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몇 달 전 수도로 올라가서 따로 성대한 연회를 열었기 때문에 성년식은 측근 가문의 가주들을 빼면 하객 따윈 없었다.
공작은 제 집무실 창문으로 보이는 어느 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택의 안주인인 공작 부인. 그의 아내의 방이었다.
이상하다.
공작은 어제부터 이어진 생각을 떨쳐 내지 못했다.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답을 찾지도 못한 채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았다.
공작의 상념을 멈춰 낸 것은 작은 노크 소리였다.
“들어와.”
시종장이나 측근을 생각했으나 막상 나타난 것은 저택의 하녀였다. 모르는 얼굴인 걸 보니 안채에서 일하지 않는 하녀인 듯했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자 주근깨가 박힌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고,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용건이 무엇이냐.”
“저, 그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하녀가 입을 열던 찰나,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각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알겠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성년식이 시작할 시간이다.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공작은 그대로 하녀를 지나쳤다.
아직 용건을 해결하지 못한 하녀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각, 각하. 꼭 드릴 말씀이….”
“그게 데미안의 성년식보다 중요하더냐.”
하녀의 입이 꾹 다물렸다.
공작은 하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을 나와 성년식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공작이 들어오자 성년식은 시작되었다.
상석에 앉은 공작과 꽤 거리가 있는 곳에 모인 측근 가문의 가주들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마님이 보이시지 않는군요.”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지만 성년식에서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다니. 쯧쯧.”
“게다가 결혼한 지 몇 년이 되도록 자식 소식도 없지 않습니까. 공작 부인께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닐지요. 다 같이 대모님께 얘기를 올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
보통 이런 중요한 날에는 불참하게 되더라도 자리를 마련해 놓는다. 하지만 이곳에는 마님의 자리 따윈 없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윈터 부자와 마님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가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작의 귀에 들리지 않게끔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곳 없는 마님을 헐뜯었다.
그렇게 성년식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끝이 났다.
가주들과 가벼운 만찬을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오는 공작을 데미안이 붙잡았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있다 집무실로 올라와라.”
“알겠습니다.”
마침 그도 할 말이 있었다.
이제 성년식도 치르고 정식으로 성년이 되었으니 소공작의 권한을 더 확대할 생각이었다.
시녀장과 시종장을 대동한 채 도착한 집무실 앞에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녀장은 그 손님의 정체를 발견하고 당황했다.
“안나? 네가 왜….”
성년식 전에 마주했던 하녀라는 것을 알아챈 공작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의미를 눈치챈 시녀장은 굳은 얼굴로 하녀를 끌어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리 와.”
“시녀장님! 잠시만요.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당장 따라오지 못해? 감히 각하 앞에서 이게 무슨….”
“각하! 마님이 사라지셨어요!”
억센 시녀장의 손에 질질 끌려가던 하녀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너….”
당황한 시녀장의 손아귀 힘이 풀리자 하녀는 곧바로 공작의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마님께 큰, 큰일이 생기신 게 분명해요.”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잠시 멈칫했던 공작은 이내 무미건조한 어투로 대꾸했다.
하녀는 공작의 태도에 당황하였으나 황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신 건 처음입니다.”
“며칠째더냐.”
공작의 물음에 하녀는 울음을 꾹 참으며 답했다.
“오늘로 벌써 열흘째입니다….”
공작은 뒤에 있는 시녀장과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임에도 둘은 그를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의 직감으로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다른 감정을 내비치는 공작을 얼마 만에 본 것인지 둘은 그저 손을 덜덜 떨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사이 하녀는 말을 늘어놓았다.
“마님께서 원래 이러실 분이 아닌데… 마차도 쓰지 않으시고 하녀들에게조차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공작은 하녀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곧바로 어디론가 향했다.
“아버지?”
중간에 데미안을 마주쳤음에도 공작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은 목적지 앞에 우뚝 멈추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발길을 끊은 방 앞에 선 공작은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뽀얀 먼지와 주인 없는 방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방이었다.
몇 없는 가구 탓인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더미는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공작은 얇게 쌓인 먼지를 무시하고 편지를 뜯었다. 단정한 글씨체로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
공작은 가벼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어머니 방이 왜 이럽니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얼떨결에 공작을 따라온 데미안이 자욱한 먼지를 뚫고 방에 들어왔다.
“…데미안. 알렉을 불러와라.”
갑자기 검은 기사단장을 불러오라는 말에 데미안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갑자기 어머니 방으로 향했으며, 방은 왜 먼지로 뒤덮여 있는 것이며, 느닷없이 알렉을 왜 불러오라는 것인지, 전부.
그때, 데미안은 공작의 손에 들린 편지를 발견했다. 데미안의 감은 좋은 편이었고, 이번 역시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공작은 편지와 함께 남아 있는 서명이 완료된 이혼 서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프네가, 사라졌다.”
***
“불가능합니다.”
알렉은 단호히 말했다.
사라진 마님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풀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룻밤 사이에 눈보라가 더 거세져 이동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으나 텔레포트는 상급 마물이 출몰하거나 전쟁터에서만 사용 가능했기에 눈보라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은 알렉이 들어온 순간까지 눈을 떼고 있지 않던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알렉은 에드먼이 평소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평소 잘 제어하던 오러의 기운이 얄팍하게 느껴졌다.
“일반 기사라면 마님을 찾기도 전에 눈보라에 실종될 겁니다.”
“알렉. 나는 검은 기사단을 말하는 것이다.”
“…예?”
알렉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연히 일반 기사들에게 수색 명령을 내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검은 기사단이라니.
에드먼과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꾸려진 검은 기사단은 무패 전설을 지닌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에드먼은 그런 기사단을 사람 하나, 그것도 고작 마님을 찾는 데 쓰겠다는 말이었다.
각하께 충성을 바친 이들이니 불만 없이 마님을 찾겠지만 알렉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각하.”
알렉은 다급히 에드먼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검은 기사단에게 수색 명령을 내릴 것 같은 모습에 알렉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너무 과한 대처입니다.”
“과하다?”
에드먼의 한쪽 눈썹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에드먼의 반응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알렉은 이왕 칼을 꺼낸 거 뭐라도 썰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입을 마저 열었다.
“하루 이틀 후면 잠잠해질 눈보라이니 좀 더 기다려 보자는 뜻이었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눈보라인 만큼 가까울 시일 내 멈출 확률이 높았다.
“자네라도 저 속에서 열흘을 버티기 힘들 텐데.”
에드먼은 창문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어찌나 눈이 살벌하게 휘날리는지 시야 확보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광경에 알렉은 말문이 막혔다. 에드먼의 말에 반박할 수 없을뿐더러 이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검은 기사단으로 수색대를 꾸려.”
“차라리 잘된 일 아닙니까.”
그렇기에 그는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마님께서 계약을 어기셨으니 당연히 화가 나시겠죠. 하지만 이건 기회입니다. 각하께서 고생하신 날만 해도 벌써 5년째입니다.”
알렉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한땐 황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힘을 잃고 욕심만 남은 그 뱀 같은 작자가 제 딸을 들이밀며 히죽거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모든 시발점은 언제나 얌전한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에게 있었다.
그 여자가 제 주인을 사랑하게 되어 여자의 아비가 약점을 운운하며 둘을 결혼시켰다.
“그 망할 영감탱이의 딸이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한 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아십니까? 예,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저 눈보라 속에서 일주일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하물며 열흘이라니요. 저 눈보라 속에 마님이 계시다면 진작 변을 당하셨을….”
“알렉.”
줄곧 참아 왔던 말을 늘어놓던 알렉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별안간 상상도 못 한 방대한 살기에 노출되자 온몸의 근육이 빳빳하게 굳었다.
살기는 순식간에 퍼져 앞에 서 있는 알렉을 집어삼킬 것처럼 넘실거렸다.
얼마 만에 에드먼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는 것인지 알렉의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수색, 당장 시작해.”
그렇게 한참을 옴짝달싹 못 하던 알렉은 에드먼이 살기를 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는 알렉의 위로 메마른 음성이 들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물러가.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에드먼의 축객령에 알렉은 힘이 완전히 풀린 몸을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에드먼은 애써 서류에 집중하려 했으나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옅은 한숨을 느리게 내뱉었다.
하필 시기가 좋지 않을 때 이런 일까지 생기니 오러를 다루기 더욱더 어려웠다.
에드먼은 의자에 몸을 완전히 파묻고 피곤함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님께서 계약을 어기셨으니 당연히 화가 나시겠죠.”
에드먼은 알렉이 남기고 간 말을 떠올리며 조금 멍한 얼굴을 했다. 마치 자신이 화가 나 있는 줄 몰랐던 것처럼. 어색한 손길로 굳은 입가를 더듬었다.
에드먼은 장갑을 낀 손을 내려 새벽 내내 읽고 또 읽어 내렸던 편지를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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