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2)
“아이가 배 속에서 꼬물거려요.”
캐서린이 태동을 느낀 건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당신도 손을 가져와 봐요.”
“여기 말인가?”
“네. 어때요?”
“아직은 잘 모르겠는…….”
로렌디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조금 당황한 것도 같고. 그가 팔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왜요?”
“……만져도 될지 모르겠어서.”
로렌디스는 아직도 조심스러웠다. 캐서린은 그런 그를 향해 살짝 웃으며 그의 손을 가져다 아랫배에 올려놓고 손을 겹쳤다. 그의 손등을 감싸 쥐듯 살포시 얹는데, 아이가 또 움직였다.
“이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은 지었어요?”
“아혼, 아혼 헬렌으로 하자.”
“음…… 뜻이 있나요?”
“고대어로 겨울의 아이라는 뜻이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그래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름이에요.
헬렌의 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겨울이 품은 아이. 헬렌의 상징과도 같다.
“딸아이랬던가?”
“네. 딸아이래요.”
꽃초롱초라는 풀이 있는데, 산모에게서 태아의 성별을 미리 확인해 주는 약초였다.
이 약초에 산모의 혈액을 묻혔을 때 약초에서 흰빛을 띠면 딸아이고, 푸른 빛을 띠면 아들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흰빛을 띠었다.
“아이도 건강하대요.”
“지금 네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군.”
공작 부인이 임신한 소식은 공작성 밖으로도 전해졌다. 그로 인해 휴가를 내고 순행길에 올랐던 제임스가 귀환하는 소동이 있었는데…….
‘아이는 건강합니까? 아니지요, 스승님께 물을 게 아니라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제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거죠.’
이후 캐서린은 두 주치의에게 검진을 받았고, 아이도 건강하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안정기라는 이야기에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졌다.
“그들은 특이해요.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슬퍼하고.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면 오묘해져요.”
“네 곁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그랬던가…….”
“먹고 싶은 건 없어?”
“잘 모르겠어요. 원래 식탐이랄 게 그만큼 없거든요.”
캐서린은 임신 뒤에도 식사량을 웬만큼 유지 중이었는데, 아이 때문에 일부러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쪽이었다.
“아……. 그래도 하나만 꼽자면, 치즈를 듬뿍 올린 또띠아요. 토마토소스를 발라서 거기에 피클이랑 올려 준 음식이었는데 맛있었어요.”
“뭔 줄은 알겠는데 소박하군.”
“짭조름해서 기억에 남았어요.”
“하나 먹고 내게 줬었잖아.”
“음……. 갑자기 떠올라서요. 굳이 먹겠다는 건 아니고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옆으로 누워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데, 깊게 숨을 들이쉬던 그가 살갗을 약하게 깨물었다.
“음?”
캐서린은 그를 따라서 옆으로 누웠다. 그의 팔이 아랫배에 닿았다. 다독이듯 어루만지는 손길이 보드라웠다.
* * *
주방장은 경건한 마음으로 또띠아를 꺼냈다.
또띠아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피클과 피망을 잘라 올려 치즈를 듬뿍 올려 오븐에 구웠다.
“이건 남기지 않으셔야 하는데…….”
마님이 이번만큼은 맛있게 식사하시길 바라며, 오븐에서 꺼낸 또띠아를 쟁반에 올렸다.
마님께 올라가는 음식에는 이것저것 함부로 섞으면 안 된다. 주방장은 요청된 또띠아와 곁들일 몇 가지 과일만 챙겨 트레이를 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마님, 주방장이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캐서린은 예산안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간 미뤄 놓았던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음식만 놓고 나가 보라고 했을 텐데,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서인지 입안에 침이 고였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던 캐서린은 안경도 마저 벗어 놓고 건너편 테이블로 건너갔다. 그리고 또띠아를 한입 크기로 잘라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 입안에 든 또띠아를 모두 삼키고, 캐서린은 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음에도 종종 부탁할게.”
“맛, 맛있습니까?”
“고소해. 종종 생각날 거 같아.”
주방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 주방장! 마님께서 명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오븐에 불을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주방장은 감격하며 떠났다.
“……기뻐하는 건가?”
“물론이지요. 그간 마님께서 뭔가를 맛있다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잖습니까? 만약 있었어도 무척 드물잖습니까?”
하녀장의 대답에 캐서린은 남은 또띠아에 손을 가져갔다. 또띠아를 한입 물자 치즈가 늘어났다. 토마토의 상큼한 맛에 작게 웃었다. 치즈 아래에 숨은 피망도 토마토소스와 잘 어울렸다. 치즈를 듬뿍 덮어서인지 고소한 향이 입안에 뭉툭하게 감돌았다.
“입맛에 맞나?”
때마침 로렌디스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는데, 집무실에서 오는 길인지 몸인지 보좌관과 함께였다.
“입에 묻었어.”
손수건으로 닦아 주던 그는 턱을 가볍게 쥐더니, 턱에 자잘하게 입맞춤을 이어 갔다. 캐서린은 고개를 젖히고 작게 웃었다.
“당신한테도 묻어요.”
“다 됐어. 그러고 보니 당신, 입맛이 변하긴 했어.”
“음. 그런가요?”
“뭐든 네가 좋아하면 됐어.”
이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캐서린은 침대에 기대 책을 읽거나, 그의 서류를 흘끔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밤이면 불을 꺼 놓고, 침대 한쪽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캐서린은 그런 고요함이 좋았다.
* * *
“안녕.”
캐서린은 딸아이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이가 손아귀에 제 뺨을 비볐다. 곱슬대는 금발에 고동색 눈동자를 지닌 아이였다.
‘아혼.’
이 아이는 이름 그대로 겨울의 아이였다. 아이는 겨울 어느 한적한 날에 태어났고, 그날 설산에서는 흰 눈이 내렸다.
“너는 눈을 닮았어. 흰 눈꽃을 그대로 떨군 것 같거든.”
이곳에 뚝 떨어진 눈송이 같다.
“아가.”
캐서린은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이는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았다.
캐서린도 아이를 따라 금방 노곤해졌다. 아이의 등을 쓸어 주는데 쌕쌕대는 숨이 평화로워 몸도 나른해졌다.
아이는 꼬물대며 캐서린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아이 특유의 몽글몽글한 체온이 좋았다.
아이가 잠들면 나도 눈 좀 붙여야지.
“으아앙!”
하지만 침대에 내려놓자 울어버리는 아이는 혼자 있기가 무서운 것 같다.
엄밀히는 부모 품을 제외하고는 잠들기를 거부하는 거였지만.
“제가 재우겠습니다. 마님, 며칠째 잠을 곤히 못 주무시는 거 같습니다.”
“내가 재우는 게 마음은 편해.”
“그래도요. 피곤해 보이십니다. 아기님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하녀장이 걱정스럽게 캐서린을 살폈다.
“오늘은 내가 끌어안고 있고 싶어.”
캐서린의 고집에 하녀장이 조용히 물러났다.
캐서린은 아혼을 고쳐 안고 창턱에 앉았다. 허리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바깥은 희게 뒤덮였다.
“엄마는 말이다. 처음 이곳을 밟았을 때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땅을 밟았단다. 내 숨이 언젠가 끊긴다면 그게 여기가 될 거라고 여겼거든.”
죽음 앞으로 끌려온 기분이었다. 이런 삶이라면 그냥 끊겨도 좋다고 여겼다. 어차피 죽을 삶이라면 단 1년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고 싶다고.
“그런데, 다른 이들이 내 발목을 붙들어 땅 위에 잡아두었어. 내가 있을 곳이 여기라고, 그들이 말해 주는 것 같았지.”
캐서린은 두 눈을 감았다.
“조금은 무섭고 낯설었던가? 나는 말이야, 내 삶에 큰 미련이란 게 없던 사람이야. 내가 죽는다면 그걸로 끝이라고 여겼어.”
두 번의 죽음을 겪었다. 계모의 손에 죽었고, 야만족과의 싸움에서 한 번 더 죽었다. 이 삶을 다시 이어서 붙여 놓았으니…….
“엄마도 앞으로는 열심히 살아야겠어.”
다른 이들은 얻지 못할 기회를 두 번이나 얻었다.
“아이 곁에서 고해성사 중인가?”
“왔어요?”
“너의 엄마가 아빠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나중에 다 자라서 들어 다오. 내가 해 줄 이야기가 아주 많단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로렌디스는 담요를 꺼내 아이를 감쌌다. 가뿐하게 팔뚝에 아이를 앉힌 그는 캐서린에게 오라는 듯 팔을 뻗었다.
캐서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벼운 튜닉 차림인 그가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제 아빠 옷자락을 붙들었다.
캐서린은 그에게 팔을 뻗었다.
“이리로 와.”
로렌디스는 손등을 가져가서 입술을 맞추었다. 따끈따끈한 체온에 손등이 화끈거렸다.
조금도 달라진 건 없다. 이 아이가 주는 안정감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늘 한결같았다. 로렌디스는 변함없이 곁에 서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내가 좋아요?”
“응.”
“아…….”
“당연히 이야기를 물었어.”
캐서린이 눈매를 곱게 접으며 미소 짓는데, 그가 고개를 수그려 입술을 맞추었다. 턱에도 입을 맞추고, 목덜미에도 고개를 파묻었다.
“너는 나를 미치게 만들어.”
아이가 잠이 온다는 듯 칭얼거렸다.
그는 아이를 다독이며 이만 자러 들어가자며 팔을 뻗었다.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