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아내로 맞이하시죠.”
첫 만남은 강렬했다. 이제껏 많은 청혼을 받아 왔으나 이런 통보는 처음이었으니까.
“…아내?”
툭, 에드먼은 책상을 두들기던 손을 멈췄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블레드 후작.”
다프네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자 지팡이를 짚은 채 형형한 눈을 치켜뜬 노인이 있었다.
반역에 가담한 증거가 밝혀지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블레드 후작이 에드먼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그러나 실상은 거래가 아닌 협박에 가까웠다.
약점을 운운하며,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이다.
“제가 입을 열면 많이 곤란해지실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공작 각하.”
히죽거리며 내뱉는 도발에 뒤에 있던 검은 기사단장, 알렉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에드먼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입을 다물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저 뱀 같은 작자가 에드먼의 약점 하나만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만남을 요청했을 리 없다. 이 자리에서 저들을 죽여도 에드먼에게 피해가 가게끔 미리 손써 놓고도 남았을 이다.
그 때문에 에드먼은 알렉을 막아선 채 태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비밀을 알고 있는지 몰라도 죄인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블레드 후작의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대수입니까. 이 늙은이가 하나 있는 딸아이의 소원 하나 못 들어줄까요. 어떻게든 들어주어야지요.”
소원이라.
에드먼의 시선이 옆으로 비껴갔다. 블레드 가문의 고명딸이자, 이 모든 사달을 만든 장본인.
등장부터 지금까지 고개 한 번 들지 않는 여자.
“고개 좀 들지.”
저를 향한 말임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런 장식 없이 틀어 올린 머리가 사라지고 이목구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말로도 아름답다 할 수 없는 흐릿한 인상이다. 드러난 어깨만큼이나 마른 얼굴의 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있었고, 이 때문에 가장 띄는 눈에 시선을 빼앗기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내리깐 눈. 녹음을 담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다프네 블레드입니다.”
다프네의 첫인상은, 이상하리만큼 강렬했다.
그날, 거래는 성사되었다.
접전은커녕 서로 반대편에 서 있던 가문 간의 결혼 소식에 한동안 사교계는 떠들썩했다. 그 신부가 볼품없는 다프네 블레드라는 것이 한몫을 했다는 건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혹자는 이 결혼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서 떠들어 댔다.
그러니까 수도에서 열린 화려한 결혼식 전까지는.
전쟁 영웅과 반역 가문 영애의 결혼식에는 그야말로 국혼에 준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보통 귀족의 결혼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결혼식 후, 이 결혼에 무언가 있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다프네의 예상대로였다.
“결혼식은 최대한 성대하게 해 주세요. 국혼 못지않을 만큼.”
다프네와 에드먼은 결혼 전 딱 두 번의 만남을 가졌다.
첫 만남을 제외하고 결혼식에 걸 그림을 위해 그리고 다프네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 그게 전부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 결혼은 아무런 결함이 없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치장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수에 가까운 두 가문이 뜬금없이 결합을 맺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결혼 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님이 사라졌습니다.”
다프네가 사라졌고.
“…다프네.”
마침내 다프네를 찾았다. 다프네는 크게 뜨인 눈을 깜빡였다.
다프네를 품에 안은 에드먼은 빠르게 그 얼굴 위를 훑었다. 이 얼굴을 내가 왜 잊었을까. 품 안에 가득 찬 작은 몸이 바르작거리며 떨렸다.
“에드먼. 당신이 왜, 왜 여길….”
마치 오면 안 될 곳을 온 듯 당황하는 모습에 에드먼은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다프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침묵했다.
“내가 그냥 보내 줄 거라 생각했습니까.”
에드먼의 손이 다프네의 배 위를 덮었다.
“감히.”
그리고 힘을 주어, 두꺼운 옷 너머로 다프네가 느껴지게끔만, 움켜쥐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다프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
마님이 사라지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련님의 성년식을 열흘 남긴 시점에서 홀연히 사라지셨다.
그것을 처음 알게 된 하녀들은 신경 쓰지 않으며 이제껏 그랬듯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마님은 이따금씩 하루 이틀 정도 사라졌다가 나타나시고는 했다.
처음에는 불안에 떨던 이들도 5년이 흐르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님이 사라지신 후에도 하루는 똑같이 흘러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님은 없는 이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하루, 이틀.
마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사흘, 나흘.
여전히 마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닷새, 엿새.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방에는 조금씩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그저 공작님과 소공작님의 귀환 전에 마님이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무리 빈껍데기뿐인 가짜 마님일지라도 불똥은 애꿎은 자신들에게로 튈 테니.
이레.
마님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하녀들은 시종장과 시녀장에게 마님의 행적을 고했다.
“이런 적이 종종 있으시다.”
마님이 사라지신 것도 몰랐던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바쁜 자신들을 고작 이런 일에 시간 낭비하게 한 것을 꾸짖었다.
어차피 돌아올 마님이다.
내심 큰일이 생겨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하던 이들은 안도했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소공작님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선물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여드레.
동이 트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보라를 뚫고 전갈이 왔다.
한 달 전 마물 토벌을 위해 떠났던 이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저택은 주인들의 귀환을 준비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계획보다 훨씬 이른 귀환이었다. 이 때문에 미뤘던 성년식이 본래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게 생겼기에 사용인들은 바삐 움직이느라 완전히 잊고 말았다.
마님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흐레.
북부에 위치한 윈터 공작가의 주인들이 귀환했다.
소공작님의 성년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풍기는 마물의 짙은 피 냄새에 사용인들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마물로부터 북부는 물론, 제국 전체를 지키는 검은 기사단은 두려움과 동시에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들이 풍기는 위압감이 대단한지라 사용인들은 매번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곧이어 거친 눈보라를 뚫고 검은 망토를 두른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선두에 있는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와 소년이었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사용인들은 허리를 숙이며 입 모아 말했다.
저택의 주인, 윈터 공작은 그들을 지나친 것도 잠시, 자리에서 우뚝 멈추었다.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는 모습에 안도하고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공작의 태도에 빠르게 눈을 굴렸다.
“부인은.”
공작이 찾는 것은 마님이었다.
마물 토벌을 끝내고 돌아올 때면 차가운 시선을 맞으면서도 꿋꿋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 있던 마님이시다.
공작의 물음을 받은 시종장은 그제야 마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작의 말에 윈터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소공작, 데미안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매일 서 있던 자리를 봐도 데미안이 찾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
공작과 똑 닮은 얼굴로 물으니 시종장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것이….”
얼버무리는 모습에 데미안은 알겠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냉소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나오시지도 않겠다는 건가.
“또 나가셨군.”
“예? 아. 예, 예. 맞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도련님과 마님의 관계를 잘 아는 사용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난리 칠 것이라 예상했던 데미안은 그대로 계단을 딛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공작마저 사라지자 하녀들은 시종장과 시녀장에게 달려들었다.
“어떡해요. 마님을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누군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고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자 난감해하던 시녀장이 눈을 시퍼렇게 떴다.
“안나, 내일이 소공작 각하의 성년식이라는 것을 잊은 게야?”
시녀장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은 하녀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거짓을 고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마님께서 나가시는 일이 빈번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물론 이번처럼 아무 말도 없이 나간 건 처음이었으나 시녀장의 기세에 눌린 하녀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몇 달 전 수도에서 연회를 열었다지만 이번이 정식 성년식이라는 것과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너희도 잘 알고 있겠지.”
하녀들은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성년식이 무사히 치러진 후에 말씀드려도 늦지 않다.”
고작 하루 차이다.
어쨌거나 저택의 책임자 중 한 명이 그리 말하니 아랫것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하녀들을 해산시킨 시녀장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안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성년식이 열리는 곳에 윈터 공작가의 가신들이 한자리에 모일 텐데 그런 곳에 드러내기에 마님은 너무 부끄러운 존재였다.
시녀장은 부디 내일까지 마님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며 성년식 준비를 위해 다시금 바삐 움직였다.
열흘.
마침내 성년식 날의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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