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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129화 (129/129)

외전2(5)

캐서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파 아래에는 아이 둘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뭘 깼다고.”

응접실 유리창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죄송해요. 내가 했어요.”

“아니에요. 타혼이에요!”

두 아이가 말을 우다다 내뱉더니 서로를 바라봤다. 아이들끼리 고개를 서로 끄덕이고, 아혼이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한 게 맞아요!”

이건 우애가 좋아서 서로를 감싸 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해야 할까.

아이들끼리 눈싸움을 한다고 눈뭉치를 던지다 응접실 창이 깨졌다. 곁에서 지나던 집사가 다칠 뻔했다. 다친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로렌디스가 곁에서 읽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다친 곳은?”

“없어요.”

“진짜 괜찮나?”

“네! 네! 괜찮아요!”

집사는 껄껄대며 괜찮다고 이야기했고, 깨진 창문은 갈면 될 일이었다. 로렌디스가 아이를 감싸안았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당신, 내가 훈계 중인데…….”

“춥잖아. 아이들에게 따뜻한 핫초코를 먹이고, 벽난로 앞에서 몸부터 좀 녹인 뒤에 혼내도 늦지 않아.”

충분히 늦는다. 그걸 아는지 아이들은 쪼르르 벽난로 앞으로 뛰어가더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털모자를 쓴 아이들이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손을 꼼지락대며 벽난로로 뻗는데, 캐서린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이쯤 되면 오늘은 혼내는 건 포기해야 한다.

“담요를 가져올게.”

“네에! 타혼이 가져올래요!”

하녀장이 마침 담요를 챙겨 돌아왔다. 타혼이 담요를 가져와 제 누나의 어깨에 두르고, 제 어깨에도 둘렀다. 여우털이 보송보송한 흰 털 담요였다.

“아직 어려서인지 서로 잘 따르는구나.”

털모자를 벗은 타혼이 제 머리를 헝클였다. 로렌디스가 다가가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너무 물러요.”

“저 아이들이 나를 약해지게 만들어.”

캐서린은 찻잔을 만지작대며 작게 미소 지었다.

소란스러운 이 평화로움이 나쁘지는 않다.

* * *

협탁에 술병이 놓였다.

캐서린은 술잔으로 목을 축였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내다봤다. 달빛이 으깨지듯 흩어졌다.

바깥으로 새까만 밤하늘만 펼쳐졌다.

로렌디스가 다가와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었다.

“왜 이러고 있어.”

“시간이 무척 빠르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당장은 느리다가도 돌이켜보면 모든 게 빠르게 지나가요.”

로렌디스가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가벼운 가운 차림이었다.

“바쁜 거 아니에요?”

“오늘은 보좌진도 모두 퇴근했어.”

“둘이서만 이러고 있는 게 오랜만 같네요.”

그녀가 머리를 기대자, 굵은 손가락이 긴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는 손가락에 감긴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그냥 잠깐 이러고 싶었어요.”

“이유도 없이?”

“밤하늘이 너무 맑아서요. 넋 놓고 시선을 빼앗겼거든요.”

술잔은 내려놓았다.

“이만 잘까요.”

“아이들은?”

“동화책을 읽더니 아이들끼리 잠들었어요.”

캐서린은 두 팔을 뻗었다. 얇은 침의 차림으로 그에게 안겨드는데,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아귀에 긴 머리칼이 엉켰다. 둘은 침대로 걸음하고 부드럽게 누웠다.

로렌디스가 베개 옆으로 팔을 짚고 허리를 수그렸다.

‘춥.’

캐서린은 그의 턱에 자잘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허리 안쪽으로 파고든 팔이 그녀를 단단히 떠받쳤다. 그의 짧은 머리칼이 뺨을 간질였다.

캐서린은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그대로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의 숨이 파고들었다.

두 입술이 맞물렸다. 숨결이 탁하게 터졌다.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하아.”

캐서린은 작게 앓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아랫배에 열기가 가득 고였다.

덥다. 서서히 더워진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손으로 꾹꾹 누르는데, 짙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손장난이 생겼어.”

“음…… 싫어요?”

“싫을 리가 없잖아.”

그의 손길이 배꼽을 더듬거렸다. 길을 잃은 듯 아래를 서성이던 손길은 점점 더 위로 올랐다. 턱에 자잘한 입맞춤을 이어 간 그가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잘근.

살갗을 약하게 깨물었다. 아랫배에 미약한 열기가 고였다.

“더워요.”

“뺨이 붉어.”

“하아…….”

캐서린이 탄식하듯 앓는데, 그가 상의 안으로 고개를 넣었다. 배꼽에 입술이 닿았다. 몸속에 고인 열기에 피부가 화끈거렸다.

캐서린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덥지.”

그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퍼졌다. 그가 앉더니 셔츠를 매끄럽게 벗었다.

어깨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는데, 단단하게 잡힌 근육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금 더운 것도 같고요.”

“나도 더워.”

로렌디스가 제 무릎에 캐서린을 앉혔다. 미소 짓던 그가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 * *

긴 머리칼이 베개 위로 흩어졌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은 이른 새벽 무렵이었다.

캐서린은 이불 안으로 몸을 묻었다. 이불은 보드라웠고 캐노피가 희미한 새벽빛을 가려 주어 나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허리 아래에 단단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왔다. 잠에서 깬 건지 잠결인지, 로렌디스가 두꺼운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캐서린은 제 몸을 내려다봤다.

침의를 입은 몸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안겨 있었다.

나른하게 숨을 토해 내는데, 곁에서 로렌디스가 뒤척였다.

그는 잠든 이를 달래듯 허리를 다독였다. 그 다독임을 나른하게 느끼며, 캐서린은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로렌디스의 목소리가 곁에서 묵직하게 울렸다.

“다 잤나?”

“당신은 조금 더 자요.”

“그럼 당신도 이리로 와. 얼마 못 잤잖아.”

캐서린은 몸을 다시 눕혔다. 이불 안에서 몸을 둥글게 마는데, 그가 팔을 뻗어 왔다.

“조용하네요.”

“아직 새벽이잖아.”

“그러게요. 이제 해가 뜰락 말락 하네요.”

아이들은 아직 한창 잘 시각이었다. 방 안에는 따뜻한 훈풍이 불었다. 이불 속에서 늑장을 부리기 좋은 날이었다.

“조금만 더 끌어안고 있자.”

여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로렌디스가 숨을 들이쉬었다.

“네게서는 마른 햇볕 냄새가 나. 끌어안으면 열기를 한가득 품은 기분이거든.”

그러니 이대로 아주 잠깐만 있자. 둘은 그러고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그래요. 조금만.”

어느덧 바깥에는 하인들이 다니는 기척이 들렸다. 이제 막 일과를 시작한 이들의 활기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빗자루로 바깥을 쓸고 길을 닦아 놓고, 아이들이 어지른 곳을 정돈하고.

그런 와중에도 가벼운 웃음이 퍼졌다.

“잘 자.”

캐서린은 눈을 감았다. 노곤한 기운이 몸 안에 퍼졌다. 허리에 감긴 팔이 안정적이어서인가?

다시 선잠에 빠진 캐서린은 짧은 꿈을 꾸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캐서린은 본인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만났다. ‘캐서린 헬렌’ 본인이었다.

그녀가 햇볕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맞춰 왔다.

‘너는 지금 안녕하니?’

캐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그녀는 책을 덮어 상대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럼 됐다.’

그 평화로운 목소리와 표정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울컥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모습이 고요하게 잠든 여인 같았다.

햇살이 녹아내릴 듯 내리쬐고, 풀잎은 바람에 산들거렸다. 사르륵, 사르륵.

그녀는 한동안 거기에 멀거니 있었다.

“……린. 캐서린.”

“……으응.”

“이만 일어나야지.”

캐서린은 두 눈을 떴다.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무언가 잔상이 흐려지듯 흩어졌다. 눈앞에는 로렌디스가 자리했다. 그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우기 미안했어. 그래도 너무 늦게 일어나면 안 되니까.”

“계속 곁에 있었어요?”

로렌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꿈 말인가?”

“따뜻하고 뭉클한 꿈이었어요.”

온기가 가득 퍼지고 간질거리는 그런 꿈 말이다.

캐서린은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해가 벌써 저 멀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을 젖혔다.

“어…….”

“브레디가 아이들을 대신 봐 주었어.”

이 아침에도 조용하다는 게 이상했는데, 브레디가 제 목에 목마를 태우며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브레디가 약식으로 예를 갖췄다.

타혼이 목마를 타며 맑게 웃었다. 두 팔을 휘젓는데, 브레디가 두 팔로 단단하게 타혼을 붙잡았다.

아혼이 멀리 뛰어가며 브레디의 옷자락을 당겼다.

“오래 잤네요.”

“좀 더 자라고 브레디가 대신 놀아 주던 모양이야.”

캐서린은 은은히 웃어 주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타혼이 고개를 젖히더니 그녀를 발견했다. 두 팔을 흔드는 모습에 캐서린도 같이 응해 주었다.

방금 꾸고 났던 꿈처럼, 포근하고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외전2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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