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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125화 (125/129)

외전2(1)

캐서린은 어쩐지 얹힌 것 같은 가슴을 통통, 하고 두들겼다.

“축하드립니다, 마님.”

데니스가 진료지를 내려놓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다 이내 눈물을 떨궜다. 이 헬렌가에 새로운 생명이 찾아들었다니. 캐서린이 오늘내일 할 때부터 쭉 지켜 왔던 주치의로서는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마님께서 요즘 속이 자주 얹힌다고 말씀하셨었잖습니까?”

“아이라고……?”

“기쁘시지요?”

“아아, 어쩐지. 조금 몸이 이상하더라니 그랬었구나.”

하녀장은 기쁨인지 다행인지 모를 감정으로 두 손을 덜덜 떨었다.

“며칠간 속이 답답하다고 마주 말씀하셨습니다. 주먹으로 가슴을 꾹꾹 눌러서 왜 그러시냐고 물으면, 속이 답답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했잖습니까? 축하드립니다. 헬렌에 오랜만에 큰 경사가 찾아들었군요.”

마땅히 기뻐할 이야기였다. 캐서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다. 아이 소식은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마. 내가 나중에 직접 이야기할 테니 데니스와 하녀장은 함구해 둬.”

캐서린은 맑게 미소 지었다. 하녀장은 마님께서 직접 각하께 말씀드리려고 그러냐며, 캐서린을 따스한 시선으로 살폈다.

‘마냥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캐서린은 데니스 교수의 관찰 아래, 바깥에 홀로 앉았다.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던 그녀는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예정보다 일찍 찾아왔구나, 아가.”

아이는 조금 더 나중에 갖기로 예정했었는데, 뜻밖의 선물을 예기치 못한 날에 받았다.

“걱정이 많으십니까?”

“아, 데니스 교수……. 걱정하는 건 아니에요.”

“몸은 온전히 회복됐습니다. 마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 이 이야기는 각하께 해 드려야겠군요.”

“그 사람이 걱정이 많겠어요.”

“죽다 살아난 마님을 곁에서 직접 지켜본 분입니다. 그래도, 기쁜 일이니 같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로렌디스와는 몸이 회복된다면, 이후에 아이를 논의해 보자던 참이었다.

“아이가 어디 아픈 곳은 없겠죠?”

“그 부분까지 확인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릅니다. 이후에 다시 확인해 봐야겠지만, 지난 일 때문이라면 그 또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데니스는 껄껄대며 웃어 주었다. 산모가 긴장한다면 이 아이도 긴장할 테다. 안정을 편히 취한다면 그걸로 된다.

‘나와 로렌디스의 아이…….’

부모가 된다니 실감 나지 않는다.

그렇게 잠깐 또 상념에 빠졌던 것 같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흩트리고 지나가자 데니스가 뒤에서 권했다.

“마님, 날이 차갑습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캐서린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조금만 있다 들어갈게.”

캐서린은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아직은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싹을 텄다. 얼마나 연약할까. 촛불이 바람 앞에서 일렁이는 듯, 이 아이도 바람 앞의 불씨 같았다.

아름답지만 지켜 주고 싶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지만 준비해 볼게.”

캐서린은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듯 조곤조곤 속삭였다.

* * *

로렌디스가 안경을 벗어 놓으며 이야기했다.

“안색이 안 좋아.”

“음. 그랬던가요?”

“며칠 속이 안 좋다고 이야기하더니 그래서 그런가?”

“식사는 잘 하고 있어요. 평소에도 하녀장이 잘 살피는 것 알잖아요.”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을 펼쳐 든 그는 턱을 괴고 읽어 내려갔다.

“데니스에게 다녀왔다던데 별말 없었나?”

“아……. 이야기 듣지 못하셨나요?”

“네게 이야기 들으라고 해서. 무슨 일 있었어?”

로렌디스는 그렇게 답하며 캐서린을 유심히 살폈다.

“낯빛이 조금만 무리해도 창백해지는데……. 제임스 박사가 잘 살피라고 떠난 이유를 알겠군.”

“당신은 과해요.”

“과하지 않아.”

캐서린은 하녀장이 가져다 둔 청포도를 입에 넣어 굴렸다. 상큼하게 단맛이 오른 게 먹음직스러웠다. 침실 협탁에 양초를 켜던 캐서린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당신은 아이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아요?”

“어떨 것 같냐니?”

“당신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서요.”

“나는 내가 아닌 네가 걱정되어서야.”

신문을 읽다 말고 그녀와 눈을 맞춰 대화하던 로렌디스는, 다시 신문 페이지를 넘겼다. 그에게서는 마른 잉크 냄새가 풍겼다. 그가 집무실에 다녀오면 꼭 잉크향을 몸에 묻히고 돌아오는데, 캐서린은 이런 느낌이 좋았다. 그는 이런 모습이 잘 어울렸다.

“나는 아직 너와 둘이서 하고 싶은 게 많아. 해 보지 못한 것들도 많고, 네 곁에서 보고 싶은 것도 많아. 아이를 키우는 건 분명히 내게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나는 네 곁에서 잠시라도 둘만 있고 싶은데 어렵겠나?”

“음…….”

“어디 불편한가?”

로렌디스가 캐서린을 그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눈높이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가 캐서린의 옆구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데니스 교수 이야기하다가 이쪽으로 흘러들어온 부분도 그렇고.”

캐서린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목을 숙였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숲을 깊게 들이쉬는데, 두터운 손이 등을 다독였다.

“내게 해 줄 이야기가 있구나.”

“으음. 아이를 가진 거 같아요. 오늘 데니스에게 이야기를 듣고 온 길인데…….”

로렌디스가 고개를 홱 들었다.

“당신 아빠 됐다고요.”

“다시 이야기 좀 해 줘.”

“아이가 생겼어요. 우리에게요.”

캐서린은 그의 목덜미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그의 체취를 깊게 들이쉬는데, 두꺼운 팔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로렌디스가 느린 손길로 등을 다독였다. 힘주어 꽉 끌어안는 팔이 단단했다.

“숨 막혀요, 당신.”

“내일 다시 다녀오자.”

“음……. 당신 괜찮아요?”

“왜 내 걱정을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괜찮아. 아, 네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잖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른한 긴장감이 맥없이 풀렸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일 있어요?”

“딱히.”

“내게 일이 있긴 무슨 일이 있겠어요.”

“데니스 교수가 내게 뭔가를 숨기는데……. 너는 이전에도 내게 병을 숨긴 전적이 있었잖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었지.”

진료원에서 이야기를 않으니 병을 숨긴다고 여긴 모양이다.

“불편한 곳은?”

“없어요.”

“아픈 곳은?”

“그것도 없어요.”

“아, 이 부분은 진료원에서 확인했겠군.”

캐서린은 약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은 약간 실감이 안 나요. 나는 준비성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래도, 이 아이를 살피는 데 내가 부족한 사람은 아니리라 믿겠어요.”

날이 점점 어둑해져 온다. 캐서린은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얼떨떨하다. 그래도, 이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 * *

진료원 문이 열렸다. 흰 가운을 입은 데니스는 진료지를 내려놓으며 주인 부부를 반겼다.

“같이 왔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데니스가 은근히 웃으며 다가왔다.

“덕분에 이 사람이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다른 검사는 필요 없나?”

“네. 무작정 안정 취할 것도 없으시고 평소대로 지내면 됩니다. 산책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요. 아, 그래도 장거리 여행은 안 됩니다. 그건 마님께 무리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데니스는 그 밖에도 조심해야 할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었다.

“안정을 취한다고 너무 방에만 있는 건 오히려 안 좋습니다. 마님께서는 안정 중이시라고, 넓은 들판에서 누워 잠만 잘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이젠 농담도 하시네요.”

“이 데니스도 그만한 여유가 생겼습니다.”

헬렌은 가장 추웠던 겨울을 지나 보내는 중이었다. 가장 추웠던 시기를 지나 보내자, 눈도 모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흙내음이 풍겨오는 걸 보면, 봄이 눈앞에 닿기까지 금방일 것 같다.

“좀 걷고 싶어요.”

“그럼 그래.”

“보좌진이 찾는 거 같던데 괜찮아요?”

“겨울도 거의 다 끝났으니, 바쁜 시기는 지났다고 봐야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겨울 끝자락에 다다랐다.

눈이 지겹던 시절도 있는데 어째서일까. 지금 이 시기가 지겹지만은 않다. 많은 일을 겪어서인가? 아니면 이 겨울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어서인가?

그 자체로 묵직한 여운을 불러왔다.

“그래도 여전히 춥네요.”

“아니면, 제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좀 머물겠어?”

“아니에요. 나는 이곳이 좋아요.”

그저 춥기만 한 곳은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삶을 버렸던 캐서린에게 다시 삶을 쥐여 준 이들이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내가 어디 있겠어.’

캐서린은 아랫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너도 이 영지가 좋아질 거야.

진료원 길을 따라 캐서린은 로렌디스와 함께 계속 걸었다.

춥지만 춥지 않은 곳.

‘너도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야.’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이곳을 너도 사랑해 주기를.

내가 너무나 아끼는 사람들을 너 또한 좋아해 주기를.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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