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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124화 (124/129)

외전5

캐서린은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떠밀리듯 온천물에 몸을 담갔는데, 무언가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오묘한 감각이 몸을 덮쳤다.

캐서린이 뺨에 튄 물방울을 닦아 내는데, 로렌디스가 그녀를 끌어안아서 더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오늘이라도 마음 내려놓고 쉬자.”

캐서린은 움찔했던 몸을 내려놓았다.

‘내가 초조했던가?’

딱히 초조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요즘은 한가해져서 나름의 여유도 즐겼다. 그런데 북부를 이렇게 비운 적이 잘 없어서일까?

‘그게 마음에 걸렸나?’

결혼한 뒤로는 거의 북부에서만 지냈다. 거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처음에는 곧 죽는다는 회의감 때문에 그랬고, 그렇다고 큰 책임감이랄 것도 없었다. 캐서린에게 북부는 곧 떠날 곳이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네?”

“다른 생각 중이잖아.”

“뭘 굳이 여기까지 와서 쉬어야 됐나? 라는 생각 중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보지도 않아 놓고 뭘 어떻게 아는……?”

로렌디스에게 등을 지고 있어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캐서린이 뒤늦게 몸을 돌리려는데, 허리에 감긴 손이 단단하게 몸을 끌어당겼다. 맞닿은 몸이 딱딱했다. 아래에서는 그의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로렌디스.”

로렌디스가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얕게 내쉰 한숨이 살갗에 닿고 흩어졌다. 캐서린은 뻣뻣하게 굳었던 몸을 노곤하게 풀어 주었다.

“등만 봐도 보여.”

“뭐가요?”

“다른 생각 중인 것 말이야. 예전에 그랬잖아. 네가 무슨 생각 중인지 머릿속을 뜯어보고 싶을 지경이라고.”

그냥 그런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어조는 덤덤하기 짝이 없다. 기억 저편에 접어 뒀던 추억을 꺼내서 곱씹듯 약간 그리워하는 것도 같았다. 캐서린은 그의 팔을 내려다보다 그의 가슴에 몸을 더 깊게 묻었다.

“요즘도 그래요?”

“뭐가?”

“내 머릿속 뜯어보고 싶고 그런가 해서요.”

로렌디스도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글쎄.”

짤막하게 말끝을 흐린 그는 허리에 감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읏!”

캐서린은 등줄기에 닿는 촉감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로렌디스가 척추를 따라서 입술을 내렸다. 뜨뜻미지근한 숨이 살갗을 긁었다.

캐서린은 로렌디스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유리 온천 내부가 비춰서일까?

“잠, 잠시만요, 로렌디스!”

밖에서는 단순한 돔 형식의 온천인데, 천장이 투명한 유리막으로 되어 있었다. 캐서린은 흐릿하게 비치는 잔상에 넋을 놓았다.

붉게 상기된 뺨과 입술이 온갖 시선을 빼앗았다. 가느다란 여체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달빛이 스민 유리천장이 오묘했다.

캐서린은 탄식을 터트리듯 입술을 벌렸다.

“아아…….”

이색적인 자극이었다.

로렌디스가 흘러내린 머릿결을 가다듬어서 옆으로 넘겨 주었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체향을 가득 묻혀 둔 살갗을 머금었다.

캐서린은 목을 젖히며 울먹였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온 신음이 아지랑이처럼 가늘게 퍼졌다.

“여기 이상해요.”

“그랬나?”

물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렸다. 캐서린은 몸을 돌려 로렌디스와 눈을 맞췄다. 그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넓은 어깨를 손으로 짚고 허리를 세우자, 로렌디스가 한쪽 팔로 허리를 감싸서 몸을 맞췄다.

캐서린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등을 다독이는 손짓을 느끼며 고개를 다시 젖혔다. 천장에 비친 모습이 신비로웠다.

조각조각 이어붙인 유리가 아름답게 천장을 수놓았다. 캐서린이 고개를 돌려 다시 로렌디스와 눈을 맞추는데, 그가 가녀린 목덜미를 받쳐 안았다.

입술을 포갰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으읏! 약간 몽글거리는 게 달짝지근한 생크림 같았다.

“하아-”

아랫입술을 빨며 혀를 얽자 턱이 얼얼했다. 타액이 흘러내리자, 로렌디스가 목을 받치고 그것까지 샅샅이 맛봤다. 깊게 얽은 숨이 점점 가빠졌다. 목덜미를 타고 쇄골까지 내려온 입술은 이빨을 드러내며 살갗을 씹었다.

캐서린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로렌디스가 뒤이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덮쳤다. 아랫배가 긴장으로 뻣뻣하게 뭉쳤다. 다리 사이에 열기가 고였다.

“하아-”

캐서린은 마른 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묻었다.

* * *

집사가 짐을 마차에 옮겨 실었다. 캐서린은 꾸벅꾸벅 졸며 마차로 걸어 나갔다. 로렌디스가 그런 캐서린을 발견하고 팔을 뻗었다. 눈을 반쯤 감고 걷는데, 어느새 로렌디스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를 안아 들고 있었다.

“잠이 아직 덜 깼나?”

그 말에 캐서린은 반박하고 싶었으나 졸려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재우지도 않았잖아.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북부로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보통은 별장에서 해가 뜨는 모습과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별장 근처로만 조금씩 돌아다녔다.

“두 분께서 남부를 또다시 찾아주실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캐서린은 마지막으로 모자를 덮어쓰고 남부 전경을 둘러보았다.

“좋은 곳이야.”

북부와는 다른 의미로 좋은 곳이다. 온기 때문인지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는 것도 그렇고.

“다음에 기회가 닿거든 또 보지.”

캐서린은 마차에 타서 떠나는 길목을 찬찬히 다 눈에 담아냈다. 예전에 그랬던가? 북부의 눈이 지겨워질 때가 있댔는데, 캐서린에게도 그런 시기가 다가온 것 같다.

‘너무 잘 적응했지.’

이런 온화한 곳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는 건, 그녀가 이미 북부에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캐서린은 돌아가는 길에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남부는 전체적으로 넓은 공터에 집을 드문드문 지어 두었다. 농사를 짓는 걸 보니, 남부의 거주민 같았다.

모자를 쓴 이들이 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는데, 표정들은 모두 밝았다. 로렌디스가 편히 보라며 창문을 열어 주었다.

“농사꾼들 농사철이잖아. 지금이면 한참 일손들 많이 필요한 시기야.”

“그런 것도 알아요?”

로렌디스가 창턱에 턱을 괴고 답했다.

“언젠가는 여기 와서 살고 싶었으니까.”

“당신이요? 후계도 안 두고, 북부를 비우려고 했어요?”

“그거야 먼 훗날의 일이잖아.”

캐서린은 맞는 말이라며 짤막하게 호응했다. 농사터를 지나자 넓은 벌판만 나왔다. 잔디만 가득한 이곳은 넓고 광활했다. 특별히 볼 건 없었고, 시야가 넓고 높은 게 다였다.

“로렌디스도 북부가 지겨웠어요?”

“아버지께서 실종되고 어려서부터 버텼으니, 솔직히 지겨울 때도 됐지. 지금이야 다르지만, 그때는 나도 피곤했어.”

로렌디스가 직접 속마음을 말해 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캐서린도 섣불리 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처음과 비교하면 로렌디스도 분위기가 많이 풀린 편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조금은 무뎌졌다.

“아이를 낳게 되면요.”

캐서린은 느릿하게 운을 뗐다.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캐서린이 입술을 가리고 킥킥대며 웃는데, 로렌디스는 떨떠름하게 눈매를 찌푸렸다. 아이가 싫다는 게 아니다.

“하필이면 닮아도 왜 나를 닮아?”

캐서린은 로렌디스와 둘이서만 있을 때면, 훗날 태어날 아이를 두고 이야기 나누곤 했다.

막연하게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들을 닮은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직까지는 막연한 미래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훗날 눈앞에 다다르면 이럴 것 같다는 그런 삶 말이다.

“뭐, 나중 일이잖아요.”

마차는 빠르게 굴러갔다. 북부에 점점 가까워지자, 익숙한 한기가 그들을 반겼다. 예전에는 뼈가 시리도록 추웠는데 지금은 또 달랐다.

북부에 도착해서는 여느 날과 똑같았다. 브레디가 도착한 내외를 마중 나오더니,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성에는 별일 없었어요?”

“주인마님께서 자리를 비운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일이 생겼겠습니까? 고요하고 아주 평화로웠습니다.”

캐서린은 성문 너머를 가만히 돌아봤다. 내성을 감싼 성문은 웅장하면서도 굳건했다. 성벽은 드높았고, 막연한 믿음이 내면에 자리 잡았다.

앞으로도 저 성벽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다. 북부는 부흥하고, 야만족과의 일은 서서히 잊히겠지.

캐서린이 성문 너머를 돌아보는데, 로렌디스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맞닿는 시선이 따사로웠다.

“어딜 보고 있어?”

“아니에요. 이만 들어가요.”

캐서린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실없긴.”

하녀장이 숄을 가져와서 덮어 주려는데, 로렌디스가 대신 받아들더니 그녀에게 챙겨 주었다. 그는 이음새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워 주고, 가느다란 잔머리를 정돈해 넘겼다.

“들어가자.”

로렌디스가 캐서린의 눈두덩이에 입을 맞췄다. 어이쿠 하고, 하녀장이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캐서린은 한쪽 눈을 감고 로렌디스의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그의 눈은 덤덤했다. 아주 익숙하게 애정을 나눴다.

오히려 왜 막냐며 캐서린을 타박했다. 캐서린은 두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고 작게 속삭였다. 밖에서는 안 돼요.

“너는 안 된다는 게 많아.”

당신이 거리낌이 없는 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하녀장이 방금 민망하게 고개 돌리는 거 보지 못한 거냐. 자그마한 타박에도 로렌디스는 못 들은 척 넘겼다.

캐서린은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햇살이 등을 내리쬈다. 늘 춥기만 하던 북풍이 몸을 감싸 안듯 안락하게 그녀를 품었다.

-The End

계약직 아내는 이만 떠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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