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다 읽고 시선을 돌리면 내용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더욱더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에드먼은 조금 거친 몸짓으로 편지를 서랍장에 넣고 닫았다. 이 편지를 계속 보고 있을수록 속이 울렁거리며 불쾌했다.
다른 생각을 하고자 에드먼의 눈은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곧바로 책상 위에 눈에 띄는 서류를 발견했다.
평민들이 쓸 법한 질 낮은 종이 서류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급 양피지 사이에 있던 탓에 더욱 이질감이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의 정체는 이미 모든 절차를 밟았으며 딱 한 명의 서명란이 비워진 이혼 서류였다.
에드먼은 종이 위에 기입된 날짜를 확인했다. 한 달 전, 수도로 올라갔을 때다.
그가 당연히 이혼을 받아들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 놓은 것이 퍽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에드먼은 이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치 않은 결혼이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약점이 잡혀 계약으로 맺어진 상태에서 평생 이렇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고작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는 칸에 서명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그런 얄팍한 관계다.
에드먼은 곧바로 깃펜을 들어 펜촉을 종이에 올렸다. 이제 손목을 살짝만 움직여 매일 서류에 기계처럼 새겨 넣는 제 서명을 쓰면 된다. 그럼 이제 모두 끝이다.
그러나 일순 시간이 멈춘 듯 에드먼은 그대로 굳었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텅 빈 서명란이 점차 잉크로 물드는 것을 눈에 담았다.
“…아.”
뚝.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깃펜이 부러졌다.
에드먼이 다시 움직인 것은 부러진 깃펜에서 흘러나온 검은 잉크가 그의 손을 다 적신 후였다.
에드먼은 끈적한 잉크가 뚝뚝 흐르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폈다.
두 동강이 났던 깃펜은 검은 재와 잉크만 남긴 채 사라진 상태였다.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소름 끼치는 저주다.
소드마스터인 에드먼이 세간에 단 한 번도 오러를 내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에드먼의 오러는 검은빛을 가졌으며 힘이 닿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자칫 컨트롤에 실패하거나 이성을 잃을 때마다 그의 주위에는 검은 재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약점이자 예정에도 없는 결혼을 한 이유였다.
에드먼은 재와 잉크로 더럽혀진 장갑을 벗었다.
대마법사의 봉인 마법이 몇 겹이나 걸린 팔찌를 찼음에도 이렇게 이따금 새어 나올 때가 있다.
에드먼은 손에 쥐고 있던 장갑을 대충 구겨 던지고 품 안에서 궐련을 꺼내 불을 붙여 두어 번 빨았다. 일반적인 궐련과는 달리 진정제와 수면제 효과가 있는 잎을 빻아 만든 것이었다.
편지를 볼 때처럼 또다시 울렁거리던 속은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평온함을 되찾았다.
에드먼은 그 평화로움 속에서 흐릿한 시야로 눈을 깜빡였다.
왠지 오늘도 잠 못 이룰 것 같았다.
***
“알렉 경.”
“…도련님.”
알렉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나오자마자 마주한 데미안을 보고 흠칫 놀랐다.
너무 닮은 얼굴에 순간 에드먼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각하를 뵈러 오신 거라면 지금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 그러지.”
데미안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힘을 끌어모아 겨우 방을 나온 직후라 휴식을 취하려던 알렉은 데미안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어머니를 찾는 건 어떻게 된 건가.”
데미안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물음에 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알렉은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검은 기사단으로 수색대를 꾸릴 것 같습니다.”
데미안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알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 상황이 황당한 건 마찬가지지만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 내가 도울 일은 없는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알렉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무리 각하를 닮아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지만 사라진 사람이 몇 년간 한 지붕 아래에서 어머니로 있던 이였기에 걱정된 모양이다.
“소공작님께서는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곧 해결될 일이니 굳이 데미안까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알렉의 말에 데미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빠르게 본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 수고하게.”
알렉을 등지고 제 방으로 돌아온 데미안은 초조하게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문득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데미안은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인상을 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 여자를?’
단 한 번도 어머니로 생각한 적 없는 여자를?
아니다.
갑자기 사라진 여자를 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머니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뒤늦게 소중함을 자각한 것도 아니며, 무언가 다른 깨달음을 얻은 것 또한 아니다.
그런 깊고 복잡한, 자신은 영영 알 수 없는 느낌이 아니다.
데미안은 자리에서 멈춰 선 채 제 보좌관, 벤트에게 명했다.
“벤트, 어머니의 실종을 고했던 하녀를 데려와라.”
그러니까 이건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제 소원이요? 당신이 사라지는 겁니다.”
불안감에 불과했다.
***
ㅎㅂㄹㄱ.공금
한 달 전.
화려한 연회의 밤.
한창 물오른 분위기에 사람들은 술에 취해 저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올해 열다섯이 된 윈터 소공작의 성년식을 한 달 먼저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주인공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연회를 즐겼다.
“윈터 공작 각하를 실제로 뵐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기대돼요.”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애는 불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국경선을 맞댄 산맥이자 마물의 주 서식지인 북부 지역을 수호하는 윈터 공작가는 명성이 자자한 가문이었다.
더군다나 7년 전,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점차 제국을 쇠퇴의 길로 이끌던 대전쟁을 고작 2년 만에 끝내 버린 이가 바로 윈터 공작이다.
이 때문에 윈터 공작은 황제의 신임과 권력, 제국민의 존경심까지 동시에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특히나 유명한 것은 바로 윈터 공작과 소공작의 아름다운 외모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들을 실제로 볼 생각에 어린 영애들은 물론 귀부인들까지 잔뜩 들떠 있었다.
게다가 올해 성년이 되는 소공작에게 아직 약혼자가 없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연회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결혼 후 약 5년 만에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공작은 여전히 한 폭의 명화 같았다.
모든 걸 삼켜 버릴 것 같은 새까만 머리와 오묘한 달빛을 머금은 눈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그 누구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온통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이목을 끄는 수려한 외모에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의 서늘한 인상에 사람들은 기가 죽어 마지못해 공작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공작도 공작이지만 곧 성년이 되는 소공작 또한 이목을 끄는 건 마찬가지였다. 빼어난 외모를 가진 공작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것처럼 닮은 소공작은 특유의 서늘한 눈매마저 똑같았다.
폭풍이 지나가듯 공작과 소공작이 차례대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후에 나타난 것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자였다.
좋게 말해 차분한 인상이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수수하고 흐릿한 인상을 한 여자의 녹색 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공작과 소공작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아름답지만 왠지 모를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여자의 돌발 행동에 어린 영애는 화들짝 놀랐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 같은데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귀부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부채를 팔랑거렸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윈터 공작 부인이세요.”
“네?”
어린 영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공작이 현 공작과 공작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공작 부인과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 없는 영애는 아름다운 공작님과 결혼한 여인도 그에 못지않은 미인이리라 예상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윈터가의 남자들 앞에 선 공작 부인은 아까보다 더 볼품없어 보였다.
공작 부인과 공작 사이에서 짧은 대화가 오갔다.
‘분명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영애는 둘의 모습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둘의 얼굴은 지극히도 무표정이었기에 싸우는 건가 싶어 주위에 있는 이들이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무어라 말하던 다프네가 돌아가려는 찰나, 에드먼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손등에 담백한 키스를 남겼다.
‘그래, 그럼 그렇지. 두 분이 싸우셨을 리가.’
황실파 핵심 세력과 귀족파 핵심 세력의 결혼은 한때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복잡한 사정을 극복하고 기적처럼 맺어진 공작 부부의 이야기는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했다.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영애는 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짧은 대화도 잠시, 공작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어머니?”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불이 켜지지 않은 발코니는 어두웠으나 상대를 알아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발코니에 반쯤 몸을 밀어 넣었던 데미안은 다프네를 발견하고 망설였다. 이대로 다시 밖에 나가 시달릴 것인가, 아니면 남보다 못한 어머니와 있을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혹시 소공작님 보셨소?”
“나도 찾는 중이었네만.”
커튼 하나를 두고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데미안은 재빨리 발코니 안으로 마저 들어와 문을 닫았다.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을 따돌린 데미안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등장이 사교계에 화제가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으나 예상보다 더 과했다.
내내 무표정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탓인지 사람들은 몇 배로 더 많이 몰려왔다. 한 사람 상대하고 뒤 돌면 열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체력과는 별개로 기가 달렸다.
게다가 옆에 그 또래 영애를 한 명씩 데리고 있는 의도가 너무 훤히 보여 불편했다. 처음 맡은 향수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주위에 있는 귀족 여성이라고는 어머니뿐이지만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는 건조하고 무향에 가까웠다.
“많이 시달린 모양이구나.”
평소와 다르게 가볍고 산뜻한 말투에 데미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중급 마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베어 내는 데미안이 질색하며 사람을 피해 다니는 모습이 우스운 것인지 입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다프네의 갑작스러운 미소에 데미안은 흠칫 굳었다. 그러나 이내 평소와 다른 다프네의 모습을 납득했다. 불그스름한 뺨과 바람을 타고 오는 옅은 알코올 냄새.
수도로 올라온 직후 사흘 내내 외박하다가 연회 시간에 겨우 맞춰 들어와서는 창백한 얼굴로 피곤하다며 쉬겠다고 말한 이가 술에 취해 연회장 구석에 있는 게 황당했다.
게다가 틀어 올렸던 머리는 언제 푼 것인지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길게 늘어진 머리가 흩날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나부끼는 머리의 움직임을 따라 평소와 다르게 풀어져 보이는 그녀의 얼굴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데미안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녹색 눈과 마주쳤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