낸 지 5년째다.
“그럼 어머니가 데려온 시녀는?”
데미안은 문득 기억 속에서 다프네의 옆에 있던 이를 끄집어냈다.
“아, 마린다는….”
마린다는 다프네가 결혼할 당시 블레드 후작가에서 데려온 시녀다. 마린다는 제 주인과는 다르게 활발하고 구김 없는 성격으로 북부에 빠르게 적응했다.
어쩐 일인지 마님의 측근 시녀가 아니라 성의 일반 시녀로 일하고 있지만….
“마님께서 사라지시기 보름 전, 그러니까… 각하와 소공작님께서 토벌을 떠나신 바로 그날 마린다는 여행을 갔습니다.”
“여행?”
“예. 마님이 그동안 수고 많았다면서 마린다를 여행 보내 주셨어요.”
왜 갑자기 여행을 보낸 것인지 의아했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데미안은 거칠어지는 숨을 최대한 고르며 느리게 내뱉었다.
“…왜 아무도 어머니의 측근 시녀를 자처하지 않았지?”
안나는 그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측근 시녀에 한 명도 지원하지 않는 사소한 일은 다반사다.
일부러 상한 음식을 준비하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빨래를 하지 않아 슈미즈 차림으로 며칠 동안 있게 하고, 마력석이 부족하다며 방에 난방을 피우지 않는 일도 예삿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님은 곰팡이가 핀 음식을 그대로 먹고, 시린 물로 빨래를 하다가 손이 동상에 걸리기도 하였으며,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오돌오돌 떨며 지내셨다.
각하와 소공작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두 분 모두가 자리를 비웠을 때만 일어난 일이니까.’
그것이 뜻하는 의도가 너무나 명백했다.
“그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안나를 난감한 상황에서 구해 준 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린 문이었다.
안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데미안은 제 수하를 발견하고 그를 꾸짖으려 했다.
“소공작님!”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수하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벤트, 지금 이게 무슨….”
“찾았습니다!”
벤트는 호흡을 정돈할 틈도 없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마님… 찾았다고 합니다!”
***
꿀꺽.
알렉은 침을 삼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제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어제 새벽에 떠난 수색대가 발견한 물건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다시 말해 보아라.”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일까. 다섯 번을 넘긴 후로 숫자를 세지 않은 지 오래다.
입 안이 온통 바짝 말라 있음에도 알렉은 습관처럼 침을 삼켰다. 마른침이 힘겹게 목을 넘어갔다.
알렉은 갈수록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입을 억지로 벌렸다.
“이 물건을 변이 마물 소굴에서 발견했습니다.”
변이 마물.
마기를 내뿜는 마물이 변형된 것으로 일반 마물보다 더 크고 강하다.
그 때문에 1년 전, 약 반년이라는 이례적인 토벌 기간 때 북부의 변이 마물을 모두 제거했으나 몇 마리가 남아 있었다.
일찍이 그 씨를 자르지 못한 것이 이렇게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마님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렉이 수색대로부터 받은 것은 다름 아닌 로브였다.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기고 피에 흠뻑 젖어 뻣뻣하게 굳어 버린 로브.
진짜 문제는 이것이 변이 마물 중 하나인 늑대 소굴에서 발견됐다는 것이고, 마님의 로브라는 것이다.
마님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용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 입었던 옷이 맞았다.
백표범의 모피로 만든 로브는 북부의 구하기 힘든 특산물 중 하나로 5년 전 결혼 선물로 측근 가문의 수장 중 하나가 마님께 선물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마님의 것이 맞다.
그러나 이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직감이 든 탓에 감히 말하지 못했다.
“확실한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
“확실합니다.”
“시체는?”
“…수색대의 말에 따르자면 늑대 소굴에는 이미 사람의 뼈가 많았고, 로브에 묻은 피는 사람의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이 로브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
“찾아.”
알렉은 고개를 들었다.
“시체, 찾아와.”
“각하.”
꺼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불 하나만 켜진 방 안은 어두웠다.
에드먼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살점 한 조각이라도 샅샅이 뒤져서 내 앞에 가져와.”
순간 번쩍, 하며 소리 없는 번개가 내리쳤다.
에드먼의 표정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을 본 알렉은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각하께서는 부디 움직이지 마십쇼.”
겨울의 추위가 절정에 오르는 이맘때쯤이면 이상하게 에드먼의 오러가 날뛴다.
오래전 상급 마물이 출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토벌에 참여했던 에드먼이 이성을 잃고 날뛰어 큰일이 날 뻔했던 적이 있다.
비록 당시 나이가 어려 오러를 다루는 데 미숙했던 것이지만 에드먼은 지금도 자신을 믿지 못하고 그 시기가 오면 어김없이 스스로를 가뒀다.
알렉이 에드먼에게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은, 오로지 직감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에드먼은 다프네를 찾으러 직접 움직였을 거다. 그럴 리 없을 테지만,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때였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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