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4)
아혼은 빙판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호수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아혼은 짧은 발로 오리처럼 오도도 걷다 고개를 돌렸다.
“너 따라오면 안 된다는데도.”
“같이 가, 누나.”
“얼음은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타혼.”
아혼은 빙판 위에서 넘어진 제 남동생을 일으켜 세웠다. 두 손을 꼭 잡는데, 타혼이 종종걸음으로 제 누나에게 달려와 옆구리에 매달렸다.
“이 얼음이 깨져서 빠지면 어떡해……. 누나가 빠지면 내가 잡아 줘야 해.”
“이 시기면 가장 추운 시기라서 빙판도 두껍게 얼어. 그리고, 네가 잡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잡아 주는 거야.”
아혼은 타혼을 옆구리에 꼈다.
아혼은 긴 금발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혼은 공작 부인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빼닮았다.
곁에는 공작 부부가 같이 자리했다. 보송보송한 털옷을 겹쳐 입은 캐서린이 타혼에게 팔을 뻗었다.
“엄마한테 올까?”
“아니에요. 타혼은 강해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타혼은 제 누나 옆구리에 붙어서 발을 디뎠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타혼은 호기심이 많았다.
“꽁꽁 얼었어요.”
빙판에 쪼그려 앉은 타혼이 제 발아래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누나 손을 단단히 잡아.”
“엄마! 타혼이랑 저기까지 걸어가 봐도 돼요?”
“다녀와.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타혼과 아혼이 두 손을 맞잡고 걸었다. 털모자를 쓴 아이들의 머리가 시선을 끌었다.
작디작던 아이들이 스스로 걷고 뛴다는 게 오묘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작았지만, 많이도 컸다.
‘나중에는 얼마나 더 클까.’
엉덩방아를 찧은 타혼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누나를 올려다봤다. 아니구나. 아직 다 자라려면 먼 것도 같고.
아혼이 울먹이는 동생을 다독여 주며 이야기했다.
“엄마. 저 너머로 설인이라고 무서운 귀신이 살았다는데, 엄마도 알아요? 길 잃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대요. 아이가 설산에서 길을 잃고 떠돌면, 설인이 내려와서 한입에 꿀꺽 삼킨대요.”
“동화책을 읽었니?”
“네. 하녀장에게 물으니까 진짜로 살았대요.”
“동화책에서는 설인을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설산을 지배하는 반신이랬어요.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고, 그 위에서 군림한댔어요. 영생을 살고 홀로 설산에서 지낸대요.”
캐서린은 아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혼이 목을 쏙 숨기고 배시시 웃었다. 타혼이 오리처럼 오도도 달려와 본인도 쓰다듬어 달라며 목을 내밀었다.
“나도. 나도.”
캐서린은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런데요. 처음에는 설인이 무서웠는데요. 조금은 안타까웠어요.”
“어째서?”
“영생을 살면서 설산에서 혼자 지낸다니 외로울 거 같아요. 친구도 하나 없이 고독했을 거예요.”
캐서린은 아이를 쓰다듬던 팔을 약하게 떨었다. 아이는 그 미세한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로렌디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예전에 비슷한 이를 본 것도 같구나.”
“헉!”
“설산을 지배하고 영생을 살던 이를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알던 그는 다른 이야.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지도, 어린아이를 잡아먹지도 않았어. 그는 길 잃은 영혼을 땅으로 안내하던 길잡이였지. 흰 백발에 검은 옷을 입었는데……. 그래. 그도 외로웠던 것 같구나.”
캐서린은 턱을 쓸었다.
“다만, 그는 친우가 있었어.”
“그럼 동화가 잘못됐어요?”
캐서린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아마도, 설인은 마냥 외롭지만은 않았을 거예요.”
* * *
아혼은 짧은 다리를 동동 흔들며, 따뜻한 귤차를 타 먹었다. 달달한 꿀 때문인지 먹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가 잠들었구나.”
호수에 다녀오고 피곤했나? 캐서린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까무룩 잠들었다.
아혼은 그런 엄마 곁에서 귤차를 먹고, 타혼은 아빠 무릎에 팔을 얹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빠.”
“응.”
“아빠는 타혼이 좋지요?”
로렌디스는 신문을 읽다 말고 고개를 내렸다.
“물론이지.”
“타혼을 사랑하죠?”
“그럼.”
“타혼이 없으면 안 되죠?”
아혼도 로렌디스를 바라봤다.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타혼이 좋아요? 브레디가 좋아요?”
브레디는 그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아빠는 타혼이 좋아.”
“그렇죠? 누나, 아빠는 타혼이 좋대.”
작은 머리통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배시시 웃던 아이는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아혼은 귤차를 내려놓고 제 아빠 앞으로 왔다. 그러더니 타혼과 똑같이 묻고, 타혼 곁에서 작게 속삭였다.
“브레디는 저편으로 밀렸어.”
이번에는 아혼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아빠는 브레디와 아혼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할 거예요?”
“아혼을 구해야지.”
“그럼, 엄마랑 아혼이 물에 빠지면……. 안 돼. 엄마는 물에 빠지면 안 돼요.”
타혼이 제 누나 곁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떨궜다.
“엄마 물에 빠지면 안 돼.”
“캐서린은 물을 안 좋아해. 그래서 물에 빠질 일도 없겠지만.”
아이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로렌디스가 신문을 내려놓고 이야기했다.
“너희에겐 수영을 가르쳐 줄게.”
“네?”
“아빠는 엄마를 구해 줘야 해.”
아이들은 납득했다. 맞다. 아빠는 엄마를 구해 줘야 된다.
이후, 캐서린이 잠에서 깼다. 눈을 끔뻑거리던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눈매가 곱게 접혔다.
“왜들 그런 눈으로 볼까.”
캐서린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흘끔거리는데, 로렌디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들이랑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브레디와 아이들 중 누가 더 좋으냐고.”
“겨울 가장 깊숙한 시기에 닿았다고 집무실에서 바빠 보이던데, 아이들이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에요.”
“그걸 마음에 담아 두었을 줄은 몰랐군.”
지난 며칠간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보좌진 회의에 영지 시찰로 자리를 자주 비웠다.
“오늘은 잘 때 곁에 계셔야 해요.”
타혼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로렌디스는 알겠다고 답해 주었다.
* * *
긴-기-야
침대에 어린아이 둘이 누워 있었다. 낮에 열심히 놀았다고 곧장 잠든 아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뒤엉켰다.
“우애가 좋네요.”
“아이들이랑 진짜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요?”
로렌디스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며 이야기했다.
“너와 같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할지 물어서.”
“아이들을 구한다고 대답했어요?”
“수영을 알려 줄 테니 빠질 일 없도록 하라 이야기했어. 나는 엄마를 구해 주어야 한다고.”
엉뚱한 물음이었다. 앳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는데, 질문을 한 아이들도 저들끼리 울어 버렸다.
“세심한 아이들이에요. 속이 여려도 너무 여려요.”
아혼은 특히나 세심한 아이였다. 설원의 설인 이야기가 나온 이유도 그래서였다.
헬렌 중앙광장에 놓인 뎐트 칸의 조각상.
중앙광장을 찾을 때면 부모가 걸음을 멈추고 조각상을 쓰다듬던 모습을 자주 봤기에, 아혼도 궁금할 때가 있었을 거다.
‘저 조각상은 누구예요?’
‘이 땅에 있던 마지막 설인이야.’
‘왜 저기 혼자 서 있어요?’
‘혼자는 아니겠지. 아혼이 곁을 지키고 있잖아.’
캐서린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이 아이에게도 언젠가 그날 일을 들려줄 때가 올까요.”
“언젠가 나이가 든다면…….”
“그래요. 나이가 들면 이야기해 줄 때가 오겠죠.”
캐서린은 곁에서 아이들 배를 토닥였다.
타혼은 아랫배가 통통해서 토닥일 때면 기분이 덩달아 편안해졌다. 고롱고롱대는 숨이 규칙적이었다.
캐서린은 옆으로 누워 아이들의 배를 간질였다. 타혼이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아랫배를 긁었다.
“어리광이 많이도 늘었어요.”
본래는 부모와 방을 나눠서 홀로 자는 법을 배울 나이였지만, 오늘도 같이 잠을 청했다.
아론이 뺨을 베개에 부볐다. 그의 머리칼이 베개에 흩어졌다. 베개에 뽀얀 뺨을 비비는데, 꿈속에서 맛있는 걸 먹는지 입을 오물댔다.
“사랑스럽죠.”
“응.”
“왜 나를 보면서 이야기해요.”
캐서린이 약하게 미소 짓는데, 그가 아이들의 머리를 팔로 감싸고, 캐서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내게는 네가 가장 사랑스러워.”
“아이들 잠에서 깨요.”
“갓난아기 때는 침대에 내려놓기만 해도 깼는데, 지금은 업어가도 몰라. 누구를 닮았는지 잠귀가 어두워.”
로렌디스가 팔을 내려 아혼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잠든 것 같다.
따뜻한 난롯불 덕분에 중간에 깨지 않고 잘 잤다.
새벽녘부터는 눈이 계속 내렸다. 함박눈은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도록 후원에 한가득 쌓였다.
아이들은 아침 무렵 자기들끼리 심심하다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젠 눈이 질릴 법도 한데, 아이들도 아직은 어려서인지 눈 속에서 뛰어놀 때마다 설레어했다.
“도련님! 아가씨! 뛰면 안 돼요! 어디를 뛰어가세요!”
“아이고! 누가 무릎 보호대를 챙겨나가라! 털장갑을 가져와!”
하인들은 비명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