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3)
긴 꿈을 꾼 것 같다. 몸이 깃털처럼 붕 뜨고, 몽글몽글한 솜털에 파묻힌 기분이었다. 캐서린은 언제나 이런 고요함을 사랑했다.
옆으로 누워 눈을 깜빡거리던 캐서린은 눈을 다시 감았다. 나른한 숨이 퍼졌다.
‘조금만 더.’
긴 금발이 이불 위로 흩어졌다. 베개에 뺨을 묻고 선잠이 들던 무렵이었다.
고요하다. 너무나 고요한 이 공기가 문득 낯설었다.
“아가…….”
캐서린은 침대 곁을 더듬거렸다.
없다. 긴 금발을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침실이 비었다.
아기 침대도 비었다. 캐서린은 고개를 젖혔다. 긴 금발이 부스스하게 풀려 등 뒤로 흘러내렸다.
‘어디 나갔나?’
혼자 잠드는 걸 유난히 싫어하는 딸아이는 혼자 남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부모 곁에서는 작은 사슴처럼 눈을 깜빡거려도, 혼자 남으면 그대로 울어 젖혔다.
새벽 무렵에도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서 같이 잠들었던 것 같은데…….
“아가?”
빈 침실에는 캐서린 혼자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젖힌 그녀는 물끄러미 앉아서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었다. 긴 머리를 헝클이는데 새벽녘의 공기가 평화로웠다.
“아혼, 어딨니?”
캐서린은 작게 속삭이며 아혼을 불렀다. 그녀는 홀린 듯 숄을 덮어쓰고 나왔다.
* * *
복도는 고요했다. 촛불만 드문드문 일렁였다. 새벽녘이라고 하인들도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각이었다.
숄을 단단히 여민 캐서린은 복도를 지났다. 아무도 없다. 이 이질적인 고요함에 무언의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랐다.
“아혼.”
캐서린은 작은 목소리로 아혼을 불렀다.
복도 저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틈 아래로 아른거리는 불빛을 따라 캐서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삐거덕.
문이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캐서린은 멀거니 서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로렌디스가 품에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쌕쌕대며 고른 숨을 내쉬었다. 그 고른 숨은, 아이가 편안하다는 증거였다.
아이는 아빠가 제 곁을 느낀 듯 손을 꼬물대며 뻗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는데 그 모습이 앳됐다.
“너를 많이 닮았어.”
로렌디스가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눈이랑 코는 당신을 닮았어요.”
“그런가?”
“당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어릴 적 당신을 닮았다고요.”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양가 아버지들께서는 각자 자식들을 닮은 부분을 찾아냈다. 그래도, 환한 금발을 타고나서인지 캐서린을 많이 닮았다.
“너를 닮아서 요즘 부쩍 느껴.”
“어떤 부분을요?”
“나는 이 아이 곁에서 늘 약해질 거야.”
로렌디스는 아이를 끌어안고 캐서린에게 물었다.
“왜 안 자고 나왔어?”
“곁이 비어 있어서요.”
“아, 아이가 울어서 데리고 나왔어. 찾았나?”
“당신이랑 같이 있을 거 같아서 찾아본 건데, 여기 있었네요.”
아이는 제 아빠의 팔뚝에 기대 잠들었다.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더 자 둬.”
“아니에요. 푹 잤어요.”
며칠 만에 몸이 가벼운 게 좋았다. 캐서린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팔을 뻗었다.
“내가 안을까요?”
“아니야.”
“안 무거워요?”
“이 작은 아이가 무겁다면, 내가 검을 들고 설산을 올라 살아남기는 더욱 힘들었겠지.”
긴 야만족과의 싸움을 끝낸 그였다. 나약한 성정이었다면, 오랜 기간 살아남아서 이 전쟁을 종식하기도 어려웠겠다.
헬렌은 강인한 영지다. 영지민들도 스스로 제 나라의 안위를 지켜 낼 만큼, 사람들 하나하나가 단단한 성벽과도 같다.
“이 아이에게도 검을 가르칠 건가요?”
“……검을 쥘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 아이가 작은 건 아주 한순간일 거예요.”
이 시기는 금방 지난다.
“언젠가 추억하게 될 만큼 순식간에 지나갈 테니 눈에 가득 담아 놓아요.”
“그래도 검은 안 돼.”
“당신은 의외의 부분에서 깐깐하네요.”
나중에 네가 결혼한다고 남편감이라도 데려온다면, 네 아빠는 큰 상실감에 빠질지도 모르겠어. 아주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그렇게 혼자 즐겁게 중얼거렸다.
“아가.”
캐서린은 아이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네가 얼른 자라야겠어.”
이후, 두 부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도란도란 대화를 하는 소리에도, 아이는 깊게 잠들어서 제 아빠 품에서 꿈쩍도 않았다.
두 눈을 꼭 감고 잠든 아이는 캐서린에게 미약한 행복감을 불러다 주었다.
* * *
캐서린은 꾸벅꾸벅 졸다 고개를 들었다.
“…….”
몸을 옆으로 트는데, 로렌디스가 먼저 깨어 있었다.
“뭐 해요.”
“그냥.”
로렌디스는 그렇게만 답하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침대 주변으로는 캐노피를 쳐 둬서, 아늑한 온기에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곁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단단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얼마 안 됐어.”
“깨우지.”
“노곤하게 자는데 죄책감이 들어서.”
캐서린은 긴 금발을 쓸어내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기지개를 켜자 어깨가 찌릿찌릿했다. 고개를 젖히며 작게 앓는데, 그가 어깨를 손으로 눌렀다.
“아픈가?”
“그러게요. 허리랑 어깨가 좀 뻐근하네요.”
“돌아누워 봐. 근육이 뭉쳐서 그런 거면, 풀어 주면 괜찮아.”
로렌디스는 캐서린을 돌아눕히고 어깻죽지부터 살살 눌렀다. 예전에도 아이를 낳고 피곤해하면, 로렌디스가 마사지 크림을 가져와서 발라 주었는데…….
그때가 떠올라 캐서린은 더 편하게 그에게 몸을 맡겼다.
“으음.”
“아파?”
“아니요.”
목덜미부터 뭉친 근육을 하나하나 풀어 주는데, 나른한 한숨이 터졌다.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어깨가 많이 뭉칠 때면 두통이 심해질 때도 있었는데, 근육을 풀어 주자 피가 빠르게 도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개운한 것도 같고.
머리가 좀 더 맑아지는 기분에 잠에서 깨자마자 대화할 여유도 생겼다.
“내가 잠들면 곁에서 뭐 해요?”
로렌디스가 척추를 따라서 손을 내렸다.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내가 깼을 때 곁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날이 잦았잖아요.”
“기분 탓이겠지.”
“무언가 대화를 피하는 거 같은데, 이야기해 주기 힘든 일인가요?”
조금 예상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가 척추를 손으로 쓸었다.
“손이 굳은살이 많네요.”
“딱딱한가?”
“아니요. 나는 그런 손이 좋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는 거 같거든요.”
검을 쥔 손아귀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그런 꺼끌꺼끌함이 한 번도 꺼렸던 적은 없다. 굳은살은 그가 이 세월을 얼마나 험하게 보냈는지에 대한 흔적이었다.
“숨을 쉬는지 한 번씩 확인하게 돼.”
“……아직도 불안해요?”
“내가 너를 볼 때면 불안감을 자주 느껴.”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감내해야 해. 그는 캐서린의 등에 입을 맞추었다. 차갑고도 뜨거운 감촉이었다.
“좀 괜찮나?”
몽글몽글하게 풀린 근육 때문인지 개운해졌다. 몸도 가벼워진 거 같고. 어깨를 부드럽게 돌려주는데, 로렌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프면 이야기해.”
“아프지 않아요.”
“내가 너에게는 모든 게 민감해서 그러잖아.”
캐서린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은은히 웃으며 이야기했다.
“……숨을 쉬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된 거죠.”
“너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어.”
로렌디스는 그녀를 눈짓으로 흘기며 얕게 입술을 맞췄다. 캐서린은 고개를 수그려 그의 입맞춤에 호응했다.
“뎐트는 헬렌의 안녕을 바랐어요. 그런 뎐트가 준 선물인데, 당신도 이만 편안해져도 돼요.”
그때, 아이가 아기 침대에서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더니, 제 부모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앳된 뺨이 발그레했다. 아이는 동그르르 눈동자를 굴리더니 방싯방싯 미소 지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것 같다.
“괜찮대요.”
겨울의 아이가 괜찮댔으니 괜찮지 않겠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저를 닮은 아이가 물끄러미 앉아 있는데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닮아서가 아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래요. 저 아이 내면에 우리가 비친다는 뜻이겠죠.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는지 아이는 다 알 거예요.”
아혼은 눈매를 곱게 접었다. 작은 두 손을 흔드는데 어쩐지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약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될 거 같아요. 이 아이가 단단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
“나중에 아이가 자란다면 밖에서 같이 눈을 밟고,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고, 이것저것 해 보고 싶어요. 같이 해 보고 싶은 게 점점 더 많아져서 큰일이네요.”
실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 아이가 당신을 닮아서 부디 활기찼으면 좋겠어요.”
깨어난 아이를 향해 팔을 뻗으며, 캐서린은 진심을 담아 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